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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부터 4번 버니어 점검. 전체 작동 불가.]
[관절부 간섭 확인. 기동 제한.]
“이건 뭐, 고철덩어리가 따로 없군.”
시체구덩이 속 은회색 기체, 타이탄의 조종석 안.
신경망을 연결하는 것과 동시에 쏟아지는 무수한 경고창에 얀이 얼굴을 찌푸렸다.
“감각은 글레이프니르와 비슷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두 배는 더 무겁지만.”
[관절부 마모로 인한 장애입니다. 본 기체의 본 스펙은 제시해드린 카테고리와 같으며….]
짧은 불평에 변명하듯 기계음이 울려 퍼졌지만 얀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쿠르르르….
천천히 시체구덩이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기체의 시야에는 죄수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4호 콜로서스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와아아아앙-!
“기관포다! 다들 엄폐해!”
“마력포 1진은 붕괴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조금만 더 버텨!”
초소에서 난사하는 기관총과 콜로서스의 기관포 세례에 수많은 죄수들의 몸이 육편이 되어 사라진 상황.
이미 수 천 명이 죽어나간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죄수들 중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알아?!”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다 죽을 운명이야! 차라리 네놈들 중 하나라도 붙잡고…!”
“이 씨발, 떨어져! 떨어지라고!”
공포에 이성이 마비된 것인지, 아니면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생쥐들의 발악인지.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죄수들의 물량에 되려 병사들이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코, 콜로서스! 기사단은 어디 있나! 당장 이 반쪽짜리들을 다 죽여버려!”
- 탄환이 바닥났다! 애초에 이 속은 수용시설이라 콜로서스 보급이…!
“그럼 망치로 짓뭉개버리란 말이야!”
갑작스러운 반란과 피비린내가 가득한 아비규환은 경험 없는 수용소 지휘관의 이성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기사의 욕설과 함께 4호 콜로서스가 빈 공이를 때리는 기관포를 집어던지자, 죄수들이 모여있던 곳에 먼지구름이 생기며 굉음이 일었다.
쿠콰앙-!
- 전 기사단, 발검! 이 저주받은 반쪽짜리들을 전부 참살하라! 성왕 폐하를 위해…!
- 저주?
단장으로 보이는 자의 일갈이 끝나기도 전에, 확성기를 통해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성왕 던져주는 사료나 받아 쳐 먹는 개돼지들이, 무슨 권리로 저주를 들먹여?
상륙지 구석 구덩이에 쌓여있던 시체.
마을 곳곳에 매달려있던 시체.
그리고 이 형무소 구덩이에 가득 들어찬 시체들 까지.
너무나도 익숙한, 그렇기에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지옥 같은 광경을 떠올리며 얀이 이를 악물었다.
- 마, 말도 안돼?!
- 얀 베르쿠트! 콜로서스에…!
얀의 목소리를 알아챈 기사들이 비명과 같은 목소리로 얀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순식간에 모든 콜로서스의 주의가 얀 한 사람에게 집중된 상황.
죄수들을 이끄는 우루크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계승자가 콜로서스를 막을 것이다! 초소를 점거해라! 조금만 거 버티면 살 수 있다!”
“으아아아아-!”
확성기를 통해 얀의 이름을 부른 기사의 단말마.
그리고 계승자라는 우루크의 한 마디가 주춤해있던 죄수들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 이런 제길!
- 이, 이 자를 어서 처리해라! 고문으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야! 그 괴물같은 악마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외치며 휘하의 기사들을 닦달하는 지휘관이었지만, 그 역시도 발이 떨어지지 않을진대, 이제 막 콜로서스에 오른 기사들이 용기를 낼 리 만무했다.
투화악!
거친 발돋움소리와 함께 튀어나간 얀의 타이탄이 곧바로 눈앞에 있는 지휘관에게 쇄도했다.
- 아, 아악?!
쿠콰아아앙-!
글레이프니르가 지녔던 단분자 커터도, 입자포도 가지지 않은 순정 상태의 기체.
관절부와 장갑판마저 거의 떨어져가는 너덜너덜한 기체였지만, 포로 경비용으로 장갑을 탈거한 4호의 몸을 짓이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뿌드드득-!
조종석을 보호하던 장갑판이 통째로 우그러지며 내무에 들어 있던 조종사의 몸을 양 옆으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 사, 살려줘! 나, 난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 저 구덩이 속 시체들한테 똑같이 말해보던가.
낮은 목소리와 함께 타이탄의 낡은 동력로가 회전하고, 이윽고 4호 콜로서스의 조종석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퍽-!
내부에서 부드러운 살덩이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가라진 장갑판 사이에서 피와 뼛조각이 새어나왔다.
- 히, 히익?!
- 지휘관이, 헤드 나이트가 한 순간에…!
