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내 대신 살아갈 이들.
“아이린은?”
건물에서 나온 뒤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얀이 그렇게 묻자, 옆에서 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정대로야. 루미가 준 장비도 보급됐어.”
“그래. 이걸로 단델과 아이린도 지위에 걸맞은 전공이 생기는군.”
그렇게 말하며 얀은 알프라이아의 해상기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애들한테는 왜 말하지 않은 거야?”
“뭘.”
“네 복수의 이유.”
그 말에 얀이 렌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 깨끗한 눈이 얀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잖아. 이런 사연팔이를 하지 않아도 저 녀석들은 잘 따라오니까.”
형벌부대, 케르단 전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87독립중대의 대원들과는 달리, 베르쿠트 기사단에게 있어 얀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귀족 출신의 기사들은 통제하기 힘들다는 소리야?”
“그렇게 말해도 할 말은 없지만…. 좀 다르지.”
귀족 출신이냐, 형벌부대 출신이냐 하는 급 나누기가 아닌 그들을 둘러싸던 환경의 차이에서 나오는 이질감.
“내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과 전술이 저 녀석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출신이 다르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작게는 생활방식이나 대화 주제, 크게는 전술의 방향이나 전투에 임하는 마음까지.
“케인과 동고동락한 녀석들이겠지만, 모두가 케인과 같은 별종은 아닐 거 아냐.”
그렇기 때문에 얀은 그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밝혔다.
벨커스에 대한 원한이라는 거대한 공통분모를 만들어 자신의 방식을 그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저 집사장을 분이 풀릴 때까지 헤집어놓다 보면 저 녀석들도 우리 부대에 적응을 좀 하겠지.”
“사실상 세뇌나 다를 바 없는 방식이야.”
“굳이 비유하자면 마약이 더 맞는 말일걸?”
케인의 복수라는 명분 아래에 숨어있던 개인의 원한을 끄집어내 충족시키고 그 쾌감에 기사들을 중독시켰다.
“원수의 피를 눈앞에 들이밀고, 직접 죽이라고 던져주기까지 하니 어떻게 거부하겠어?”
독사과를 건네는 마녀와 같이 음습한 방식을 지적하는 렌이었지만, 얀은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참 능숙해.”
“뭐가?”
“자신을 악당으로 만들어서 그럴 듯 하게 꾸며내는 거.”
렌이 그렇게 말하자 얀이 되물었다.
“이것 말고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고?”
“응. 구분한 거잖아. 두 부류로.”
“구분하다니?”
“너와 함께 죽을 이들. 그리고 너 대신 살아갈 이들.”
얀은 입을 다물었다.
“강한 원한이 있다 해서, 아무 망설임 없이 상대를 난도질하는 이들은 몇 없어.”
한 번 쯤은 의문을 가진다.
한 번쯤은 망설일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지.
떠밀리듯 이루는 복수가 과연 자신이 원하던 것인지.
그렇지만 베르쿠트 기사단의 기사들은 기꺼이 미리암의 손목을 잘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기쁘게 미리암의 몸을 헤집고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그대로 놔뒀다면 원한에 미쳐 살인귀가 되었거나, 케인의 죽음을 방관한 제국인 전체를 죽이려 들었겠지. 넌 그 목줄을 잡아챈 격이고.”
“과대해석이야.”
“정말 그럴까?”
그렇게 말한 렌은 자신이 들고 있던 신문을 들어보였다.
‘전 로렌츠 기사, 수도 빈민가에서 40명 연쇄살인.’
‘벨커스 청사에 콜로서스 테러 발생. 범인은 전 로렌츠 기사인 벡맨 로렌츠….’
“무고한 기사들을 네가 더럽혔다는 듯 포장하지 마. 저들은 너 이상으로 복수에 미쳐있어.”
“….”
저들은 자신과 같았다.
벨커스에 대한 복수심을 원동력으로써 살아가는 이들.
그러니 다가올 전투에서, 그들은 자신과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벨커스와 함께 스러진다면, 그 뒤는….
***
쿵-!
- 해안가 정박 완료! 출입구 개방합니다!
수송칸 한편에서 들려오는 함장의 목소리와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대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우리 새 대장님이 긴장을 많이 하신 모양인데?”
“걱정 마십쇼 중대장님. 죽기보다 더 하겠습니까?”
“하하하하하!”
장난스럽게 이어지는 중대원들의 한 마디에 선두에 선 단델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절대 안죽어. 우린 이겨서 돌아갈 거다.”
그렇게 말한 단델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아이린!”
그렇게 말하자 은은하게 빛나는 카발리의 눈이 빛나며 그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당연하죠.
쿵-!
“키, 키이익! 저기! 저기 열린다!”
“기관총 준비! 상륙하는 놈들을 전부 갈아버려라!”
쑥대밭이 된 해안기지에서 뒤늦게 전열을 갖춘 오크와 고블린들이 간신히 지켜낸 기관총을 거대한 상륙정에 겨눴다.
“아무리 그래봤자 한 줌도 안되는 병력! 이 지형에서 우리를 이길 수 있을 성 싶으냐!”
