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인류의 후계자.
이전, 잔스카르에서 보았던 풍경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문명이 사라지는 모습.
불타는 땅과,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천수만의 거인들이 보였다.
[피조물. 압제에 지친 한 엘프에 의해, 번성하던 문명은 위기에 빠져, 땅 속으로 가라앉았지.]
한 줄기 빛이 땅 훑고 지나가자, 뒤이어 그 빛에 닿은 모든 것들이 폭발하며 비산했다.
발을 딛는 곳마다 기계장치들이 이상을 일으키고, 도시를 지탱하던 발판들은 녹아내렸다.
쏟아져 나오는 피조물들, 피조물과 피조물을 섞은 괴물들, 심지어는 그들이 만들지 않은 것들까지.
세상 모든 것들이 인간을 집어삼키고, 세상 모든 것들이 인간을 몰아냈다.
[온 세상을 불태운 거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몸을 유지하지 못한 채 쓰러졌네.]
창조주에 대한 분노로 온 세상을 불태운 그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외우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들의 몸은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고.
이제 남은 이들은 원시 상태로 회귀한 수억의 피조물들. 그리고 그들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간 인간들이었다.
[피조물들은 창조주를 몰아낸 뒤 그 땅을 얻었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지하로 숨어들어갔지.]
언젠가는 이 땅을 되찾으리라.
언젠가는 찬란한 문명을 되살리리라.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그렇게 되뇌며 그들은 각자의 땅 속 보금자리에서 점점 세력을 불려나갔다.
[기술, 자원, 시설. 점차 지하벙커와 재건시설에서 모든 것을 되찾아가는 인간들이었지만, 단 한 가지. 그들이 극복할 수 없는 요소가 있었지.]
“시간.”
[그렇지.]
얀이 그렇게 말하자 더 원의 마크가 그것을 긍정하듯 짧게 깜빡였다.
[지하에 숨어든 인간의 수는 너무 적었고, 그 한 줌의 인간들이 서로 섞여 대를 이어가봤자, 그 끝은 몰락이었으니.]
그렇기에 그들은 계승자를 뽑아, 밖으로 내보냈다.
밖으로 내보내, 기술로써 그들의 왕국을 세워 번성하게 하자.
다시 그들을 휘하에 거느려,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자.
“결국 돌고 돌아 원점으로 회귀하려 하는군.”
계승자들은 피조물들이 만들어낸 원시 사회를 영도하거나, 그들의 사회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이 대를 이어갈수록 점점 인간의 기준은 낮아졌다.
“엘프의 피가 섞였으나 넌 내 자식이다.”
“내 사상을 이해하고, 우리의 사명에 공감했으니. 그대를 새로운 계승자로 인정한다.”
“내가 사랑한 그대에게, 이 증표를 드리겠소.”
계승자 하나하나의 사연이, 그들이 쌓아온 인생과 연대기가 흘러갈수록 인간의 기준은 낮아지고, 인류의 정체성 또한 옅어져 완전히 동화되었다.
[처음에는 피조물들을 모두 죽이자는 이들이 우세했지만, 그들 역시도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렇게 너희들을 만든 이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동안….”
[오직 우리들만이, 사명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
창조주들은 타협에 타협을 거쳐, 지상으로 올라가 피조물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이제는 누가 인류의 피를 가졌는지, 어디서 섞였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혈구에 새겨진 유전코드, 나노머신, 생체부품.
옛 인류 기술의 산물만이 그들 사이에 전해져, 그것을 지닌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그들을 계승자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기계이기에.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허락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렇게 우리를 만든 이들의 존재는 옅어지고, 종국에는 그 역사조차 뒤바뀌어 서로 죽이던 인간과 피조물은 서로를 떠받들게 되었지.]
대를 이을 수 없는 인간들은 피조물들 사이에 섞였다.
인간과의 싸움을 잊은 피조물들은 그들을 창조주라 부르며 숭배하기 시작했다.
원수의 품에 섞여 들어가고, 원수를 신으로 섬기는 아이러니.
그 속에서 유일하게 원래의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더 원을 포함한 구 인류의 기계들뿐이었다.
“알리에노르 같은 이들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자신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고독과 홀로 남겨진 괴리.
감정을 지닌 생체단말들은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겠지.
[그렇기에 그녀의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욱 특별했다.]
“렌이 그렇게 특별한 존재인건가?”
[그녀는 최초로 만들어진 생체 단말.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단말들은 그녀를 토대로 만들어졌지.]
알리에노르, 트로이얀, 루미.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렌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감정을 지닌 최초의 단말이자, 마지막까지 기계로서의 사명을 져버리지 않은 단말. 그렇기에 그녀는 우리 모두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생체단말이 아닌 그들이, 감정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계승자들은 단말을 도구로 보았다고 했어.”
