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70화 (170/186)

170.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동족상잔.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동족 포식.

한 세기동안 지속된 전쟁의 최전선에서, 이와 비슷한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났다.

설원에서 반 년 동안 포위된 병사들은 식량을 구하지 못해 얼어붙은 동료의 시신을 잘라 입에 넣었고.

보급이 끊긴 불모지에 갇힌 두 국가의 병사들에게 있어, 적의 시체는 더할 나위 없는 전리품이었다고 회고한 이도 있었다.

얀이 몸담았던 전선 또한 이런 극한 상황의 예외는 아니었다.

더러운 진창에서 하루하루를 살며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집어넣는 것이 케르단 전선의 군인들이었고, 형벌부대는 그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한 이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소모품들이었으니까.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그 행위들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얀은 단지 자신에게 그 경험이 없다는 것을 큰 행운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고, 상식이 있다.

요리라니!

생존을 위한 벼랑 끝 선택지가 아닌, 오락을 위한 식인 행위라니!

케르단 전선의 참호 속 생활을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지난 날의 트라우마를 떠올린 것인지.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다 삭히지 못한 얀은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눈으로 성왕을 쏘아보았다.

“드디어 좀 사람다운 감정을 보여주는군. 예상과는 조금 다르지만, 꽤 괜찮은 수확이야.”

“수확? 이 장면을 억지로 연출했다는 말인가? 나 때문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고깃조각들을 본 엘프들 몇몇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혼절하는 이들도 간혹 보이는 것을 보니,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자네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태어나, 그들의 일원으로써 살아왔겠지.”

“…뭐?”

아무 맥락 없이 이어지는 성왕의 말에 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이것 보게. 계승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네는 이들을 자네와 동격인 듯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자신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 성왕은 얀을 향해 열변을 이어갔다.

“자네는 1번의 코드를 받은 계승자일세! 그 누구도 아닌 1번!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있는 것인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자신의 눈앞에 이런 좆같은 광경을 들이민 순간부터 얀은 성왕을 죽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다른 모든 단말들이 지닌 것들을 모아도, 그녀가 지닌 것의 반도 따라갈 수 없어!”

렌이 지닌 것?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몰랐다.

“자네는 인류 문명 재건작업의 최중심축에 있는 인물일세! 헌데 이깟 피조물들에게 동화되어 어줍잖은 동정이나 하는 꼴이라니!”

이젠 아예 울부짖는 듯한 성왕의 목소리에 꽉 쥐어진 얀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1번의 계승자라면 그에 걸맞은 의식을 갖추게! 계승자로써 인류의 영광을…!”

“계승자, 계승자, 그 놈의 씨발 계승자-!”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큰 소리가 나온 적이 있었을까.

본인조차도 놀랄 정도로 크게 울부짖은 얀은 귀기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성왕을 바라보았다.

“그 같잖은 깡통들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창조주가 되려 했으나, 도구로써 이용당한 남자가 있었다.

그 뒤틀린 과업을 위해 무가치하게 죽어간 아이가 있었다.

피 묻은 그 아이의 붕대는 아직까지도 케르단 언덕 유적에 매여진 채였다.

“그 위험한 기술이 여기 남아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

이상적인 교황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라피스와 같은 수많은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기술을 손에 넣은 바일사르 황제는 그의 영생과 권력을 위해 전쟁을 이어갔다.

케인.

자신의 첫 번째 친구였던 그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그 굴레를 끊어냈다.

그리고 얀은 그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네가 말하는 그 잘난 영광이, 어떤 괴물을 만들어 냈는지 아냐고!”

야망을 지닌 생체단말은 계승자의 몸을 찾기 위해 하이람을 키웠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벨커스는 얀의 인생을, 그와 비슷한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그 찌꺼기 때문에 벨커스가, 하이람 그 개새끼가 야니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벨커스의 기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천 명의 생명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발가벗겨진 채 지하에 버려진 수천 구의 시체.

그 시체의 언덕 꼭대기에 그녀가 있었다.

온 몸의 피를 모두 뽑힌 채, 파랗게 죽은 얼굴로.

그런 그녀의 몸을 안아든 그는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그 손을 얼굴에 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울부짖을 뿐이었다.

