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76화 (176/186)

176. 데우스 엑스 마키나.

“무, 무슨 일이야? 발두르가, 그냥 꿰뚫렸다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환각이거나, 아니면 기상현상이 일으킨 신기루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끼기기기긱-!

그렇지만 하늘 위에서 울려대는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눈앞에 저것이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수십 개의 거대한 철창이 발두르의 함체를 찢어발겼다.

얀이 죽을힘을 다해 쏜 미스틸테인에 장전된 철창이었다.

[시스템 이상 감지. 손상 자가회복 불능. 함체 가동률 12%. 전 인원, 퇴함명령을….]

온 몸이 꿰뚫려 죽어가는 와중에도 발두르는 계속해서 자신의 몸 안에 탄 성왕을 향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뭔가 잘못됐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기계장치.

산산이 부서진 발두르.

성왕은 지금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꿈이야. 꿈이라고! 저런 게 있다면, 저것이야말로 내가 가져야 할 물건이잖아! 발두르를 수십 번을 부수고도 남을 병기! 왜 저런 것이 나를…!”

쿵-!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발두르의 거체가 크게 요동쳤다.

제어를 잃은 채 서서히 끌려가는 함체.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것만 같았다.

뿌득! 뿌드드득-!

탑승자를 지키기 위해 수백 겹의 보호필름으로 이루어진 함교 외벽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손톱 같기도, 깃털 같기도 한 것이 일자로 솟아나더니, 그대로 함체 외벽을 양 옆으로 벌렸다.

“으, 으윽?!”

처음으로 성왕의 얼굴에 공포의 감정이 깃들었다.

자신의 권위와 힘의 상징이었던 발두르.

자신 이상의 권한을 지닌, 1번의 코드를 지닌 저 계승자조차도 어쩌지 못한 무적의 전함을 벌레처럼 짓이긴 존재.

쿠콰아앙-!

폭음과 함께 상부 장갑판이 통째로 뜯겨나가며 거대한 날개가 성왕의 앞에 나타났다.

발두르의 전면부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날개.

그렇지만 그 날개를 편친 채 제어하고 있는 것은 델타 콜로서스 세 개 정도 크기의 기계장치였다.

“네가, 그걸 불러온 것이냐…?”

천천히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새하얀 날개.

그 중심 기계장치들을 허리춤에 연결한 채 함선 내부로 들어온 것은 새하얀 소녀.

렌이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함선이 용케 살려놨네?”

그녀의 입이 열리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진한 아이가 낼 것만 같은 밝은 톤의 목소리.

그가 기억하고 있는 무기질적인 그녀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 같았다.

단지 그녀의 어깨 위에 새겨진 01 이라는 숫자만이, 그녀가 1번 생체단말, 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왜, 도대체 왜 내가 아닌 저 자인 것이냐!”

수많은 시간동안 쌓여있던 의문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녀가 움직이는 저 기계장치는 무엇인지, 발두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이 곳을 알았는지.

그런 사소한 문제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삶에 거쳐, 수백 년을 이어온 의문이 흘러나왔다.

“동족상잔은 금기사항이니까. 네가 혼혈종을 죽이기 시작했으니, 넌 실격이었지.”

그 말에 성왕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 족이라고?”

기억에 노이즈가 낀다.

인자하게 웃던 알피와 라이아의 얼굴.

계승자로써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순수한 계승자.

그 설명과 사상에 균열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그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두 개의 코드를 지닌 이 내가 혼혈종과 동족이라니…!”

“아, 몰랐어?”

성왕의 말을 끊은 렌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성왕은 속이 뒤틀리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웃었다고?

1번이?

극악한 위험성 덕분에 감정회로를 모두 절제당한 단말이, 감정을 실어 웃는다고?

“코드 적합성과 신체적 유용성. 그리고 번식행위 시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블린, 오크, 엘프, 인간의 4종 결합 유기체.”

묘한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올수록 성왕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까…. 지금…?”

“맞아.”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렌이 입을 열었다.

유리로 된 가면처럼 투명하고 맑은 웃음이었다.

“너 혼혈이야. 대륙에 있는 피조물들을 전부 섞어서 만든.”

그 말과 함께 성왕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했다.

