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67화 (167/186)

167. 겨우살이 창.

“설마 정말로 기지가 아니라 이 곳을 향할 줄이야….”

해상기지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연안.

잔스카르의 지원함대와 함께 그곳으로 나온 카일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발두르의 함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 수많은 병력과 지원물자가 쌓인 기지보다도, 저 기체 하나를 더 신경쓰는군.”

그렇게 말하며 카일은 하늘 위에 떠 있는 글레이프니르를 바라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이동중인 함대를 눈치 챈 것인지, 그리고 얀은 어떻게 이 상황을 예측한 것인지.

고대인의 유물들로 이루어진 전쟁터를 보며 카일은 허망한 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우리 같은 것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이를 악물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하늘 위에 떠 있는 발두르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소문으로만 듣던 검은 콜로서스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영광이군.

손님을 맞는 것 같은 편안한 어조로 말을 거는 성왕을 보며 얀은 입가를 비틀었다.

[적함 하전입자포 충전중.]

“인사 대신에 대포부터 갈기고 본단 말이지!”

그 말과 함께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수백발의 입자포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과과광-!

함대를 한 순간에 지워버릴 정도로 거대한 빛줄기.

오로지 한 기의 콜로서스를 잡기 위해 포문을 연 발두르였지만, 글레이프니르는 등에 거대한 기계장치를 짊어진 채로 그 광선들을 이리저리 피해내고 있었다.

- 계승자의 무기라고 해서 기대했건만, 한낱 날파리에 불과했던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고도를 올린 글레이프니르를 잡기 위해 전함 상부에 있는 입자포들이 일제히 얀을 겨눴다.

“지금이다!”

모든 포문이 글레이프니르를 향해있는 그 타이밍.

그것을 놓치지 않은 카일의 벨로스터가 신호하자 해수면이 솟아오르며 잔스카르의 새하얀 잠수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7번 발사관 개방. 대함미사일 발사!”

투화악-!

발사관을 박차고 튀어 오른 거대한 미사일들의 양 옆에서 연기가 분출되었다.

칙-! 푸쉭-!

공중에 뜬 채 보조 추진기로 각도를 맞추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사일 끝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며 세 개의 거대한 미사일이 발두르의 하부 갑판을 올려쳤다.

콰쾅-!

“직격 확인!”

“2차 발사 준비! 이 정도로 쓰러질 리 없어!”

“적 포격을 분산시킨다! 함대 산개! 가지고 있는 모든 걸 퍼부어라!”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남은 함대의 모든 포문이 발두르를 향해 불을 뿜었다.

[하부 배리어 일부 손상.]

“그래, 잔스카르는 결국 저 자의 수중에 떨어졌나.”

거대한 전함의 함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성왕 한 명뿐이었다.

“발두르. 저들의 전력이 그대를 위협할 수 있는가?”

허공을 향해 그렇게 묻자 굵은 목소리가 함교에 울려 퍼졌다.

[부정. 연방 설립 이전의 재래식 무장은 본 함에 유의미한 타격을 주지 못함.]

“역시. 계승자의 전함이 이 정도 공격에 무너져선 안 될 일이지.”

흡족하게 웃어 보인 성왕은 고개를 들어 거대한 기계장치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글레이프니르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필시 아래에 있는 버러지들은 연막이고, 진짜는 저 기괴한 기계일 터인데…. 저것은 어떠한가?”

그렇게 말하자 발두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대답하지 않지? 저것은 위험한 것인가?”

[…해당 기체가 장비한 무장은…. 본 함에 유의미한 타격을….]

그렇게 말을 흐리는 발두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왕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계승자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

그렇게 말하는 성왕의 웃음은 점점 짙어져, 섬뜩한 광소로 변해있었다.

“왜. 여기서 대답을 미뤄 저 무기에 맞는다면, 편히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말과 함께 성왕의 발소리가 아무도 없는 함교에 울려 퍼졌다.