“하아~ 이거야 원.”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은 성왕을 보며 얀은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틀렸어. 지나칠 정도로 피조물들과 동화되어버렸군. 하긴, 인생사를 생각하면 그리 무리도 아니겠지만….”

신문을 통해 전해진 얀의 배경을 떠올린 성왕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만 곧이어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짙은 비웃음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근데 뭐 어쩌란 말인가?”

“…!”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은 성왕은 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술을 통제할 자가 없는 이상, 이 대륙에 퍼져있는 인류의 유산은 마치 주인을 잃은 칼자루와 같지. 쓰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서 선한 영향을 끼칠 수도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것이야.”

땅바닥에 널브러진 엘프의 고기조각을 짓밟으며 성왕이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내가 묻지! 인류의 유산이 그들에게 서로 죽이라 말하던가?! 인류의 기술이 그들에게 야망에 미쳐 스스로를 몰락시키라 명령하던가?! 아니지!”

이윽고 잠시 숨을 고른 성왕은 자신의 양 옆에 있는 엘프들을 둘러보며 같잖다는 듯이 양 팔을 벌리며 입을 열었다.

“인류의 유산은 결국 수단일 뿐, 결국 이 지옥을 만들어낸 것은 저들 자신이 아닌가!”

웅변하듯 그렇게 말한 성왕이 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계승자가 필요하다! 나와 같은, 정당한 권한을 물려받은 진짜 계승자가!”

자신의 말에 도취된 듯이 웃음지은 성왕을 바라보던 얀은 눈을 질끈 감으며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인가? 아니면 기특하게도 내 말뜻을 이해해 준 것인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얀을 향해 다가오는 성왕은 득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해?”

그렇게 되묻자 성왕은 어깨를 으쓱이며 얀의 말을 받았다.

“피조물들 중 하나인 그대와는 달리, 난 알피와 라이아가 만들고, 키워낸 존재이지.”

“….”

“언젠가, 진정한 인류의 후계자로써 인류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난 그 고귀한 사명을 지고 이 땅에 태어난 걸세. 얀 베르쿠트.”

계속해서 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얀을 보자 성왕은 선심 쓰듯 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재차 말했다.

“약조하지. 나와 함께한다면, 그대는 내 친구이자 나와 같은 계승자로써 수많은 영예를 얻을 수 있을 걸세.”

그렇게 말하는 성왕을 바라본 얀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라면 내 도움 없이도 혼자 할 수 있었을 텐데 계획과는 다르게 왕국이 위태로우니 초조했나보지?”

지금의 전황을 정확히 꼬집은 얀의 한마디에 성왕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은 잠시 정체되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네. 클로닝 기술도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발두르의 복구가 종료된다면….”

“글쎄.”

중간에 말을 끊은 얀은 자신의 어깨를 짚으려던 성왕의 손을 쳐냈다.

아무런 보험 없이 이런 정보를 줄줄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고문. 아니면 마법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협력을 받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황제처럼, 인격을 바꾸는 장치를 가졌을 지도.’

바일사르 황제와 동시대에 나타난 그라면 그럴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이성은 잠시 숨죽인 뒤 기회를 노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얀은 더 이상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근데, 내 생각은 조금 달라서 말이야.”

처음으로 얀의 목소리에 여유가 생기자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성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르다니?”

그렇게 되묻자 얀은 차갑게 웃는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1번은 알프라이아에서 70년 이상을 살았다고 했지.”

언젠가 렌이 했던 말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말하자 성왕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정말이었나보군.’

렌이 이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것 같았다.

렌 자신이 붙잡힌다면, 꼼짝없이 그에게 코드를 넘겨야 했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녀석의 코드는 네가 아닌 내게로 왔다.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아?”

그렇게 말하자 성왕의 얼굴에 간 균열이 점점 더 진해졌다.

“생체단말이라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것은 아닐세. 뭔가 착오가….”

“알려줘? 그 이유.”

성왕의 말을 끊은 얀은 그대로 얼굴을 그의 코앞에 댄 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하게 이유를 말했다.

“그 녀석의 기준으로 봤을 때, 넌 탈락이란 소리야.”

“……!”

쐐기를 박듯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병신 같은 식인종 새끼.”

그 말과 함께 잠시 장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하, 하하! 하하하!”

