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75화 (175/186)

175.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발두르의 등장에 수용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 발두르!”

“끝이야! 이젠 모든 게 다…!”

“겨우 얻은 자유인데!”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한 순간에 절망으로 뒤바뀌는 순간.

그들을 감독하던 콜로서스나 엘프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힘이 그들 앞에 나타나자, 전의를 잃어버린 죄수들은 고개를 떨군 채 몸을 떨뿐이었다.

“상공에 발두르 출현!”

“기사단! 전원 탑승! 어떻게든 저 녀석을 떨어트린다!”

“단장님 엄호해! 전투준비!”

유일하게 전의를 잃지 않은 것은 87중대 대원들이었다.

- 이번에야 말로 지킨다!

“우리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단장님을 뺏기면 말도 안되지!”

카발리에 몸을 실은 기사들과 전투장비를 갖춘 대원들이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며 상공에 떠 있는 발두르를 겨눴다.

- 적 방어 수준을 확인하고, 화력을 이 쪽으로 유도합니다. 전탄 발사!

끝끝내 콜로서스에서 내리지 않던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40량의 카발리의 돌격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쿠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위를 향해 솟구친 수십 발의 포탄이 발두르의 몸체에 적중하며 자욱한 연기를 뿜어냈다.

- 착탄 확인!

- 전 기체 산개. 포메이션 에코!

짧은 지시와 함께 마치 군무를 추듯 움직인 카발리들이 시시각각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순차적으로 포격을 실시했다.

- 쥐새끼들이!

그러나 이어지는 일갈과 함께 발두르의 하부 갑판에서 수십 줄기의 빛줄기가 쏟아져나갔다.

- 하전입자포!

- 회피!

쿠콰쾅-!

방금까지 카발리들이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그들이 디디고 있던 땅을 통째로 녹여버렸다.

- 단장님 기체보다 더 무시무시하군!

- 두 기 손상, 한 기 격추. 창조주의 유물 치고 그리 높은 명중률은 아니다.

동료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분석을 마친 기사들에게 얀의 지시사항이 수신되었다.

삐-!

- 수신! 전군 이동! 나머지 보병대는 알프라이아의 전쟁범죄 증거물 및 증인을 확보한 뒤 철수한다!

기사 중 한 명이 그렇게 외치자 고개를 끄덕인 대원들이 곧바로 수용소 곳곳으로 들이닥쳐 이곳의 영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쓸데없는 짓을! 고작 피조물의 법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생각 안해.”

성왕의 일갈에 차갑게 답한 얀은 이윽고 눈을 부릅뜬 채 성왕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네 신민들이 널 막을 테니까.”

성왕은 알프라이아의 국부요, 국가 지도자이자 성왕교단의 교주.

순혈들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인 그였지만, 얀이 쥔 정보는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

혼혈 학살? 일정 부분은 순형파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다.

제국군을 이용한 인체실험? 미천한 인간들을 이용하는 것에 무슨 죄책감을 느끼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성왕은 확신에 찬 얀의 눈빛. 그리고 그와 대화하기 전, 정보통을 통해 알아본 얀의 인생사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누가 실험을 사주했는지 알아냈군!

이상할 정도로 벨커스에게 적대적인 얀의 행보. 형벌부대 출신, 신원 미상.

그와 거래하던 하이람이 제물을 확보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수단이었다.

“네 말로 더 확실해진 거다. 식인종 새끼.”

성왕의 일갈을 비웃은 얀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왕국의 국부가 뒤에서는 벨커스와 내통하고 있었다. 널 끌어내리기에는 딱 알맞은 혐의 아닌가?”

“제국군인 네놈이 하는 말 따위, 내 신민들이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으냐!”

“제국군이 아니라 계승자가 한 말이라면 믿겠지.”

“큭…!”

한 마디를 지지 않는 얀의 말에 순간 대꾸하지 못한 성왕은 분에 못이긴 듯 얀이 있는 곳으로 포구를 돌렸다.