“너희 기계들의 의무는 계승자인 날 지키는 거다! 계승자인 날 섬기는 거다! 계승자인 날 위해 일하는 거다!”

동시에, 성왕은 수많은 기계들. 창조주의 유물들이 계속해서 되뇌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

[적전함 화력망에서 이탈. 사격제원 산출.]

끊임없이 올라오는 미사일들을 요격하기 위해 발두르의 포문이 아래로 향한 그 순간.

포문의 사각지대로 들어온 얀은 등에 장비된 미스틸테인 발사기를 어깨에 짊어졌다.

“생각한 것 보다 더 쉬운데?”

“이상해. 발두르의 제원정보대로라면, 이 정도로 돌파당할 리 없어.”

눈앞에 떠오른 발두르의 스펙과 장비를 둘러본 렌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상부에 장비된 대공포만 백 이십 문.

원래 같았으면 이 위에 올라온 시점에서 글레이프니르는 벌집이 되어있어야 했다.

“이 정도면 꼭 쏴달라고 대 주는 것 같은데.”

아무런 대응 없이 조용한 발두르의 상부 갑판을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린 얀이었지만, 이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닐!”

[명령 확인. 미스틸테인, 동기화 개시.]

얀의 말에 응답한 닐이 짧게 답하는 것과 동시에 얀의 목덜미를 타고 어마어마한 정보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씨발, 어지간히도 말을 안 들어 처먹네…!”

대함 질량병기, 미스틸테인.

콜로서스의 몇 배는 되는 거대한 창은 장비하는 것만으로도 온 시야에 노이즈가 가득해지고, 혈관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사격각 산출 확인. 조준 완료.”

이중동조로 미스틸테인의 연상과정 일부를 맡은 렌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의 발사기가 정확히 발두르가 있는 곳을 겨눴다.

철컹-! 철컹-!

발사기와 결합한 왼쪽 어깨와 팔의 골격이 뒤틀리며 억지로 고정되자 팔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고정 완료. 기체 손상률 20%. 최종 안전장치 해제. 파일럿 발사 명령 대기.]

푸쉬익-!

거대한 금속 막대를 잡고 있던 서브 암이 해제되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의 동력로가 맹렬히 회전했다.

위이이이잉-!

이윽고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한 창에서 스파크를 내뿜던 그 순간.

삐-!

부저음과 함께 얀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얀은 그것이 비명소리라고 생각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어그러지고, 눈앞의 공간이 뒤틀리는 이질적인 느낌.

선조의 위광을 폭파시켰을 때 느껴지던 압도적인 열량과는 다른,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뒤틀리고, 갈라지고, 그와 동시에 꿰뚫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끼이이이이이이이-!

백상어 세 대의 미사일 세례를 온 몸을 받아내고도 거의 손상이 없던 발두르의 방어막이 그 뒤틀림을 받아냈다.

아니, 받아내지 못했다.

단순히 발사된 창에서 생성된 마찰열만으로도 수십 겹의 배리어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고, 지형을 통째로 찢어발기는 압도적인 충격은 수 백 겹의 복합장갑과 보호필름으로 구성된 거함의 장갑판을 종잇장처럼 꿰뚫었다.

“아악?!”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귀를 막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고막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굉음에 갑판에 나와 있던 수병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함장님!”

“안그래도 귀청 떨어질 것 같은데, 너까지 난리냐?! 나도 보여!”

부관의 다급한 외침에 답한 카일은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쿠콰콰콰콰쾅-!

발사기를 떠난 미스틸테인이 발두르의 상부 갑판을 사선으로 꿰뚫었다.

공간을 통째로 뒤틀어버리는 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일어난 폭발과 화염이 발두르의 거체를 집어삼켜, 거대한 불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착탄 확인. 적함 손상률 57.8%]

“그래. 이제 내부에 진입하기만 하면…!”

말을 이어가던 얀은 이어서 찾아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파직! 파지직!

한 발 만으로 전함을 부숴버리는 거포.