열 기의 콜로서스를 지휘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칭호, 헤드나이트.
전장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은 지금에 와서는 휘하에 네 대의 콜로서스만 거느리고 있어도 쉽사리 주어지는 칭호가 되었다.
- 전장에서 본 다른 콜로서스에 비하면 쓰레기나 다름없군.
고블린들에게 대원들을 먹이로 주던 델란엘을 떠올린 얀은 ‘아니, 그것도 아닌가?’ 라고 되뇌며 피식 웃음 지었다.
키리리릭-!
헤드 나이트가 들고 있던 대검을 손에 쥔 타이탄의 시선이 다른 콜로서스들을 향했다.
- 으, 으윽?!
- 못 이겨…. 델란엘도 이기지 못한 괴물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막으란 거야!
고문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기체 또한 급구한 것이라 원래의 힘이 나지 않을 것이다?
미친 소리!
눈앞에서 저 자를 마주하지 못했기에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다!
콰앙-!
눈앞에서 콜로서스를 짓뭉개버린 타이탄의 모습에 겁에 질린 기사들은 등 뒤에서 들려온 폭발음에 더 이상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폭발음이 들려온 곳은 기관총이 위치한 보병 초소였다.
“무기고가, 무기고가 뚫렸다!”
“마력 통신소도 점거 당했다! 후퇴! 후퇴! 더 이상 승산이 없다!”
“어디로 후퇴하란 말이야?! 여긴 격리 시설이라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아악?!”
죄수들의 탈옥을 방지하기 위해 외진 곳에 설치했다는 것이 되려 독이 된 셈이었다.
뒤늦게 소식이 알려진다 해도 증원이 도착하기까지는 약 3일.
그마저도 긴박한 전장 상황에 증원이 올지 조차 미지수인 상황이었다.
- 뭐 해? 안들어오고.
대검을 움켜쥔 타이탄의 확성기에서 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흠칫한 어린 기사들이 몸을 떨었다.
지원할 보병도, 본국의 증원도, 심지어 자신들을 지휘해야 할 헤드 나이트조차 사라진 상황.
- 하, 항복을….
뒤늦게나마 그렇게 말을 뗀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 항복?
그 말에 움찔한 기사들을 향해 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 너희들에게 항복한 혼혈들이 지금 어디에 파묻혀있더라?
***
“그게 정말입니까? 단장님이 수용소에?!”
에드윌의 본대와 합류한 카일의 해상기지.
서신을 든 라니스의 말에 깜짝 놀란 단델이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소식통에게서 들어온 정보에요. 현지 인원과 접촉하는 데도 성공했고, 생명에도 지장은 없다는군요,”
그렇게 말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단델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카일은 헛웃음을 지었다.
“포로 신분으로 소식통이니 뭐니, 아주 종횡무진이구만.”
“베르쿠트 백작이 허가한 일이에요. 덕분에 이 정보도 들어왔고요.”
“정보? 얀의 소재 말고 다른 소식이 있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라니스가 건넨 서신을 읽은 카일은 눈을 부릅떴다.
“성왕 직속 기사단이 제국 측 전쟁포로 10만 명을 무차별 학살?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그렇게 외치는 카일의 손에는 얀이 갇혀있는 수용소의 구조도와 각 건물의 용도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인체실험동, 가스실, 마력순환로, 포로 격리구역, 실험대상 폐기구역…. 더 나열하자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포로 학살은 그렇다 쳐. 어느 미친놈이 당장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인데 이런 시설을…!”
“자국민 수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은 왕이에요. 적국 포로라면 이미….”
그 말에 한숨을 내쉰 카일이 들고 있는 서신에는 ‘알프라이아 망명정부’라는 이름과 직인이 적혀있었다.
“이거 참,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그 곳에는 에드윌 백작이 어깨 너머로 카일이 든 서신을 읽고 있었다.
“어우, 깜짝이야!”
“하하하, 늙은이 장난이 좀 심했나?”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에드윌의 능글맞은 웃음에 눈살을 찌푸린 카일이 황급히 서신을 감췄다.
‘이미 다 봤는데 숨겨서 뭐 하려고….’
얀의 자리에 앉은 채 그렇게 생각하는 단델이었지만, 괜한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게 지금 재미있는 일로 보입니까?”
“재밌지. 덕분에 라니스 왕녀의 제안에 현실성이 생겼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어 보인 에드윌 백작은 단델의 눈앞에 놓인 또 다른 서신을 집어 들었다.
“쿠데타로 성왕을 제거한 뒤 망명정부의 이름으로 제국에게 정전협정을 제안한다라….”
그렇게 말하자 라니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알프라이아 3왕녀가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 정보 덕분에, 당신의 계획은 알프라이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었지.”
