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여기도 개판이었네.
“좋아! 이제 올린다!”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알프라이아 해상기지에 제국군의 깃발이 꽂히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우리 함대 깃발이 아래쪽에 있는 건데?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야?”
“저쪽 중대장에게 문의해보십쇼. 전 무서워서 못하겠습니다.”
“중대장은 그나마 좀 사람같은데, 그 밑에 애들이….”
“아, 그럼 됐어. 아래쪽에 있는 걸로.”
카일의 볼멘소리가 들려왔지만, 올라가는 깃발들을 보는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해상기지에 꽂힌 깃발의 맨 위에는 제국의 국기가, 그 밑에는 사람의 팔뼈를 문 사냥개의 그림. 그리고 그 밑으로 제국 해군의 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자.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과연 이 녀석들은 어떻게 나오려나?”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성공시킨 카일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은 알프라이아.
제국과 한 세기를 싸워온 국가의 심층부였으니까.
“당장 사방에서 알프라이아 군이 달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 이 기지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런지….”
- 2주일. 그때까지만 유지하면 돼.
하늘 위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은 카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 저건 또 뭐야. 하늘 위에 콜로서스?”
얀의 전투를 지켜보지 못한 카일이 헛웃음을 내며 그렇게 말하는 사이, 항구에 착륙한 글레이프니르에서 얀과 렌이 걸어 나왔다.
“다른 기사들은?”
“기체 수리중이야. 내일 모레면 상륙함에 실을 수 있다는군.”
그렇게 말하면서 뒷정리가 한창인 수병들을 바라보는 얀에게 카일이 다시 물었다.
“근데 2주라니?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뭘….”
그렇게 말하자 얀이 그를 돌아보고, 그의 등 뒤에서 수면이 통째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백, 상어….”
흰 동체를 드러낸 거대한 잠수함이 솟아오르고, 그 등판이 열리며 거대한 기계장치를 물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뭘 할 속셈이냐고?”
눈앞에 나타난 백상어에 넋을 잃은 카일이 다 하지 못한 질문에 얀이 답했다.
“발두르를 부숴버리고, 이 전쟁을 끝낼 거다.”
***
“함대가 궤멸되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뤄진 거대한 궁전.
얼굴에 핏대를 세운 한 엘프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의 은총을 받은 이후에, 제스타엘이 작전 계획을 보내왔네. 폐하께서는 그걸 승인하셨고….”
“지금 그런 탁상공론을 묻는 게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대함대가 한순간에 사라졌…!”
“베리엘.”
한껏 격양된 목소리를 쏟아내던 엘프 베리엘은 구석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크네. 폐하께서 불편해 하시지 않나.”
낮고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흠칫한 베리엘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성왕 폐하! 저, 전 그저….”
더 말을 이어가려던 베리엘이었지만, 베일 너머로 성왕의 손이 올라오자 그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짧은 한 마디가 들려오다 베리엘이 몸을 흠칫 떨었다.
“왕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 만큼 깊은 것이겠지. 그리 겁주지 말거라. 델란엘.”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델란엘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자 베리엘이 긴장이 풀린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원인은 무엇인지 알아냈나?”
뒤이어 내밀어진 질문에 고개를 숙인 다른 엘프는 품속에서 작은 기계장치를 꺼내들었다.
“정보통이 회수해 낸 델타 콜로서스의 기록장치입니다.”
“그래도 수확이 없지는 않았군.”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 속에 있던 성왕이 손짓하자 고개를 끄덕인 엘프가 기계장치를 작동시켰다.
치지직-!
노이즈가 낀 화면이 허공에 나타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혼란스러운 전장과 당시의 상황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영상이 되어 나타났다.
[그림엘! 함대가!]
[뭐라?]
델타 콜로서스 부대를 지휘했던 근위기사, 그림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시선이 전장의 한 구석을 향했다.
쾅-!
쿠콰앙-!
하늘로 날아올라 함대를 습격해, 그대로 함교를 통째로 베어버린 글레이프니르의 모습.
그리고 뒤이어 수면 아래에서 솟아오른 콜로서스의 검은 팔이 소형 구축함들을 하나하나 바닷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근위기사단! 전원 전투를 지속하라!]
[그림엘?!]
[그럼 함대는…!]
잠시 동안 기사들 사이의 문답이 이어지더니 시야가 흔들리며 곧바로 불타는 함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함대는 내가 수호한다. 그대들은 지상을 점령하라! 성왕께서 함께하시길!]