그것을 억지로 들어 올려 쏜 글레이프니르의 왼팔은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삐-! 삐-!

[좌완부, 기동 불능. 피드백 억제율 22%. 파일럿 바이탈 수치 불안정. 생명유지모드로….]

“안돼…!”

황급히 기체를 폐쇄하려고 한 닐의 목소리를 막은 건 얀이었다.

“아직 저 안에, 성왕이 남아 있잖아.”

데미지 피드백에 의해 오른팔이 갈갈이 뒤틀린 얀이었지만, 그는 억지로 정신을 붙잡으며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발두르를 향해 내리꽂혔다.

쿠콰앙-!

“하, 하하! 하하하!”

온 함교를 가득 경고음과 붉은 화면.

그리고 눈앞에 찾아온 글레이프니르를 본 성왕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얀을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갑군. 반쪽짜리 계승자!”

- 그래. 그리고 잘 가라고.

만면에 웃음을 띤 성왕의 얼굴을 확인한 얀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오른팔을 들어 기관포를 발사했다.

부와아아아앙-!

순식간에 함교를 쑥대밭으로 만든 글레이프니르의 기관포.

“저런 무기를 가져왔을 줄은 몰랐네만…. 이 정도로 죽어 나자빠져서야 알프라이아의 성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멀쩡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얀이 얼굴을 찌푸렸다.

포연이 걷히자 나타난 것은 상터 하나 없는 성왕의 몸.

그의 양 쪽 손목에 새겨진 문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염동력?”

“로렌츠 공작이 사용하던 마력장이 있지 않은가?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이렇게 변하거든.”

케인을 들먹이며 이죽거리는 성왕의 모습에 얀은 다시 한 번 기관포를 쐈다.

그러나 붉게 타오른 문양에서 흘러나온 파장은 이윽고 반투명한 막이 되어 함교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발에서 그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다. 반쪽짜리.”

- 뭐?

글레이프니르의 기관포 세례를 맞고도 멀쩡한 성왕은 차갑게 그를 비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단순히 단말의 눈에 띄어서 코드를 받은 네놈과는 달리, 난 이 운명을 타고났단 말이다!”

쿵-!

그렇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성왕의 등 뒤로 붉은 콜로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폐하. 무사하십니까.

그의 안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무신경한 말투.

그렇지만 성왕은 오히려 그것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에게서 뽑아낸 복구 프로그램이 있다. 몇 개월이 지나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

- 그렇다면 탈출하시지요. 전 그동안 저 괴물을 죽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델란엘의 콜로서스가 곧바로 맞은편에 선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뛰어올랐다.

카앙-!

그의 콜로서스를 쳐내기 위해 뽑아든 글레이프니르의 대검이 짓쳐들어오는 델란엘의 랜스를 가로막았다.

까가가각-!

- 얀 베르쿠트! 이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

- 이 새끼, 기체가…!

중앙에 박혀 있는 것은 델타 콜로서스의 삼중 마력로.

그렇지만 그의 붉은 기체는 기존에 보이던 콜로서스의 골격이 아닌, 글레이프니르와 흐레스벨그와 같은 연방 제식병기의 프레임을 지니고 있었다.

- 드디어 네놈과 같은 선상에 섰다. 이번에야 말로, 네 놈을 죽여 동료들의 복수를 이루리라-!

그 말과 함께 델란엘의 붉은 콜로서스, 비다르의 추진기가 불을 뿜었다.

“닐!”

[나노머신의 이상활동 감지. 이 이상 기체 운용 시 파일럿의 생명이…!]

“눈앞에 이걸 못 죽이면 다 끝이야! 풀어!”

뒤틀린 팔에서 돋아난 혈관이 터지며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곳곳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렇게 외친 얀의 의지에 따라, 글레이프니르의 안광은 점점 색을 더해가고 있었다.

[동조율 고정 해제. 파일럿 명령에 따라, 이중동조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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