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그대가 판단하게.
“아.”
요즘 참 정신을 잃는 일이 많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긴 또 어디야?”
정신을 잃은 얀이 깨어난 곳은 무채색으로 꾸며진 커다란 방이었다.
제국에서도, 알프라이아에서도. 대륙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하학적인 양식으로 배치된 가구들이었지만, 그것을 만져본 얀은 이것들이 하나같이 고급품들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
그렇지만 그런 것들에 감탄할 새도 없이, 얀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요르문간드에 닐을 강제 접속시키고, 코드를 써서 최대한 멀리 떼어놓았지.
사람이 없을 만한 곳.
이 거대한 날개가 원래 있었던 유적으로.
“계승자, 얀 베르쿠트.”
듣기만 해도 짜증이 올라오는 계승자라는 칭호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나 또한 그대를 처음 본다.”
이죽거리는 얀의 말을 그렇게 받아낸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이상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마치 목각인형과 같은 사람 모양의 허수아비.
구체관절로 이루어진 몸과 이목구비 없이 평평한 안면은 모두 금속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간형 몸체는 익숙하지 않군.”
닐의 기계음처럼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괴하게 생긴 허수아비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 뒤, 자신을 향해 어색한 표정으로 예를 갖췄다.
제국 귀족들의 예법을 어설프게 따라한 것이었다.
“요새도시, 알카트라즈의 통합 관리 AI, 더 원(The One)이라고 하네.”
내용만 들어보면 마치 고명한 귀족들이 쓸 만한 말투였지만, 얀의 귀에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같잖은 연극은 집어치우고, 렌은 어디 있지?”
인류문명의 유산인 이상, 이들은 계승자인 자신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는 얀이 눈앞에 있는 꼭두각시를 향해 질문했지만, 얀의 말을 들은 더 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의 자네는 그녀를 만날 수 없네.”
“뭐라고?”
눈가를 좁힌 얀이 그렇게 되묻자 허수아비는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침대 옆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물론, 여기 있는 나도 마찬가지이지.”
그 말을 들은 얀은 닐과 연결된 왼쪽 눈에 신경을 집중해보았다.
‘역시, 연결이 끊어졌나.’
그나마 나노머신과 검색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며 공간을 스캔하자, 눈앞에 벽의 재질, 문의 잠금장치와 같은 정보들이 나열되었다.
“지하 벙커? 외벽 두께가….”
“2미터 두께의 복합 장갑과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있지. 지구 전체를 뒤집어엎어도 이 곳은 무사할거다.”
더 원의 부연설명이 들려오는 것에는 아랑곳 않고 문을 열려 해 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렌이 날 가둔 건가?”
“그렇지. 모든 일이 끝날 때 까지, 자네를 보호하라 하더군.”
기계로 된 허수아비는 그렇게 말하며 얀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가겠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얀이 말하자 더 원은 잠시 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말이지?”
“막아야지. 이대로 저 녀석이 대륙의 인간들을 다 죽이게 할 수는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얀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외상은 없고, 나노머신 덕분에 체력도 어느 정도 붙었다. 글레이프니르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렌의 기계장치와 다시 연결해서….’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향해 걸어가려는 얀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몸 상태로 말인가?”
“신경…. 꺼.”
쓰러지려는 얀의 몸을 붙잡은 더 원이 그를 막아섰다.
“비켜.”
“비켜주지. 내 질문에 답해준다면 말이지.”
마치 사람인 양 능청스럽게 말하는 더 원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글레이프니르 한 기로는 그 화망을 뚫을 수 없지.”
자신이 가진 문제를 단번에 꼬집는 그의 말에 뭔가 더 말하려던 얀이 입을 다물었다.
“조바심내지 말게. 자네가 입력한 귀환코드를 해제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여유가 있어.”
얀의 권한으로 입력된 권한을 억지로 해제하는 것이니, 그 만큼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믿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네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확실히 모르는 와중에?”
“그걸 알려주기 위해 여기에 오지 않았나.”
그 말과 함께 얀의 앞을 막아낸 허수아비가 손을 들었고.
철컹-!
곧바로 방 안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흰 벽면에 화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네를 만나기 위해 1번의 감시를 뚫고 이 곳까지 도달했네.”
“감시를 뚫고?”
렌이 사주한 녀석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화면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문양이 점멸하며, 허수아비의 음성이 아닌, 진짜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적, 그리고 그녀의 근원을 알리기 위해.]
렌을 가리키는 그 말에 얀의 시선이 화면을 향했다.
[확인하고, 그 뒤에 판단하게.]
“….”
[나 또한 그대에 대해 판단할 테니.]
***
“대장님이 방금…?”
“맞아. 그 날개와 같이 날아갔어.”
수용소에서 급히 후퇴한 뒤 해상기지에 복귀한 대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겨우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뭔지도 모를 날개가 얀을 잡아갔으니.
“고대의 전함 다음에는 천사라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카일이 잔스카르 전투함에 탑재된 관측장비로 본 광경을 전하자 단델은 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뭔가 말한 건 없어?”
카일이 그렇게 되묻자 고개를 끄덕인 단델이 입을 열었다.
“무전으로 지시사항이 들어왔었습니다. 해상기지로 후퇴한 뒤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고.”
“그걸로 끝? 하여튼 단장이라는 놈이….”
알프라이아의 최심부를 뚫었다고 생각했더니, 수도 진입은 라니스와 우루크에게 맡겨버린 뒤 복귀라니.