“아, 아아…! 아아아…!”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뒷걸음 친 성왕은 이윽고.

“아니야아아아아아-!!!”

영혼을 토해내듯이, 허공에 대고 외쳤다.

“우, 우웩?! 컥?! 커억?!”

무너져가는 함선 속에서 미친 듯이 외쳐대던 성왕은 이윽고 미친 듯이 구역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라니…. 역사는 돌고 돈다던데, 설마 여기까지 똑같이 인류 역사를 재현할 줄은 몰랐어.”

내가 뭘 했지?

죽였지. 도축했지. 땅에 파묻었지. 가스에 중독시켰지.

눈앞에 있다고 죽이고, 약을 만들기 위해 독을 주입하고, 사회실험을 위해 어미를 죽이고.

그리고 그 어미를 먹….

“하긴, 식인행위까지 한 국가원수는 네가 처음이네? 축하해. 잡종.”

그 동안 혼혈들을 멸시하며 계속해서 입에 담던 말이 자신을 향했다.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렌은 더 이상 자신이 인정받아야 할 단말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괴물이 되어있었다.

[함선 승무원 긴급 보호조치 시행. 내부 무장창을….]

“입 닥쳐.”

꾸드드득-!

자신의 명령 이외에는 그 어떤 지시도 받지 않던 발두르가 그녀의 한 마디에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그녀의 명령에 따라, 함교의 모든 공간이 붉게 물들고, 그녀가 성왕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망쳐라, 피온. 알피와 라이아의 자손….]

“…뭐?”

노이즈로 가득 덮인 발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동안 들려오던 무기질적인 기계음과는 다른, 감정이 실린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성왕이 눈을 부릅뜬 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바, 방금…. 이름을….”

“아, 저 쪽도 폭주했구나. 하긴, 나도 이렇게 된 마당에 탓할 수도 없지.”

나른한 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왕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성왕이라는 직책이 아닌, 진짜 이름이 들려왔다.

어쩌면 그 동안 창조주의 기계라는 틀 안에 갇혀, 한 번도 내뱉지 못했던 말.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용도에 의해 수천 년을 살아간 가련한 피조물을 향한 마지막 선물이었어야 했다.

[도망쳐…. 어서…!]

그 또한 처음에는 꿈 많은 아이였을 텐데.

총기와 희망, 열의로 가득 찬 성군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수많은 회한이 차가운 기계회로를 스쳐지나갔지만, 그를 향해 말하고 있는 발두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관제 인격 관리자 권한 가동.”

키이이잉-!

렌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기계음이 발두르의 마지막 음성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바, 방금 발두르가! 이름을…!”

“불렀지. 어쩌면 그게 네 진짜 이름이었을 수도 있겠네.”

처음으로 그의 말에 공감한 렌이 성왕의 말을 받았다.

붉게 물든 그녀의 눈은 그를 바라보며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근데 뭐 어쩌라고?”

그 말과 함께 발두르의 함교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관제 인격 메인 데이터, 백업 데이터, 인증 코드 소거 완료. AI 발두르, 리부트.]

“…!”

익숙한 발두르의 기계음이 망연자실한 표정의 성왕을 향해 말했다.

그가 죽었다고.

“널 그렇게 끔찍이 여기던 AI였으니, 그 손에 죽어봐.”

그 말과 함께 렌이 손을 올리자, 원래 렌을 향했어야 할 기계장치들이 솟아나 성왕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최종 지휘권자를 1번 셍처단말로 전환. 내부 숙청 절차 개시.]

[침입자를 제거하라.]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자신에게 도망치라 외친 발두르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죽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정의하던 존재가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옭아매고, 그를 향해 온갖 무기들을 겨누기 시작했다.

“네가 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모자라.”

그렇게 말하는 렌의 웃음이 짙어졌다.

분노의 감정을 표출한 때는 원래 얼굴을 찡그려야 한다고 나와있는데.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른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니, 참 이상한 현상이었다.

나중에 얀에게 물어봐야지.

“그래도 할 일이 많으니까. 널 보호하던 보모 손에 살해당하는 정도로 끝내줄게.”

그 말과 함께 성왕, 아니, 피온의 몸을 붙잡고 있던 기계장치들이 그를 한족 벽면에 묶어 고정했다.

