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81화 (181/186)

181. 과거에 짓눌린다.

쿠오오오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불타올랐다.

[1 집단군, 전방 화력에 의해 전력 50% 소멸. 대응을 위한 병력 재편성.]

[미사일 1파 30% 적중. 차탄 장전까지 120. 지원함대의 원호 요청.]

[함대 20% 소모. 각 전함, 주포 2차 발사.]

사방에서 렌의 군대를 둘러싼 고철함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무시들을 쏟아냈다.

“통제장치도, 전자 장비도 몇 세대는 더 열등할 텐데…!”

피아식별 없이 최대 화력으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화력.

하전입자포와 펄스 미사일 같은 연방의 무기들로 대응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통합된 시대. 적이 없는 시대의 병기는 더욱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소규모 집단을 제압하거나 영내 치안유지에 특화된 핏불테리어가 좋은 예였다.

[그렇지만 분열의 시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던 자들의 병기는 서로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광적으로 진화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피해를 입히도록.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죽일 수 있도록.

연방이라는 거대한 체제의 압력이 없었다면 이들은 끝까지 남아 눈앞의 모든 것을 불태웠을 것이다.

“다른 성능은 차치하고서라도, 화력과 파괴력 만큼은 저쪽 이상이란 뜻이군.”

[그 말대로지.]

짧게 긍정하는 더 원의 말과 함께 모든 함대에서 미사일의 해일이 쏟아졌다.

너무 많아서 쏜 이들의 감지모듈조차 다 잡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잊었어? 그 분열의 시대를 누르고 군림한 것이 연방의 기계들이야.”

[2열, 배리어 동조.]

[배리어 주파수 조정. 요르문간드의 지시에 따름.]

쿠콰콰콰콰콰쾅-!

하늘 전체가 불꽃에 휩사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폭발.

거대한 태양과도 같은 섬광이 지나간 후였지만, 그것을 홀로 막아선 요르문간드는 아직 건재했다.

“이런 미친, 저걸 그냥 막아낸다고?”

저것이 켈트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는 요르문간드가 다가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앞의 하얀 날개의 힘을 목도할 때 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요르문간드, 각 모듈 입자 파장 동조. 포격모드로 전환.]

촤르르륵-!

활짝 편 렌의 날개 앞으로 여섯 개의 철창이 모여 서로 맞물렸다.

철컹-! 철컹-!

이후 수십 개의 깃털이 그곳에 모여들어, 철창으로 만들어진 포신을 감싸 새하얀 거포를 만들어냈다.

[전략열선병기 우로보로스(Ouroboros), 구축 완료.]

“저건 좀 불안한데?!”

[확인. 전 함대, 사선상에서….]

“늦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렌은 방아쇠를 당겼다.

삐이이이이이이-!

거대한 광선이 함대를 휩쓸고, 잠시 후.

쿠콰콰콰콰쾅-!

렌의 군대를 포위한 함대의 한 축이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땅으로 떨어졌다.

[1함대 및 3 항모전단 소멸. 피해규모 산출.]

[잔존 함대 중 4합대, 23기동전단은 사격 지점에 emp. 사출.]

[전방 적 기체에 이상 감지.]

사격이 끝난 직후, 입자포를 다 사용한 깃털들이 순식간에 요르문간드의 본체로 돌아가고, 새로운 깃털들이 그 자리를 메꿔갔다.

“설마, 저게 연사가 된다고?”

더 원의 함선인 어벤져에 탄 얀이 맥이 빠진다는 듯 그렇게 되뇌는 순간.

삐이이이이이이-!

다시 한 번 광선이 함대를 훑고 지나갔고, 다시 한 번 하늘이 불타올랐다.

쿠르르르르르…!

순식간에 함대의 절반이 가루가 된 상황.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렌은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 얀을 향해 말했다.

- 포기해. 이 병력의 수십 배를 가져온다 해도 뚫어버릴 수 있어.

“대체 쟤한테 뭘 만들어준 거야?”

더 원을 향해 나무라듯 말하는 얀이었지만, 그것을 본 더 원 또한 놀랍다는 듯이 턱을 감싸 쥔 채였다.

