183. 이의있소!
“설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소. 하이람 공.”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클라우스 황자님.”
수도 바일사르에 위치한 회의장.
성왕의 시체와 함께 알프라이아의 전권을 장악한 라니스 여왕은 곧바로 제국에 사절을 보내 정전협정을 제안했고, 식민지를 완전히 안정화시킨 뒤 돌아온 클라우스 황자의 강권에 의해 협정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그렇지만 사단이 일어난 것은 라니스와 클라우스 황자가 정전협정서에 인장을 새기려던 그 시점.
황궁을 빈틈없이 포위한 벨커스의 콜로서스들과 회의장으로 난입한 수많은 병사들을 보며 클라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하, 하이람 공! 갑자기 이게 무슨…!”
“로렌츠의 반역이 진압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는 벨커스마저!”
곳곳에서 늙은 원로들의 한탄과 탄원이 들려왔지만, 하이람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는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인간으로써의 존엄도 긍지도 모두 버린 채, 당장의 평화에 눈이 먼 자들. 제국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대들의 행동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엘프 귀족 중 한 사람의 몸에 박아 넣은 칼을 뽑으며 하이람이 목청을 높였다.
명백한 반역의 현장.
그렇지만 하이람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모든 밑 작업을 끝마친 상태였다.
‘이미 제국 신문사 대부분은 매수가 끝난 상황에 곳곳에 기사를 배치해 두었고, 반전 여론도 그리 드세지 않다.’
“이 땅의 엘프를 모두 멸절할 때 까지, 인간의 존엄을 위한 성전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제국 내에서 정전협정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아는 것은 중앙의 귀족들 뿐.
신분의 차이에 따라 나뉘는 정보격차가 하이람의 거사를 돕는 경정적인 한 수가 되었다.
남은 것은 이들이 알프라이아와 이면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진실 속에 거짓을 섞는 작업.
그것만 완료된다면 하이람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적법한 절차에 의해 단두대로 내몰 수 있을 것이다.
“얌전히 지시에 따른다면, 신변에 위해는 없을 것입니다. 황자님.”
“그 말을 믿으라고?”
“믿으시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곳곳에 널브러진 87중대원들의 시체를 본 클라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외부 상황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에, 경호병력조차 제압당했다니.’
클라우스의 직속 호위병력이기는 했으나, 87독립중대는 제국과 알프라이아 양측 모두에게 악명이 자자한 부대.
클라우스를 호위하는 열 명의 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쿠스 영지로 귀환하기 위해 열차를 탄 상황이었다.
‘황자님.’
곳곳에서 총을 겨누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클라우스는 자신을 부르는 단델의 수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지원 요청 함. 최대한 지연시킬 것.’
87중대와 같은 야전 부대에서 사용하는 수신호였지만, 벨커스의 잔당, 그리고 다른 해방군 계파와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식민지의 생활로 인해 클라우스는 그 수신호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최대한 이 자의 신경을 긁어놓는 것이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우스는 속으로 조소했다.
‘예전 같았으면 쳐다도 보지 못할 대귀족이었을 텐데. 출세하고 볼 일이군.’
클라디우스 황제가 살아있던 시기, 계승권 최하위의 황자인 그에게 2황자를 후원하는 벨커스의 위세는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베릭트 형님의 목숨으로 얻어낸 자리 덕분인가.’
그렇지만 지금의 자신은 루브라 바일사르의 전권을 지닌 총독.
에드윌 백작이 회의에 불참한 지금, 눈앞에 있는 하이람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자신뿐이었다.
“허면 하이람. 그대는 황권을 노리는 것인가?”
황자라는 신분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하대.
순간 하이람의 눈썹이 움찔했지만, 그는 순순히 이런 도발에 응할 이가 아니었다.
“황좌는 사람의 의지가 아닌 하늘이 내리는 것. 그 이치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말인 즉, 하늘이 원한다면 기꺼이 받겠다는 말인가.’
황좌에 대한 욕심을 지우지 못한 그의 말을 들으며 클라우스는 쓰게 웃었다.