그렇게 말한 뒤 한걸음에 달려간 그림엘이었지만, 그가 해안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안돼…. 이렇게 되면, 본토의 해상기지는…!]
그림엘이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그를 겨눈 카발리들의 돌격포가 일제히 발사되었고, 영상은 거기에서 멈춰 더는 재생되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검은 콜로서스라니, 케르단에서 나타난 그 악마가 아닌가?”
“중부 평원에서도 목격되었네. 최대 위험요소는 케인 로렌츠였다지만, 이젠….”
“하늘을 나는 콜로서스라니, 이게 대관절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영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곳곳에서 우려가 섞인 중얼거림이 쏟아져 나왔다.
하늘을 나는 글레이프니르와 해수면에서 솟아오른 콜로서스.
그리고 완전히 궤멸된 알프라이아 함대까지.
“위험합니다. 연안방어는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해상 보급선이…!”
“하하하하하-!”
불안한 표정을 한 엘프의 말을 끊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서 성왕 폐하…?”
“웃으시다니, 내가 지금 헛것을 본 것인가…?”
그동안 성왕을 모시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광경.
그 모습에 창백해진 엘프들은 공포와 걱정이 뒤섞인 시선으로 어둠 속에 앉은 성왕을 바라보았다.
“그래. 바일사르, 알리에노르, 아크…. 그들이 전부 사라졌으니, 다음 차례는 내가 되겠군.”
한탄하는 듯 내뱉은 성왕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회의장 가운데에 떠오른 화면을 바라보았다.
정지된 화면 속에 비치는 수십 기의 콜로서스.
성왕은 그 가운데에 위치한 검은 색의 글레이프니르를 보고 있었다.
“배신의 대가는 언젠가는 찾아오는 법이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할지….”
그렇게 말하는 성왕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른 엘프들은 더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델란엘.”
“예. 폐하.”
“새로 지급된 기체는 많이 익숙해졌는가?”
자신의 바로 옆을 지키던 델란엘에게 그렇게 묻자 고개를 숙인 델란엘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흡…!”
“크, 크흠…!”
흰 이를 드러낸 채 웃어 보이는 델란엘의 얼굴을 본 엘프들은 스산한 그의 표정에 어깨를 떨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명령하신다면, 언제든 나가 저 악마의 숨통을 끊어오겠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안심이군.”
웃음 지으며 그렇게 말한 성왕은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에 앉은 엘프들을 향해 말했다.
“병력을 전부 끌어모아 중부전선을 돌파해라. 해안지역은 발두르로 처리하도록 하지.”
“예, 예?!”
그렇게 말하자 당황한 엘프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 재고해주십시오 폐하! 작금의 상황은 너무 불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킨 것은 베리엘이었다.
“불리하다? 어째서지?”
평온한 어조로 성왕이 그렇게 되묻자, 마른침을 삼킨 그가 성왕을 향해 열변을 토해냈다.
“방어군이 소모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어린 엘프들까지 콜로서스에 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상황에서 공세를 한다면…!”
그렇지만 거기까지 말한 뒤, 그의 목에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꺽….! 꺼어억?!”
델란엘의 검집에서 뽑혀 나온 레이피어가 그의 목 정 중앙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엘프의 마력장을 그대로 찢어발긴 델란엘의 검은 푸른 오러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불충한 발언일세. 베리엘.”
그렇게 말하는 델란엘은 만면에 띄운 광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 명령하시지 않았나. 최후까지 맞서 싸우라고.”
“데, 델란엘…! 자네가 어찌…!”
이미 검게 죽어있는 피부 사이로 보인 델란엘의 눈은 붉게 물든 채 비어있었다.
“엘프를 노예로 쓰던 인간이 아닌가! 그것들이 밀고 들어온다면 갓난아이 하나, 노인 하나라 할지라도 목숨 바쳐 싸워야지! 마지막 한 생명이 사그라들 때 까지!”
“아, 아아…!”
이윽고 그가 레이피어를 뽑아내자, 숨을 거둔 베리엘의 몸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죽이면 어떻게 하나 델란엘. 이러면 군단장을 새로 뽑아야 하지 않나?”
“송구합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는 델란엘의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린 성왕이 좌중에 앉은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충성스러운 알프라이아의 엘프들이니, 이 이상의 지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겠네.”
“폐, 폐하….”
말을 잇지 못하는 다른 엘프들을 바라본 성왕은 델란엘과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에게 말했다.