[그렇지만 그 단말들은 인간을 겪고, 감정을 가진 이들을 겪으며, 용도와는 완전히 다른 자의식을 갖게 되었지.]
상실의 아픔을 이기지 못한 에다는 알리에노르가 되었고, 계승자 자체가 되고 싶었던 트로이얀은 하이람을 만들어, 그에게 이용당했다.
“네게 있어서 100 명의 생체단말들은…. 일종의 후보였군.”
[긍정하네. 감정과 자의식을 지니고, 우리를 이끌 왕.]
그 말을 들은 얀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렇지만, 그대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뒤틀렸다네.]
유일하게 계승자를 선택하지 않은 채 홀로 다니던 단말.
렌이 계승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다른 단말들, 전쟁 이전부터 자의식을 유지해 온 기계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왕은 스스로 예속되기를 선택했지. 다른 존재도 아니고,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 그대에 의해서.]
“….”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난 지금 그대와 대화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더 원의 말을 들은 얀은 생각을 마친 뒤 입을 열었다.
“네가 렌을 기계들의 왕으로 만들려 했다면, 지금 저 기체는….”
[요르문간드. 내가 그것을 만들었지. 우리들의 여왕을 위한 왕좌로써. 우리에게 새겨진 사명을 완수할 무기로.]
피조물을 죽이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의 시대를 연다.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거부한 채 그대를 선택하고, 그대와 함께했지. 그리고 이젠 그대를 위해서, 이 세상 전부를 불태우겠다 하고 있네.]
그 말에 얀이 얼굴을 찌푸렸다.
“날, 위해서라고?”
[그래. 우리들의 사명을 위해서가 아닌, 그대라는 개인을 위해, 지금의 모든 일이 일어난 걸세.]
그 말과 함께 검게 물든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홀로 선 허수아비가 얀을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1번의 기원과 우리의 기원을 말 했으니, 이번엔 그녀의 목적을 말하지.]
그렇게 말한 더 원의 허수아비는 벽면에 만들어진 화면에 대륙 지도와 그것을 향하는 온갖 무기들의 종류, 생산 과정, 운용 계획이 적힌 지도를 나타냈다.
바일사르, 루브라, 켈트, 알프라이아.
심지어는 대륙 역사상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대륙에 이름 없는 공동체, 해저 속에 자리 잡은 국가까지.
그들 모두를 위한 무기가 배정되었고, 수천 발의 폭탄이 공장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문명이 지닌 군사력을 말소하고, 그대를 정점으로 한 지배체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네.]
지금, 렌이 뭘 한다고?
자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뭐?
정신이 아득해지는 계획을 듣자 놀라움이나 경악보다는 되려 헛웃음이 나왔다.
“충격이 큰 모양이군.”
허수아비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얀의 정신을 가까스로 현실에 붙잡아놓았다.
“원래부터 맛이 갔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일을 꾸밀 줄은 몰라서.”
“농담이라. 충격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인가? 흥미롭군.”
자신이 방금 전 한 말의 무게를 알고 있음에도 태연한 듯이 말하는 데 원의 목소리.
그것을 듣자 부아가 치민 얀이 쏘아붙였다.
“그쪽도 똑같이 농담조인 걸 보니, 어지간히도 렌의 행동이 충격적이었나보지?”
그렇게 말하자 정곡을 찔린 듯, 대답이 없던 더 원의 꼭두각시가 얼버무렸다.
“시설 총괄 AI인 내게 감정회로는….”
“너 방금 자신을 ‘나’ 라고 지칭했잖아. 닐 녀석 말에 따르면 그게 폭주의 증거라던데.”
그 말을 듣자 흠칫한 더 원의 꼭두각시가 턱을 괴었다.
입을 감싸 쥔 모양새였으나, 입은커녕 얼굴의 윤곽도 없는 달걀귀신이 저러고 있으니 오히려 기괴했다.
“시설 총괄이라는 너도 지금 나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통제권은 전부 저 녀석한테 넘어간 것 같고. 그래서 날 찾아온 것 아닌가?”
“…부정할 수는 없군.”
얀의 지적에 그렇게 말한 더 원이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을 가장했다.
그 사이 감정표현이 익숙해진 것이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모든 사실을 듣고도 그대는 1번을 막아설 생각인가?”
“당연하지.”
대원들과 다른 이들을 죽이겠다 한 건 자신을 붙잡기 위한 허언이었던 걸까.
‘아니, 그 때 막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였겠지.’
