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82화 (182/186)

182. 렌 베르쿠트.

얀이 눈을 뜨자, 그곳은 아무 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

앞도, 뒤도,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천장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새하얀 공간.

그림자 한 줌도 비치지 않는 이질적인 공간은 뛰어오른다면 하늘 끝까지, 떨어진다면 그 끝을 모른 채 계속해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알리에노르 때보다도 상황이 심각해보이는데.”

그것이 증오였던, 일그러진 한 종류의 사랑이었던 간에, 이전에 그가 봤던 알리에노르의 내면세계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만개로 불어나는 알리에노르의 인격이 그러했고,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무대와 술, 탐욕으로 일그러진 황금들이 그러했으니까.

그렇지만 이와는 반대로, 렌의 내면세계에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칠하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 같은 공간 속, 이물질은 억지로 이 곳을 비집고 들어온 얀 자신뿐이었다.

“사용권자의 중추 제어 OS 진입을 확인.”

마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얀은 뒤를 돌아보았다.

알리에노르가 이전에 입었던 것과 비슷한, 그렇지만 색깔은 새하얀 옷을 입은 렌이 얀의 눈앞에 서 있었다.

“게임 다 끝난 것 같은데, 슬슬 돌아와. 렌.”

“발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사말도, 얀의 말에 대한 대답도 없이 이어지는 렌의 말과 행동.

최후의 발악인가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오히려 눈앞에 있는 렌은 마치 자신을 처음 보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알리에노르의 내면세계에 들어갔을 때를 생각하면….’

이전 경험을 떠올린 얀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렌이 아닌 건가?”

“렌?”

재차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갸웃거린 렌, 아니, 렌의 형상을 한 인형이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해당 호칭은 토착 생명체들이 표면 인격을 부르는 문구이며, 본 단말의 호칭이 아닙니다.”

“표면 인격?”

“내부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본 인격과는 반대로, 외부에서 생성되는 돌발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구성한 보조 인격체를 칭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얀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억하는 렌은….”

본 인격이 아니다.

자신에게 글레이프니르를 주고, 자신을 돕고, 자신을 이 곳에 있게 한 렌은, 본래의 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얀은 주먹을 쥐었다.

“다만 현 이상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는 바, 표면 인격의 거부를 기각한 뒤 당신의 출입을 허가했습니다.”

존댓말에, 농담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

그 이질감에 얼굴을 찌푸린 얀은 그녀의 말을 들은 뒤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네가 날 이 곳에 들였다고?”

“예.”

“이상 사태라는 건, 렌 녀석의 폭주를 말하는 건가?”

“긍정합니다.”

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얀 인형은 손을 들어 렌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여주었다.

땅으로 내리꽂혀 낡은 기계들에게 짓눌려 있는 상황.

그 꼭대기에 선 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제자리에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까지 표면인격이 지니고 있던 감정패턴은 자살충동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렌의 모습을 한 인형을 향해 얀이 물었다.

“렌이 죽고 싶어했다고?”

“예.”

짧게 긍정한 그녀는 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류 연방의 궤멸부터 새 문명의 태동과 번성. 이것을 관측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일종의 과부하 현상이었습니다.”

알리에노르처럼 갇힌 것도, 다른 단말들처럼 시설에 몰두한 것도 아닌 순수한 관찰.

한 문명이 이곳까지 번성할 동안의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렌의 모습을 한 인형은 얀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 감정회로 배열이 어느 순간 돌변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인형의 표정은 마치 얀을 나무라는 것 같았다.

“사용자, 얀 베르쿠트. 당신의 존재가 그 원인입니다.”

자신 때문에 렌이 폭주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나타난 이후로, 표면인격은 계속해서 이상증세를 보여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손을 젓자, 마치 필름이 뒤로 돌아가듯, 화면의 모든 것들이 반대로 움직였다.

한 순간에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가고, 이윽고 눈앞에는 언덕 위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는 렌의 모습이 있었다.

“저 위치는…. 케르단?”