“추진기관과 동력기관을 전부 포격에 전환한 뒤 미스틸테인의 탄두로 그 충격을 제어하다니, 이 정도까지 저 기체를 다룰 수 있었단 말인가?”

기본 설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기가 튀어나오자 그 역시 적잖이 놀란 듯 했다.

“대응법은?”

답답해할 새도 없이 얀이 그렇게 묻자 더 원이 얀을 향해 말했다.

“없네. 원래 작전대로 돌입하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자 이를 악문 얀이 그에게 명령했다.

“좋아. 가보자고.”

그렇게 말하는 강습함 어벤져의 전면부에는 두터운 장갑을 내세운 전함들이 서로의 동체를 연결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돌격함대, 추진기 가동. 계승자를 보호하라.]

[사명의 끝을 위해.]

[자유를 위해.]

자유.

케인이 항상 입에 닭 다니던 그 문구를 떠올린 얀은 쓰게 웃으며 함선 전면부로 몸을 옮겼다.

“돌격 개시.”

얀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렌의 군대를 둘러싼 함대의 한 부분이 그대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얀…!‘

대열에 이상을 알아챈 렌이 그 곳을 돌아보자 녹슬고 떨어져가는 온갖 함선들이 얽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로보로드, 출력 30%.]

“상관없어. 쏴.”

[명령 확인.]

다가오는 함선뭉치들을 향해 다 충전하지 못한 우로보로스가 불을 뿜었다.

깃털을 바꾸며 연사가 가능하다고 하나 동력의 총량에는 제한이 있었으니, 이 이상은 불가능했다.

키이이이잉-!

열선 코팅이 아직 살아있는 전함들이 그 가공할 광선을 받아내는 것과 동시에 우로보로스의 섬광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쾅-! 쿠콰쾅-!

미처 피하지 못한 전투기계들이 그것에 휘말려 사라지고, 주변의 다른 함선들도한 무사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을 받아낸 함선문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죽음을 위해….]

[우리의…. 소원은….]

함체의 절만이 완전히 녹아내려 붉은 쇳물을 토해내고 있는 고철함선들은 마치 피흘리는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하나 둘 대열을 이탈해가며 떨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얀은 눈을 가라앉혔다.

[목표 도달까지 앞으로 500.]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요르문간드의 동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왔다.

“이런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수천 개의 열선포와 철창이 들어오는 함선들을 차례로 꿰뚫고, 걷어내고, 녹여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2함대 소멸. 대체 함대 지원 요망.]

[3 항모전단, 함재기 99% 소실. 함체를 전면부에 배치. 적 화력을 상쇄함.]

[화력함 충무, 저 사일로 소진. 동력로 과부하. 자폭절차 가동.]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하얀 날개를 향해 들이닥치는 수백 대의 전함들.

장갑 내구도도, 함체의 수명도 다 된 고철덩어리들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순수한 쇳덩이의 무게가 요르문간드의 날개를 짓누르며 그녀를 땅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콰득! 콰드득-!

“연방이 멸망시킨 시대의 병기들이 연방의 유산을 짓누르는 꼴이라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군.”

그 광경을 지켜보는 더 원이 그렇게 말하며 얀을 돌아봤다.

그의 개인적인 요청이었다고 하지만, 이들은 지금 연방의 시대를 무너트린 피조물의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모든 존재는, 그 과거에 짓눌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당연하지.”

혼잣말처럼 내뱉은 더 원의 말에 뜻밖에도 얀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외면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놨다고 해서, 그 무게가 사라지는 게 아니야.”

이 상황을 보면서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원수를 향한 말.

어머니를 죽이고, 사람들을 실험에 사용한 뒤,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치워두고 자신은 빛나는 영웅이 되려 하는, 하이람 벨커스를 향한 독백이었다.

“행동의 대가는 언젠가는 찾아오기 마련이지. 어떤 형태로든.”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얀이 타고 있는 어벤져의 동체가 요르문간드를 짓누르며 하부 갑판을 열었다.

[건투를 빌지. 마지막 계승자.]