“돌아오기는 하겠지?”
“돌아오실 겁니다. 이런 일로 잘못될 분은 아니에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의문을 표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눈앞에 닥친 상황이 더욱 중요했다.
해상기지에 마련된 회의장.
제국 각지에서 모인 각 전선 지휘관들이 모여 개최된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정전이라니?! 이미 다 이긴 전쟁을 갑자기 끝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맞는 말이오. 이 전쟁에 투입된 인원, 재화, 자본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알프라이아를 완전히 점령해서 영지를 나누지 않으면, 그 손해를 어찌…!”
중앙전선에서 곧바로 치고 들어온 에드윌의 진격로를 따라 들어온 황도군과 벨커스의 병력들.
정전에 대한 언질을 받지 못한 그들은 갑작스러운 에드윌 백작의 제안과 알프라이아 망명정부의 협정서를 보자 극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식으로 화근을 남기는 것은 황후 폐하께서도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바, 알프라이아라는 국가를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소만.”
벨커스 파벌의 귀족들이 반발하자 황도군 역시 거기에 일조했다.
제국 기사단을 총괄하게 된 벨커스, 후방 침투로 알프라이앙에 지명적인 타격을 입힌 베르쿠트와는 달리, 중앙군인 이들에게는 아직 이렇다 할 큰 성과가 없는 까닭이었다.
“애당초 이것은 종의 생존을 건 전쟁이오. 지금 당장은 정전을 통해 평화가 찾아온다 하나, 저들을 그대로 남겨둔다면….”
걱정 어린 하이람의 한 마디가 들려오자 에드윌은 마음속으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수도 점령이라는 전과를 얻어 향후 주도권을 잡아챌 계획이겠지.’
하이람의 의도를 짧게 평한 에드윌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향후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베르쿠트 백작이 이미 손을 써 두었거든요.”
“뭐…라?”
그렇게 말한 에드윌은 손을 들어 라니스가 작성한 협정서와 조약, 그리고 잔스카르의 공증을 내밀었다.
“읽어보시지요.”
그 말과 함께 초급장교들이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협정문의 사본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읽은 귀족들과 황도군 장교들에게서 비명과도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이, 이건…!”
“망명정부와 베르쿠트 백작이 뒤에서 공조하고 있었다니, 이 말인즉…!”
“알프라이아를 사실상 제국의 속국처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오!”
그 말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좌중에 동요가 퍼져나갔다.
“그, 그렇지만 이는 베르쿠트 백작 개인과의 연결고리가 아닙니까?”
“이제 와서 이 전쟁을 멈춘다는 것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귀족들이 하나 둘 이의를 제기하려는 순간.
“그렇다면 그대들은 언제까지 이 전쟁을 계속 할 생각인가?”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가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크, 클라우스 황자님…?”
식민지에 있어야 할 클라우스 황자가 나타나자 황도군 장교들과 벨커스 파벌 귀족들,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 선 하이람까지도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조용히 중얼거리는 하이람의 말을 무시한 클라우스는 좌중에 모인 귀족들에게 외쳤다.
“식민지의 정국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물자가 소비되었소. 제국 내의 산업기반, 병사들의 전쟁피로도, 징집 가능한 이들의 수 마저도 한계에 달한 상황이오.”
제국이 가진 문제점을 그 자리에서 쏟아붓는 클라우스의 말에 귀족들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 크흠….”
“그러나 그것이….”
뭐라 더 말을 하려는 귀족들이었지만, 지금의 클라우스는 루브라-바일사르의 총지휘권자.
제국의 자원 기반을 모두 통제하고 있는 거대한 고래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 종족전쟁의 원인은 성왕의 극단적인 사상 때문이 아닙니까?”
이종족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인간들을 학살한 성왕의 콜로서스.
그것이 한 세기동안 이어진 종족전쟁의 시발점임을 상기한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는 목숨을 잃고, 새 정부는 정전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다른 전쟁의 불씨가 될 테죠.”
그 속내가 어떻든 간에, 제국의 최우선목표는 전쟁의 빠른 종결이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전쟁광이나 진배없는 일.
‘이미 정국의 주도권은 저들에게 넘어갔군. 이건 그 확인을 위한 절차.’
조용히 눈을 가라앉힌 채 생각하던 하이람은 이윽고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커스는 이 회의에서 빠지겠습니다.”
거의 에드윌과 클라우스에게로 넘어오던 회의의 주도권이 하이람의 한 마디에 의해 반전되었다.
“그 말인즉, 벨커스는 홀로 전투를 계속하시겠단 겁니까?”
에드윌이 그렇게 묻자 하이람은 고개를 저었다.
“귀족원의 다수결이라면, 그에 따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본 가문은 알프라이아가 제국에게 한 악행들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의사표명입니다.”
전쟁은 멈춘다.
그렇지만 당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간 하이람에게로 기사들이 조용히 다가갔다.
“백작님.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기체도….”
그렇게 말하자 하이람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한 줌의 전과와 논공행상으로 얼마든지 싸우라지.”
서슬퍼런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하이람은 기사들에게 한 번씩 시선을 준 뒤 입을 열었다.
“정전협정이 결정되는 순간, 거병할 것이다. 차칠 없도록.”
그 말에 하이람을 둘러싼 기사들 또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쟁도, 적국과의 공조도, 유적발굴도.
모두 이 한 순간을 위한 포석이었을 뿐.
“황좌에서 뵙겠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조심해야 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기사들은 하이람을 호위한 채 본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