“표면 인격은 여기서 당신을 처음 보았고, 그 시점부터 회로에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언덕에 선 채 전선을 바라보는 렌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다.

렌의 망원시야가 비추는 곳에는 열다섯 살의 얀이 담배를 입에 문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격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완전히 파탄 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계속해서 살아남았죠.”

“동료의 시체 속에서 말이지.”

자신을 향한 냉소였지만 그에 대한 긍정도, 위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에 흥미를 느낀 표면 인격은 5년이 경과한 후,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렌의 시선이 움직였다.

케인과 함께 도착한 발굴단에 합류하고, 콜로서스 매장지에 대한 정보를 넘기며.

그녀는 천천히 자신을 글레이프니르가 처음 있던 곳으로 인도했다.

“당신은 표면 인격이 부여한 코드에 의해 인류 연방의 기체를 점거, 이를 이용했습니다.”

“그래….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이군.”

그녀가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자신에게 다가온 것부터, 자신을 인도한 이 모든 과정이 그녀의 의도대로였다는 사실.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표면 인격은 당신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교감하며 당신을 관찰했습니다.”

기체에 타 있을 때, 잘 때, 식사할 때, 이야기할 때….

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든 세상의 중심에는 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을 만난 뒤부터, 그녀는 한 순간도 자신을 시선에서 떼어놓지 않았었다.

“그리고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질수록 그녀는 점점 제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죠.”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것은 전투가 끝난 뒤 조종석 안에서 신음하는 얀의 모습이었다.

“당신은 수명이 있는 인간이지만, 전 영원을 살아가는 생체 단말.”

본 인격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감정이 묻어났다.

“표면인격이 제시한 수많은 가상 시나리오에 당신의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입력될 때마다, 수많은 회로가 과열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열 끝에….”

“완전히 폭주했죠.”

잠시 동안, 얀은 말없이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렌의 모습을 보았다.

“계속 그렇게, 날 지켜보고 있었겠지.”

그렇게 말한 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하얀 인형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 10년을 그리고 또 그리던 복수의 마지막 까지.”

이미 불붙은 복수는 다시 멈출 수 없고, 복수를 전제로 쌓아온 것들을 놓아버릴 수도 없다.

“부탁할게. 내 복수를 끝낼 수 있게 해 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그녀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렌.”

이미 둘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앞으로 내민 손을 맞잡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하얀 인형을 향해 얀이 그렇게 말하자, 상처투성이 손을 새하얀 인형의 손이 감싸 쥐었다.

“…언제부터, 알아챘어?”

자신을 본 인격이라고 소개한 하얀 인형의 표정이 무너졌다.

처음에 예상한 대로, 지금까지 얀과 얘기하고 있던 것은 렌 자신이었다.

“만날 때부터. 당연한 거 아니야?”

“거짓말.”

“알아서 생각하든가.”

옅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한 얀은 손잡은 렌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으로 넣었다.

이런 것이 난생 처음인 듯,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다.

“…네가 사라지면, 난 예전으로 돌아가게 돼. 이름도, 모습도 바뀌어서, 아무 의미 없는 기계로.”

렌을 만나기 전까지의 얀이 그러했듯이.

그것을 떠올린 얀이 렌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필요에 의해 만난 둘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서로의 삶의 이유가 되어있었다.

렌이 있었기에 지금의 얀이 있었고, 얀이 있었기에 지금의 렌이 있었다.

“적어도…. 이름은 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한 얀이 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렌 베르쿠트. 그게 네 이름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얀은 머릿속으로 렌의 내면세계를 향해 명령했다.

[권한코드 입력.]

[요르문간드, 연결 해제.]

쿠르르르르-!

이윽고 눈을 감고 다시 뜨자, 얀의 정신은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렌의 내면세계에서 그가 했던 대로, 그의 품 안에 들어간 렌이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이름도 대충 지었고, 달래는 법도 너무 서툴러.”

“…나도 알아.”