“머리칼 한 올 남기지 않고 태워주마. 반쪽짜리 계승자!”

그렇게 말하자 얀은 주먹을 쥔 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아이린을 향해 외쳤다.

“이 정도 시간벌이 해 줬으면 됐지?!”

그렇게 말하자 콜로서스 두 량이 들어야 할 거포를 등에 장비한 아이린의 콜로서스가 두 눈에 발두르의 거체를 담았다.

- 충분해요.

그 말과 함께 방금 전의 일제사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쿠콰아앙-!

굉음과 함께 하늘로 솟구친 포탄은 발두르의 하부 갑판을 지키는 보호막에 튕겨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너희들의 기술로는 이 함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안에 든 네놈은 건드릴 수 있겠지.”

성왕의 호언장담을 깨부순 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진동이 성왕이 탄 발두르의 함교를 뒤흔들었다.

“끄으으윽?!”

콜로서스 제압용으로 쓰던 충격탄을 열 배 크기로 늘인 아이린의 포탄.

귀를 멀게 할 정도의 고음과 굉음이 발두르를 뒤흔들며 성왕의 얼굴을 찌푸러트렸다.

- 경고. 이 이상의 전투행위는 본 함 및 사용자의 안전에 악영향을….

“계승자.”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발두르의 통제인격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계승자라고 부르란 말이야 이 병신 같은 나룻배 새끼야아아-!”

쿠르르르르-!

성왕의 마력을 감지한 것인지, 주변 부속들이 부르르 떨며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내가 계승자란 말이다!”

다시 한 번 다짐하듯 그렇게 말하는 성왕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노가 아닌 절박함이었다.

“오직 나만이 알프와 라이아의,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의지를 받은 진정한 계승자란 말이다!”

***

“아이야. 넌 이 사람들을 이끌게 될 거란다.”

자상한 목소리.

애정 어린 음성이 들려오자 눈을 뜬 어린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사람? 아니지.

그들에 어깨에 박힌 65, 41이란 숫자와 코드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하게 할 수 있었다.

인류연방 소속 65번 생체단말, 알피. 41번 단말, 라이아.

“두 개의 코드를 한 번에 계승받은 개체가 나온다면,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계승자로써의 권한을 가질 수 있어.”

“이걸로, 그 동안 협조하지 않던 다른 단말들도, 지하에 잠들어있던 발두르도 사용할 수 있어.”

“피조물들이 드디어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야!”

환희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두 생체단말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새하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부탁이야. 우리를 도와줘. 1번.”

간절한 두 단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들은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그들이 생각한 대로, 머리를 위로 올려 묶은 여행자 차림을 한 렌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임무는 관찰하는 것. 그리고 계승자를 보호하는 것.”

“….”

“난 이들의 역사에 관여하지도, 돕지도 않아.”

그렇게 말하자 라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이 아이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권한을 지닌 계승자야.”

알피의 반론에 렌이 눈을 내리깔았다.

“특수 유전형질을 지닌 근친교배종에게 권한코드를 부여한 개체. 계승자 이전에 인간으로도 정의되지 않음.”

“…!”

신랄한 렌의 한 마디에 눈을 부릅뜬 라이아를 향해 렌이 쐐기를 박듯이 되물었다.

“41번. 유전자 조작 기술을 보유한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렇게 말하자 잠시 말이 없던 두 단말은 고개를 들어 렌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사실은 관계없어. 중요한 건 이 아이가 맡게 될 역할이지.”

“코드를 넘겨. 우리가 만든 아이가 인류의 영광을 재현할거야.”

그 말을 들은 렌이 고개를 젓는 것과 동시에, 두 단말이 렌을 향해 달려들었다.

***

“…왜냐?”

흔들리는 발두르의 함교 안.

불안한 듯 진동하는 함교에 홀로 선 성왕은 스크린의 비친 얀의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염원대로, 난 왕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무슨 짓이든 했다!”