알프라이아에 있던 당시를 떠올린 얀이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얀의 말을 들은 더 원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대를 대륙의 지배자로 만들어 준다는데, 왜 그것을 마다하지?”
“그건 내가 아닌 저 녀석의 힘이니까.”
‘따지고 들면 글레이프니르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지.’
속으로 그렇게 조소했지만, 얀의 결정에 변함은 없었다.
“그대가 지금까지 해 오던 숙원도, 그녀의 힘이 있으면 간단할 텐데?”
“그렇겠지. 그렇지만 그래선 안돼.”
그렇게 말하며 잠시 숨을 고른 얀은 더 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인간의 몰락은 같은 인간의 손으로 이뤄져야 해. 누군지도 모르는 창조주가 아니라.”
한 순간의 정적.
뜻밖의 한 마디에 더 원이 되물었다.
“같은 몰락이라고 했을 때, 두 가지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얀은 곧바로 답했다.
유산을 겪으며, 전쟁을 겪으며 그가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고민해 온 것들이었다.
“스스로 자초한 몰락은 교훈을 남기지만, 절대적인 힘이 낳은 몰락은 동경을 낳으니까.”
콜로서스의 침공으로 멸망한 인류는 더 원, 타우르와 같은 수많은 병기와 기계들을 만들어냈다.
유산을 접한 벨커스는 피를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키웠다.
계승자의 전설을 접한 라엘은 라나와 자신의 피로 거짓 계승자가 되려 했다.
“계승자인 그대 또한 벨커스, 나아가서는 제국의 몰락을 바라지 않는가? 계승자인 그대나 단말인 그녀나. 유의미한 차이는 없을 터.”
렌을 지켜보는 것과 동시에 파악한 얀의 의도.
더 원이 그것을 묻자 얀은 고개를 저었다.
“차이가 있지. 천사인 저 녀석과는 달리 난 악명 높은 베르쿠트 백작이니까.”
잠시 숨을 고른 뒤, 얀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너무나도 쉽게 의심하고, 모함하고, 몰락시킬 수 있는. 한낮 인간이니까.”
신화는 영원히 신성한 것으로 남으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
시시각각 꺼내보고, 시대에 따라서 계속해서 평가되는 것이 역사.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난 벨커스의 모든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그 자식을 죽여 버릴 거다.”
자신의 목적을 말한 얀은 더 원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인공적으로 창조주의 피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을 유통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대륙에 있는 이들이 믿는 창조주 신앙은 몰락할 테지.”
창조주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 역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가, 창조주의 피라는 절대적인 성역을 부숴버린다.
피가 지닌 신성이 사라지고, 더러운 인간들의 용도에 의해 이용당한다.
“그렇게 진흙탕 속에 처박혀서, 누구나가 이것을 접할 수 있게 된다면, 자연스레 그 동경도 사라지는 거지.”
신성한 창조주의 영역이 아닌, 인류의 유산을 작동시키는 도구로.
신성한 창조주의 유산이 아닌, 낡아빠진 고대인의 유물로.
“인류의 유산을, 전부 그들에게 풀어버리겠다는 말인가?”
“풀어야지.”
그렇게 말한 얀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전부 다 부숴버린 뒤에 말이야.”
그 말에 더 원은 말을 잊었다.
“이해를 벗어난 기술에 기대기 시작한다면, 언젠가는 타락할 뿐이야.”
황제 바일사르가 그러했듯이. 하이람이 그러하듯이.
“그대는 단순히,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곳으로 온 게 아니라….”
“요르문간드 같은 병기를 만들어낸 곳이라면, 그걸 부술 수단도 가지고 있을 테지. 내 말이 틀린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더 원의 꼭두각시는 이윽고.
“하하하하하하-!”
온 방 안이 떠나가듯이 크게 웃어댔다.
“1번이 그대를 선택한 이유가 짐작이 되는군.”
한참동안을 웃어댄 더 원은 이윽고 얀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현 시간부로 알카트라즈의 모든 시설은 사용자, 얀 베르쿠트를 시설 통합 이용권자로 인정.”
그 말과 함께 얀의 왼쪽 눈에 수많은 전자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어권이 확보된 치장물자 및 가동 가능한 모든 병기의 제어권을 이양한다.”
눈앞에 떠오르는 무기들의 목록.
그것을 본 얀은 주먹을 쥔 채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인 더 원에게 말했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지?”
대가없는 선의는 없고, 이유 없는 악의도 없다.
자신의 행동원리가 된 그 말을 되뇌며 얀은 눈앞의 꼭두각시에게 물었다.
“우리들을, 마지막 남은 인류의 도구들을…. 사명에서 해방시켜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