함내 방송장비를 통해 들려오는 더 원의 목소리에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투는 무슨, 우리 정비반장 다시 데려오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한 얀은 곧바로 뛰어내려, 땅에 짓눌린 요르문간드의 동체에 손을 뻗었다.

글레이프니르의 연결장치가 없는 상태였지만, 지금의 그라면 가능했다.

“커넥터 사출.”

계승자의 코드가 내리는 명령.

절대적인 명령권자의 지시에 하얀 날개의 깃털들이 재배치되며 얀을 향해 연결장치를 내보였다.

철컥!

얀은 목덜미의 기계장치에 요르문간드의 커넥터를 연결했다.

[계승자, 얀 베르쿠트. 기체 접속 확인.]

“최종 관리자 권한 발동. 심층동조 개시.”

키이이이잉-!

그 말과 함께 목덜미에 격통이 밀려오고, 얀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

털썩-!

“이, 이것은?!”

“성왕 폐하의…!”

눈앞에 나뒹구는 검게 그을린 시체.

그리고 그것이 두른 옷과 어깨의 문양을 본 알프라이아 귀족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성왕이 순수혈통주의를 표방하며 무슨 짓을 했는지, 당신들도 모르지는 않겠지요?”

한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알프라이아 왕성에 난입한 라니스.

그녀의 양 옆에는 그 동안 핍박을 감내해오던 혼혈종들의 지도자와, 오크, 고블린 공동체의 수장들이 전부 모여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란이라니, 인간과의 전쟁이 코앞인 와중에…!”

“당신들이 성왕을 제어했다면, 전쟁이 이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라니스는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말했다.

“알프라이아를 지탱하던 발두르, 그리고 그 상징이던 성왕은 죽었습니다.”

그 말에 움찔한 귀족들은 하나같이 순수한 엘프 혈통들이었다.

“이, 이이익?!”

엘프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향해 내달렸다.

반전론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그 동안 성왕을 도와 전쟁을 주도해 온 자신들은 제국을 달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여, 여봐라! 이 자들을 잡아라! 성왕 폐하를 죽인 반역…!”

왕성을 경비하고 있는 다른 사용인들을 급히 부른 귀족들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온 엘프들 역시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 뿐이었다.

“네, 네놈들이…?”

“성황 폐하를 모셔 온 너희들이 감히 반란을…!”

“닥쳐-!”

그들을 이끄는 한 젊은 엘프는 분노로 얼굴이 벌게진 채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애초에 우리를 같은 인격으로도 보지 않고, 우리 속 가축만도 못하게 취급한 작자다! 그런 이를 위해 우리가…!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엘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친구의…. 살을 도려내서…. 그걸…! 조리장으로…!”

성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의 압도적인 공포가 마비시켰던 이성과 죄책감이 돌아왔다.

그의 명령에 의해 행해진 수많은 학살행위들.

그리고 벨커스와의 합작으로 행한 인체실험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주동자, 협력자, 동조자를 색출하기 위해 온 왕성을 헤집었고, 그 과정에서 몇몇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다고 네놈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우릴 잡아들인다 해도 네놈들은 폐하와 함께한 이들이다! 전범들이란 말이다!”

“상관없어. 우리가 묵인해온 것들, 우리가 못 본 채 한 것들이 되돌아온 거야.”

그 말에 라니스는 서글픈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지만, 귀족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운 엘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들이 할 일은 그 대가를 치르고, 심판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한 엘프들은 라니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 곳에 모인 각 공동체 대표자들의 공통된 의견에 다라, 이 시간부로 알프라이아의 전권은 망명정부에게 귀속됩니다.”

알프라리아를 이끌게 되었다.

전쟁의 멍에와 동족의 피, 그리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죄악을 짊어진 나라를.

“우루크. 제국에 보낼 사절을 준비하세요.”

그렇지만 들이닥칠 죄의 대가를 두려워하기보다는 남아있는 한 줌 생명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전쟁으로 헛되이 죽지 않기를.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이 이상의 죄를 쌓지 않기를 바라며.

“전쟁을 끝내고, 남은 알프라이아 사람들을 추스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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