그 결과,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역할에 따라, 알피와 라이아의 자손인 세 종족을 이끌려 했던 성왕이었지만, 그가 아무리 명령해도, 그들은 언제나 통제를 벗어났다.

“두 분이 꿈꾸던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 분들이 인정한 종을 인류의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왔는지!”

혼혈을 금지시키고, 종족 간 계급을 통해 생활권을 철저히 분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겨났다.

생명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유 의지가 그들을 교류하게 했고, 알프라이아는 두 단말이 규정한 세 종족이 아닌 온갖 혼혈종으로 넘치는 나라가 되었다.

“위정자 치고 핑계 없는 인간은 본 적이 없지.”

그렇게 이죽거리는 얀의 대답을 듣자 발끈한 성왕이 곧바로 입자포를 쏘아댔다.

- 방어!

키이이이이-!

마력을 두른 방패를 든 카발리 두 대가 얀의 앞을 막아선 뒤 방패를 비스듬히 틀어 입자포를 가까스로 도탄 시켰다.

- 포격 개시!

쿠콰콰콰쾅-!

다시 한 번 연기와 함께 흔들리는 함교.

그 광경을 보며 성왕은 다시 한 번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왜, 네 곁에는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모이는 것이냐.”

꽉 쥔 주먹이 떨리며 열등감에 가득 찬 성왕의 내면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왜 진정한 계승자인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반쪽짜리 계승자인 네놈이…!”

그렇게 말한 성왕은 이내 미친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나라를 정화했다! 내가 이 나라를 이끌었다! 내가 이 나라를…!”

“너 같은 혈통주의자 밖에는 인정하지 않는 지옥으로 만들었지.”

그 말에 입을 다문 성왕은 입가를 비틀며 억지로 웃음 지었다.

“됐어. 어차피 네 놈을 죽여 버리면 모두 해결 될 일이지.”

그렇게 말한 그는 함교 앞으로 걸어가 눈앞에 있는 발두르를 향해 말했다.

“전 포문 개방. 이 곳에 있는 생물체들은 개미 새끼 하나 남기지 말고 전부 밀어버려!”

- 제한 수량 이상의 포격임무 수행 시 본 함이 과부하할 가능성이….

“하라고-!”

그렇게 외치는 성왕의 얼굴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우우웅-!

주인의 명을 받은 발두르의 포문이 일제히 흰색 입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 이런 미친!

- 지금까진 우릴 가지고 놀았다 이 말인가?!

함체 전체가 밝게 빛나는 발두르의 모습을 바라본 기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거면 되었다. 이제 내가 유일한 계승자다. 나야말로…!”

희열에 가득한 얼굴로 성왕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콰득-!

파열음.

철판을 찢는 소리, 장갑판이 갈라지는 소리, 그리고 전기 회로가 절단되는 소리들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얀이 이전에 쏘았던 미스틸테인이란 병기는 더 없었다.

그렇다면 발두르 내부에서는 날 리가 없는 소리일 텐데,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성왕이 뒤를 돌아봤을 때, 전장에 있던 다른 이들 또한 발두르의 상태를 보았다.

“저게…. 뭐야.”

그들의 눈앞에 보인 것은, 수십 개의 창에 꿰뚫린 채 무너지고 있는 발두르의 모습.

[칙…. 치직….]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왼쪽 눈에 지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돌아오는 것을 느낀 얀이 황급히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발두르를 꿰뚫은 창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날…. 개?”

발두르의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새하얀 기계장치.

수많은 기계들을 깃털처럼 두른 채 내려오는 거대한 날개였다.

[파일럿 전방에 연방 소속의 기체 확인.]

그리고 곧 이어서, 익숙한 중저음이 얀의 머릿속을 향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연방소속 전략무기 통합관제 시스템, 요르문간드(Jormungand)확인. 파일럿 긴급보호조치 실행.]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