웃음기 섞인 에드윌의 말에 라니스가 표정을 굳혔다.
“제국의 승리는 자명한 상황에, 이 정보가 제국에 알려진다면 알프라이아인들은 성왕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공범이 됩니다.”
“….”
전쟁의 판도를 읽는 에드윌의 안목은 정확했다.
얀이 쏜 미스틸테인에 의해 발두르는 당분간 움직일 수 없다.
주 전선의 진격을 막고 있는 유일한 억제제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벨커스와 황도군의 주 병력은 파죽지세로 알프라이아를 휩쓸 것이다.
“발두르가 무너졌단 소식을 아는 건 우리들 뿐이에요. 아직 어느 정도 시간이….”
“벨커스, 그리고 황도군의 정보력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
제국 귀족들의 정보력. 그 중에서도 제국 기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벨커스 가문의 정보력을 알고 있는 에드윌은 표정을 굳히며 경고했다.
“이미 정보원이 출발했을 겁니다. 늦어도 일주일 후에는 소식이 퍼지고, 진격이 시작되겠죠.”
“그렇게 되면…!”
“벨커스를 위시한 주전론자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고. 그들의 이익관계에 의해 알프라이아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륙의 모든 이종족들은 가축으로 돌아갈 겁니다.”
로렌츠라는 누름돌이 없어진 벨커스에게 전쟁영웅의 칭호가 돌아가게 된다면, 벨커스의 이름은 성역이 된다.
얀이 카일에게 넘긴 인체실험의 증거도, 알프라이아와의 이적행위조차도 그 위명에 가려져 효력을 잃게 될 테니.
그렇기에 얀은 라니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알프라이아를 남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라니스 왕녀께서도, 그리고 베르쿠트 백작도 그런 결과를 바라지는 않으시겠죠?”
순식간에 웃는 낮으로 돌아온 에드윌이 그렇게 말하자 라니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어찌하겠나? 중대장.”
상황을 정리한 에드윌이 그렇게 말하며 단델을 돌아보았다.
“라니스 왕녀를 부대에 넣은 건 단장님의 판단이니, 저흰 그 결정에 따를 겁니다.”
“말인즉, 망명정부의 쿠데타를 지원하겠다?”
“그게 단장님의 뜻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에드윌의 웃음이 짙어졌다.
“벨커스와는 완전히 척을 졌군 그래?”
“원래부터 서로 죽고 죽이던 사이입니다. 하이람의 떨거지들과는 더 나빠질 껀덕지도 없어요.”
어깨를 으쓱인 단델이 그렇게 말하자 에드윌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천하의 벨커스를 저렇게 부를 수 있는 젊은이라니.
“망명정부 주체로 성왕의 정권을 타도하고, 국가 대 국가로 정전협정을 체결한다면 알프라이아라는 국가의 틀은 남길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에드윌의 말을 라니스가 받았다.
“패전국의 멍에는 뒤집어쓰겠지만, 적어도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써 보호받을 수는 있겠죠.”
말을 마친 라니스는 단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무소까지 이어지는 최단경로, 그 주변 지형과 주둔군 규모까지. 전부 알아왔습니다. 이제 그 쪽 차례에요.”
“…일겠습니다. 저희 쪽도 준비가 끝났으니까요.”
그 말을 듣자 자리에서 일어난 단델이 회의실에 모인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작전권자인 얀 베르쿠트 백작의 대리인으로써 지시하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저희 부대는 단장 구출 및 알프라이아의 전쟁범죄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최단경로로 진격합니다.”
얀의 문양이 새겨진 인장을 목에 낀 단델이 그렇게 말하자 에드윌과 카일이 얕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카일 백작께서는 연안 지역에서 포격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간만에 바다로 나가겠군.”
주먹으로 손바닥을 친 카일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희 부대는 콜로서스를 통한 기동전으로 적진을 종심 돌파하겠습니다. 에드윌 백작께서는….”
“진격로를 따라 병력을 배치한 뒤 보급선을 유지해야겠지. 맡겨두게.”
그렇게 말하는 에드윌 백작의 등 뒤 창문 너머에서는 수많은 병사들과 콜로서스들이 무기와 탄약을 적재하고 있었다.
“그러면, 남은 불안요소는 단 하나군요.”
작전준비에 들어가 분주해진 해상기지를 바라보던 세 명에게 다가온 라니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정보가 있었나요?”
“줄줄히 비엔나로군. 이번엔 뭔데?”
단델과 카일이 그렇게 묻자 고개를 끄덕인 라니스가 답했다.
“알프라이아 북동부에 나타난…. 이것.”
불안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꺼낸 것은 잔스카르의 첩보원이 찍어 온 사진.
그 곳에 찍혀 있는 것은….
“거대한…. 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