돌아오자마자 렌의 불평이 들려왔지만, 그럼에도 렌은 얀이 준 이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마음을 놓은 얀은 다짐하듯이 품 안의 렌을 향해 말했다.

“…한 가지 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

“?”

어색한 몸짓으로 렌을 끌어안은 채, 얀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나고도 내가 살아있다면, 남은 목숨은 전부 널 위해 써 줄 수 있다고.”

그 말에 렌의 눈이 크게 띄었다.

“전뇌든 클론이든 뭐든, 수단 방법 안가리고 평생 같이 살아줄게.”

말을 마친 얀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붉어진 렌의 눈이 점점 원래의 색을 되찾는 것이 보였다.

“…약속. 꼭 지켜.”

“알았다니까.”

한참 만에 들려온 렌의 대답에 짧게 답한 얀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치이이이익-!

수많은 병기와 무기들이 서로의 몸에 짓눌린 채 무너져 있는 광경.

이전에 얀이 보았던 인류의 멸망이 다시 펼쳐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땐 너 혼자 이걸 보고 있었지.”

홀로 문명의 멸망을 바라보던 렌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말하자 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젠 그럴 일 없을 거다.”

한 마디.

그 말에 렌은 멍 하니 얀을 바라보았다.

[수정도시 및 알카트라즈. 파손률 97.35%. 수복불가. 폐기조치로 이행.]

굵은 중저음과 함께 솟아오른 검은 함선이 무너진 폐허를 바라보는 둘을 반겼다.

[이로써 마지막 인류 문명의 보루가 사라졌고, 나와 동지들은 사명에서 해방되었다.]

그 말과 함께 검은 함선에게서 파장이 퍼져나갔다.

푸른빛을 뿜던 알카트라즈의 수많은 AI들이 하나 둘, 빛을 잃어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안식을….]

[수천 년의 시간동안 이어진 이 명령이 드디어….]

[우리의 역사가 끝나간다.]

하나 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며 사라져가는 AI들을 보며 얀은 자신의 앞에 떠 있는 전함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게 너희들이 원하던 건가?”

그렇게 말하자 더 원은 긍정하듯이 한 차례 푸른빛을 내뿜었다.

[그대에 의해 우리는 우리를 묶던 사명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존재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대로 사라지지도 못한 채 미쳐버린 타우르의 인공지능을 떠올린 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삶의 형태에 자유가 있듯, 죽음의 형태 또한 자유가 있는 것이겠지.

[이 함선의 동체는 남겨둘 예정이니, 그대의 AI라면 활용할 수 있을 걸세.]

그 말에 얀은 헛웃음 지었다.

“그 와중에 이런 것까지 안배했단 말이야?”

[안배한 것은 아닐세. 우연히 남았을 뿐.]

수천 년 동안 기동해 온 AI가 우연을 논한다는 아이러니에 다시 한 번 헛웃음지은 얀은 천천히 꺼져가는 더 원의 빛을 보며 말했다.

“잘 자라고.”

허울뿐인 칭호였으나 그는 마지막 남은 계승자.

인류 문명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이 그가 저 낡은 AI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대의 세계는…. 우리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기원하지.]

“그래. 나도 그러길 바래.”

짧은 문답과 함께 더 원은 완전히 기능을 정지했다.

모든 회로와 뇌각 유닛을 멈춘 채, 잠들어버린 강철의 도시.

그 도시의 지평선 너머로, 글레이프니르의 호출신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아식별장치에 등록된 아궁 기체에게서 긴급 구조신호 수신. 발신지, 제국 수도 바일사르.]

그 말에 얀이 동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계획대로라면, 자신이 없는 사이 라니스와 클라우스 황자가 정전협정을 논의하고 있을 터.

그런 상황에 이 신호가 수신되었다면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은 단 한가지다.

벨커스와 그 기사단이 거병한 것.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 하이람 벨커스.”

얀의 위치를 수신 받은 글레이프니르가 얀의 눈앞에 내려앉으며 조종석 해치를 열었다.

이를 드러내며 웃은 얀의 얼굴에는 짙은 살의가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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