“인간의 순수를 부르짖는 군주가 괴물이라. 참 볼만하군 그래.”
케인의 목숨으로 퍼트린 폭로.
그 덕분에 이 땅에서 황족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대는 영생을 위해 몇 명이나 안배할 생각인가? 하이람 벨커스.”
면전을 향해 쏟아지는 악담에 하이람은 분노 대신 의문이 앞섰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온다고? 13황자에게 원래 이런 배짱이 있었단 말인가?’
그저 얀의 의도에 따라 배치된 꼭두각시라고만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의 강골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하이람과는 달리 그의 양 옆에 도열한 기사들은 주인을 모욕하는 클라우스의 언사를 참지 못한 듯 했다.
“황자 전하!”
“말을 삼가십시오. 제국 기사단의 수장이신 하이람 공이십니다!”
일개 기사가 황족에게 호통을 친다.
이 땅에서 황족의 권위가 어떤지를 잘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그만! 쓸데없는 논쟁을 할 시간이 없다.”
기사들을 제지한 하이람은 차갑게 웃으며 다시 명령했다.
“관련자들을 모두 황성 지하감옥에 가둬라! 철저히 문초하여, 이 웃기지도 않는 협정의 배후를 밝혀내리라!”
정의로운 제국의 기사이자 귀족, 벨커스.
그것을 연기하며 소리 높여 외치는 순간이었다.
- 글쎄, 그걸 굳이 밝혀낼 필요가 있을까?
스산한 목소리.
그와 함께 황성의 천장이 터져나가며, 검은 그림자가 회의장 안으로 짓쳐들었다.
쿠콰콰콰쾅-!
“크악?!”
“백작님! 위험합니다!”
“콜로서스?! 감시병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기에 콜로서스가 회의장에…!”
갑작스러운 난리통에 혼란스러운 기사들이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생각보다 더 늦지 않았나?! 베르쿠트 백작!”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 클라우스 황자가 그렇게말하는 순간, 그레이프니르가 붉은 안광을 내비치며 하이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늦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얀은 조종석 해치를 열어 자신의 발아래에 서 있는 하이람을 내려다보았다.
“베르쿠트…. 백작…!”
얀을 바라보는 하이람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그의 술수에 의해 살해당한 벨커스의 기사, 식민지에서 그가 내부숙청을 빌미로 제거한 벨커스의 수족.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보필해 온 미리암은 저 자의 농간에 의해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일련의 사건이 지나간 결과, 벨커스에게 있어서 베르쿠트 백작이라는 이름은 철천지원수가 되어있었다.
“제 주인인 케인 로렌츠를 죽였듯이, 이번엔 제국을 죽이려 드는가!”
주변에 있는 중도파 원로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렇게 외친 하이람이었지만, 돌아온 것을 얀의 비웃음이었다.
- 아니? 난 여기에 널 죽이러 온 건데.
그 말과 함께 글레이프니르의 좌완부에 장착된 기관포가 실탄을 가득 머금었다.
“이 곳에서 모두를 죽일 셈이라고?! 그걸 내가 용납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검은 얀의 콜로서스를 보며 그렇게 외친 하이람이 손을 들자 새하얀 콜로서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원 산출.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 흐레스벨그 계열의 양산기로 추정.]
“말인 즉, 알리에노르의 기술을 가로챘다는 말이군.”
사방에서 자신을 겨누는 콜로서스들을 바라본 얀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 지었다.
“콜로서스에서 내리게. 베르쿠트 백작. 그대는 제국의 심판을 받아야…!”
- 10년 전. 베르카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나?
확성기를 향해 울려 퍼지는 얀의 목소리에 하이람이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 수천 명의 빈민을 구제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모아, 그들을 실험에 사용했지.
벨커스가 지니고 있는 최대의 치부를 거론하는 얀의 한 마디에 주변 기사들이 곧바로 총을 들었다.
철컹-!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홀로 수만 명의 보병을 갈아버리는 콜로서스.