웃음소리가 퍼져나가자 양 옆에 도열한 엘프들이 긴장한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꼴에 같은 계승자랍시고 편의를 봐줬더니, 반쪽짜리 버러지가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스산한 분위기와 함께 목소리를 낮춘 성왕이 그대로 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투콰앙-!

섬광과 함께 일어난 폭발에 얀의 몸이 뒤로 날아가 식당 바닥을 뒹굴었다.

“이제 더 이상 자비를 기대하지 마라.”

뒤이어 얀의 눈앞에 멈춘 성왕은 근엄한 말투로 얀을 향해 명령했다.

“정당한 인류의 계승자로서 명하니, 1번의 코드를 넘겨라.”

그 말과 함께 성왕이 손짓하자, 양 옆에 도열한 무장한 이들이 일제히 소총을 꺼내들어 얀을 겨눴다.

“피조물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 그대는, 1번의 코드를 다룰 자격이…!”

“그럼 죽여서 가져가던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얀의 이죽거림에 성왕이 이를 악물었다.

“역시, 안될 줄 알았어.”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극한의 분노 앞에서도, 그는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아니,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렌의 코드 역시 소멸한다는 거군. 그렇지?”

허리를 곧게 세우며 그렇게 말한 얀은 성왕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야? 그럼 잡아서 쳐먹어보던가.”

***

구우우웅-!

기계음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는 승강기.

한 줌 조명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 얼마동안 더 이어지자 새하얀 조명이 그녀가 있는 곳을 환하게 밝혔다.

[기어코 마지막 족쇄마저 벗어던졌는가.]

체념한 듯, 한탄하듯이 울려 퍼진 중저음과 함께 그림자 속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1번 생체단말, 렌. 그대는 이 곳에 들어올 수 없는 몸일 터.]

“나도 놀라고 있어. 정말로 들어올 수 있을 지 미지수였으니까.”

자신을 ‘나’로 지칭한 렌은 새삼 신기한 듯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신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괴물이 되었군. 1번.]

빛나는 조명의 정중앙에 선 그녀의 눈은 완전히 붉게 물들어있었다.

[명령 코드는 확인했다. 그렇지만 이건….]

“그를 지키기 위해서야.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어.”

단호하게 내뱉은 렌의 목소리를 듣자 굵은 목소리, 요새도시 알카트라즈의 통제인격인 더 원(The One.)은 사방에 장비된 하전입자포 터렛을 가동시켜 빈틈없이 렌을 포위했다.

[본 개체의 감정 회로 폭주 및 최종 권한코드 무단 탈취를 감지. 인류 연방 규정에 의거하여 당 개체를…!]

“입 다물어.”

거기까지 이어지던 더 원의 목소리는 곧이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놀란 이유는 렌의 입에서 흘러나온 폭언 때문만이 아니었다.

시설 전체가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업로드 되는 순간, 모든 권한을 우선 점유하는 통제인격의 기능을 뛰어넘은 더욱 강력한 억제력.

눈 앞에 있는 그녀의 의지가 그의 회로를 꼼짝 못하게 가둬버렸다.

“지키지 못했어. 구하지 못했어. 결국 내 선택이 그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어.”

[단말의 의무를 잊은 것인가! 우린 그들을 돕기 위해 태어났다! 그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알아.”

그 수많은 단말들 중에서, 오직 그녀만이 그 의무를 지키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금단의 과실을 지녔음에도, 그녀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그 과실에 취해 스러져갈 때도.

오직 그녀 혼자만이 그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안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의 삶을 보며.

그의 복수를 보며.

그의 파멸을 보며.

줒어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붉게 물든 눈을 크게 뜬 채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렌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눈앞에 나타난 더 원의 콘솔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사라져. 네 감옥으로 돌아가.”

[안돼, 이 시설에는…!]

삐이이이-!

그 말과 함께 더 원의 기능이 정지하고, 수 천 개의 보안 방호벽이 해제되며 온 지축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기다려. 얀.”

수 십 곂의 보안벽을 뚫고 솟아오른 그림자.

수 천 년 만에 땅 위로 올라온 자신의 본체를 바라보며 렌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 천년 동안의 기다림 속에서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개운한 웃음이었다.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전부 없애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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