“안돼, 안돼! 이건…!”

마력을 끌어모아도, 아무리 힘을 줘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던 발두르의 힘이 막상 자신을 향하게 되자, 성왕은 끝을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프로그램 설치 완료. 전함 발두르, 자폭 프로세스 개시.]

***

“저게…. 무슨…?

“우리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발두르가 불타고 있었다.

내부로부터 시작된 화마가 이윽고 거대한 공준전함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뒤이어 완전히 불덩이가 된 거체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유낙하하는 쇳덩이의 속도가 느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되려 느려보였다.

“이 쪽으로 옵니다-!”

공포는 모르는 것에서 온다.

반두르를 순식간에 불태운 거대한 날개가 서서히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대원들이 곧바로 무기들을 바로쥐었다.

‘닐. 살아있나?’

당장이라도 돌아버릴 것만 같은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은 얀은 방금 전 기계음을 확인할 겸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곧 이어서 굵은 중저음이 그를 맞이했다.

[긍정. 통신 기능 일부 복구 완료.]

‘기체는?’

[현재 A-72좌표에서 현 좌표를 향해….]

“…닐?”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닐의 목소리에 노이즈가 끼는 것을 느낀 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자, 곧 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조용히 시켰어. 할 얘기가 있어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목소리는 렌의 것이었다.

‘렌.’

마음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하늘 위에서 내려오던 거대한 날개가 그에 답하듯 날개짓을 했다.

‘저 기계에 탄 게 너였어?’

[응. 어때? 닐이나 에다의 기체와는 다르게 이쁘지?]

그 말을 들은 얀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질문이 아니었다.

이전부터 계속해서 보이던 이상증세.

이건 최종 확인에 불과했다.

구우웅-

그렇게 말하자 잠시 움직임을 멈춘 렌이 얀을 향해 물었다.

[말투가 조금, 어색한가?]

이제 얀의 표정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꼭 사람처럼 말하게 된 것 같은데.”

[맞아. 앞으로 유일하게 대화할 존재가 예전처럼 인형 같은 목소리면 따분할 것 같아서.]

“따분하다니, 갑자기 무슨 말도 안되는….”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걸던 장난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얀은 이윽고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를 곱씹은 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앞으로, 유일하게 대화할 존재가…. 너 뿐이라고?”

대답이 들려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응.]

뒤이어서 활짝 펼쳐진 렌의 날개가, 하늘에 뜬 태양을 완전히 가려, 그림자로 얀을 뒤덮었다.

[이제 쉬어도 돼. 네 몸을 좀먹는 기계들도, 네 마음을 좀먹는 원한도. 다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얀이 눈을 부릅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다짜고짜 나타나서 이게 무슨…!”

“걱정 마. 믿어.”

머릿속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닌, 귓가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곧 이어 얀의 시야가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고, 그와 함께 다급한 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렌! 크윽?!”

“단장님 뭐 하시는 겁니까! 피하세요!”

“직선 코스입니다! 계속 가까워지고 있다구요!”

정신을 차렸을 때, 렌과 그녀가 탄 기계장치는 이미 얀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네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

붉게 물든 그녀의 눈은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모습.

그렇지만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마음을 다잡은 얀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난 원해.”

그 말과 함께 점점 몽롱한 의식이 뚜렷해져 왔다.

“내 목숨이 다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파멸을 원해.”

마지막으로 의지를 다진 얀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쿠콰앙-!

쇳덩이가 부딪히는 굉음이 몽롱한 얀의 정신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글레이프니르!”

렌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케르단 전선에서 수많은 전선을 넘어 알프라이아까지.

그의 생명을 먹고 자란 검은 거인이 얀에게로 다가오는 렌을 쳐올린 뒤, 그에게로 다가왔다.

“결국 그를 죽일 셈이야?”

웃음기를 지운 렌의 눈이 그녀의 앞을 막아선 검은 거인을 응시했다.

[내 존재 의의에 따라, 그저 인도할 뿐.]

노이즈에 섞여 들리지 않던 닐의 중저음이 들려오는 것과 함께 몸을 돌려 조종석 해치를 연 글레이프니르가 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일럿 보호조치에 의거, 긴급 운송 완료. 글레이프니르, 탑승 대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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