서로 겨누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하이람이 맨몸상태인 마당에 당장 없애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그래서 본 가문의 기사들을 계속해서 살해한 것이로군?”
치명적인 비밀이 흘러나왔음에도 하이람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헌데, 신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자네의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지? 천하의 벨커스를 모함하려는 술수 치고는 많이 조잡한데.”
- 증거? 라엘이 남겨놓은 물건 정도라면 증거가 될까?
마치 친구에게 의논하는 듯한 평이한 어조.
그렇지만 이 말이 나오자 얀을 바라보는 하이람의 표정은 더욱 더 이상해졌다.
‘어떻게 그 이름을…?’
그렇게 생각한 하이람이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
있다 해도, 이 자리에서 목격자를 포함한 모두를 지워버리면 그만일 일이다.
“나름 놀라운 등장이었네만, 결국 여기까지로군 백작. 주군이 위험해지니 이성을 잃은 모양이…?”
그렇게 외치던 하이람이었지만, 이윽고 그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양 옆에 도열한 기사들, 회의장 구석으로 대피한 귀족들, 심지어는 클라우스 황자와 같은 얀의 사람들마저도, 넋을 잃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하늘 위에 떠 있는 삼각형의 검은 물체.
돌격포로도 닿을 수 없는 머나먼 높이에 떠 있는 그것이 수도 바일사르를 향해 무언가를 뿌려대고 있었다.
‘늦었어.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언젠가, 랜스에 몸이 뚫렸음에도 웃고 있던 클로드 로렌츠가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제국을 뒤흔들었던 그 빌어먹을 전단지까지도.
툭.
발밑에 커다란 종이뭉치가 떨어졌다.
그곳에는 벨커스의 인장이 찍힌 기계장치와 거기에 희생된 엘프들의 증언.
식민지에서 활동하던 벨커스 인사들의 명단과 성왕과 내통한 증거 등, 한 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죄목과 증거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이걸 어떻게…?”
“찾아냈냐고?”
그렇게 말한 얀은 하이람의 눈앞에서 라엘이 가져갔던 기계장치를 흔들어보았다.
케인이 흩뿌린 전단지와 같이, 벨커스의 범죄를 고발하는 내용이 적힌 수십만 장의 폭로자료들에는 교황의 인증이 찍혀있었다.
“네가 그 더러운 몸집을 불려대는 동안, 나 같은 인간 하나가 안 나올 줄 알았어?”
그 말에 뭔가 반박을 하려는 순간, 자료를 집어든 기사 중 한명이 비명과 같은 목소리로 하이람을 불러댔다.
“또 무슨 일인가?!”
“백작님. 여, 여기에…!”
떨리는 손으로 기사가 보인 페이지.
그 내용을 읽는 순간, 하이람이 두르고 있던 마지막 한 겹의 평정이 산산이 무너졌다.
“이, 이…! 미친 새끼가…!”
품위고, 격식도 다 내던진 분노에 찬 목소리.
와락 구겨진 자료집에는, 벨커스의 피를 만들어내는 방법과 설비, 그리고 유통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 감히 누가 인간의 존엄을 논하는가-!
확성기를 통해 얀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최대 출력으로 올린 얀의 목소리가 바일사르 수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 권력을 위해 같은 인간을 재료로 온갖 실험을 자행해 온 자가 제국의 백작인가?!
-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적국인 알프라이아에 팔아넘긴 자가 제국의 영웅인가?!
이미 전단과 폭로 자료들은 제국 수도를 포함한 전 지역에 퍼졌다.
그동안 자신들이 믿어왔던 벨커스라는 이미지.
최대의 기사가문이라는 찬란한 베일이 벗겨지고, 그 이면에 숨겨진 추악한 오물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나, 얀 베르쿠트가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소리 높여 외친 얀의 한마디가 벼락과 같이 하이람에게로 떨어졌다.
- 역적 하이람 벨커스의 죄를 물어 결투를 신청하니, 콜로서스를 들고 앞으로 나와라.
조종간을 쥔 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지옥으로 보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