“알프라이아를 위해 싸워주길 바라네. 마지막까지 말이야.”
***
“이, 인간들…!”
“오지 마라! 오지 마!”
무장을 전부 빼앗긴 알프라이아 군 생존자들은 제국군 수병들에 의해 건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처리될 예정이었다.
“허, 이거 참….”
“상황이 안좋다 안 좋다 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한데.”
임시 감옥에 연행된 알프라이아 군 병사들의 면면을 확인한 얀과 카일은 동시에 한숨 쉬었다.
“고블린은 생후 일 주일도 안 된 유체…. 오크들은 성인식도 채 치르지 않은 상태에요.”
“나머지는 죽을 날까지 한 두 해도 남지 않은 노인들이고 말이지.”
어두운 표정을 한 라니스의 한 마디에 답한 것은 얀이었다.
겁에 질린 채 한 구석에 몰려있는 이들의 태반은 총은 고사하고 밥숟가락 들 힘도 없어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우, 우리를 어쩔 생각이야…!”
어느 새 우두머리가 된 듯한 비교적 건장한 체격의 청년 오크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얀과 카일 그리고 라니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전부 죽일 생각이지. 어떻게 죽일지 의논하는 중이었고.”
“뭐, 뭐라고…!”
“야, 야! 제발 입 좀 다물어 봐. 상황이 더 안좋아지잖아.”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는 얀을 막아선 카일은 얼굴을 찡그린 채 골머리를 앓았다.
“전부 없애는 게 후환이 덜하지 않나?”
“훈련된 군인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이것들을 봐. 징집된 민간인들이라고. 여기서 죽이면 오히려 주변 지역이 들끓어오를 걸.”
후방 보급선이 구축되고 충분한 병력으로 방어하고 있는 군사거점이라면 이들을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현재 이 해상기지를 점유하고 있는 건 한 줌의 수병들과 87 독립중대원 뿐.
글레이프니르와 아이린의 콜로서스가 있다고는 해도, 계속된 전투로 인해 기체도 조종사도 휴식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습격까지 이어진다면 제국군은 그대로 질식할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며 되는데?”
“총살은 안돼.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는 수밖에. 전사자 시체와 함께 소각하면….”
“아니요.”
카일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연 것은 라니스였다.
“돌려보내요. 식량을 줘서.”
그 말에 카일과 얀이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야.”
스산한 목소리를 낸 것은 카일이었다.
“부하들 목숨을 대가로 밀고 들어온 곳에서 그깟 자선사업이나 하라고?”
“그럼 죽이시던가요. 점령군이 맨 처음 하는 일이 민간인 학살이라니, 주변 마을들이 잘도 협조하겠군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라니스의 모습에 카일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까부터 씨발, 보자보자 하니까 포로 주제에 참 살판났다 그치?”
그렇게 말하며 라니스와 얼굴을 가까이 댄 카일의 눈은 원한으로 가득 차있었다.
“착각하지 마. 옆에 있는 저 친구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 당장 네년을 갈아마셨을 테니까.”
친구 아닌데, 라고 덧붙이는 얀이었지만 카일에게도 라니스에게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말 안해도 알아요. 알면서도 당신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고요.”
기지를 지키고 있는 병력의 절대다수가 카일의 수병들인 이상, 이 해상기지의 지휘자는 카일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라니스는 얀이 아닌 카일을 설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납득시켜 봐. 내가 이것들을 살려 보내야 하는 이유가 뭔지.”
그렇게 말하는 카일의 눈을 응시한 라니스는 이를 악문 채 손을 떨었다.
“왜 말이 없지? 합당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면, 우린 지금 당장에라도…!”
“아니. 아무래도 이 녀석들은 내버려 둬야겠는데.”
카일의 말을 끊은 얀의 한 마디에 카일이 거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창 밖, 마을 입구를 봐. 망원경으로.”
그렇게 말하자 표정을 일그러트린 카일이 혀를 차며 그가 건넨 확대경을 받았다.
“갑자기 뭔데?!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기까지 말하며 카일이 창밖을 보자,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마을 입구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국 알프라이아를 배신한 배신자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죽지 못한 열등한 오크입니다.’
‘나는 싸우는 게 무서워 자살했습니다.’
수많은 팻말을 건 채 목이 매달려 있는 수십 구의 시체.
닐의 망원시야를 통해 그것을 본 얀은 헛웃음을 흘리며 차갑게 내뱉었다.
“허, 여기도 개판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