이를 악물며 그렇게 말하는 오크는 자신의 총을 들어 천천히 내려오는 출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쿵-!
이윽고 차단벽이 완전히 내려오는 순간, 손을 들어올린 오크 장교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부 쏟아부어라! 발사-!”
투다다다다다다-!
부와아아앙-!
고정용 기관포, 기관총 진지, 소총수까지.
남아있는 모든 화력이 열려있는 상륙함 안으로 쏟아지며 엄청난 폭음과 연기를 쏟아내었다.
“좋아! 제압 완료! 다음 상륙함을…!”
충분한 화력을 퍼부었다고 생각한 오크 장교가 그렇게 말한 순간.
쿠르르르르…!
관절부에서 울려 퍼지는 기동음과 함께 연기 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서, 설마 저건…!”
이윽고 연기를 헤치고, 검은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발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두께의 장갑을 몸에 두른 채였다.
쿵-!
- 방어 성공. 전 대원, 전개 확인했습니다.
온통 새까만 색으로 칠해진 콜로서스와,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진 콜로서스의 방패를 본 오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상륙함 안에, 콜로서스가…!”
그리고 그와 함께 콜로서스의 등 뒤에서 나타난 검은 전투복 차림의 대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전 대원! 장비 착용!”
단델의 말과 함께 그들이 머리에 쓴 바이저를 아래로 내렸다.
키잉-!
연기 속에서 빛나는 수십 개의 붉은 안광.
그와 함께, 아이린이 탄 콜로서스의 한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화보병 지휘용 프로토타입 AI-클레어. 가동합니다. EAW-01 외골격 슈트, 데이터 링크 완료. 광학미채 가동합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아이린의 콜로서스를 제외한 모든 대원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 뭐야?!”
“사라졌다! 키익! 안보인…!”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수십 명의 대원들을 찾으려 얼굴을 밖으로 내민 순간.
투화악!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고블린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한 번 해안선이 불타기 시작했다.
“대방패 퍼지! 요새포 장착!”
[지시 확인. 2번 장비로 환장합니다.]
아이린의 외침에 카발리의 양 손에 달린 거대한 방패가 떨어져나가고, 상륙정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끌려나왔다.
“저게…. 무, 슨…?”
철컹-! 철컹!
이윽고 카발리의 한 쪽 어깨에 거대한 전함의 함포가 올라가고, 두 줄기의 앵커가 땅에 박혀 카발리의 몸체를 고정시켰다.
콰드득!
이윽고 종아리 부분에 달린 스파이크를 땅에 꽂아 넣은 아이린을 감싸듯, 반투명한 조준선이 나타났다.
삐-!
개조된 사격통제장치의 지시에 따라 조준을 맞춘 아이린이 함포의 방아쇠를 잡아당기자….
쿠와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앵커로 몸을 고정시킨 카발리의 몸체가 사정없이 뒤흔들렸다.
“크윽?!”
포탄을 쏘는 것이 아니라 포탄에 맞은 것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의 충격.
온 마력을 끌어모은 채 함포의 진동을 버텨내는 아이린의 의지가 닿은 것인지, 포탄은 예정된 경로를 따라 흰 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탄두 전개, 자탄 분열.]
아이린의 기체 한편에서 들려오는 AI 클레어의 목소리와 함께 날아가던 거대한 포탄이 갈라졌다.
투확!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백 수천 발의 파편탄들이 후방에서 지원을 준비중인 오크와 고블린들을 한 순간에 찢어발겼다.
“차탄! 고폭탄!”
[지시 확인. 탄피 방출합니다.]
푸쉬익-!
콜로서스의 절반은 되는 두께의 약실이 뒤로 밀려나며, 거대한 포탄의 탄피를 뒤로 밀어냈다.
[차탄 장전.]
아이린이 어깨에 짊어진 대포는 글레이프니르가 쓰는 것처럼 정밀한 기계가 아니었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던 함포를 억지로 개조하여 콜로서스에 이어붙인 물건.
철컹-!
탄을 장전하는 것 만으로도 웬만한 돌격포를 쏘아 올리는 듯한 반동이 느껴졌다.
“이 까짓 거!”
시시각각 마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에도 이를 악물며 그것을 견뎌낸 아이린은 사력을 다해 함포를 들어올려 조준을 맞췄다.
콰직! 콰지직!
발사 시 충격과 반동을 이겨내지 못한 증가장갑들에 균열이 일어나며 점점 콜로서스 몸체의 곳곳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까짓 거, 단장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조준점이 맞춰지며 다시 한번 부저음이 솟아올랐다.
삐-!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자, 거대한 함포의 동이가 약실을 쳐올려, 거대한 고폭탄을 포신 밖으로 밀어냈다.
쿠콰아아아앙-!
곡사로 쏘아올린 초탄과는 다른 직사로 쏜 포탄.
굉음이 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조준한 지점이 터져나가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쿠르르르-!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요새의 중심부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그 무너진 틈을 향해 광학미채를 두른 대원들이 내부로 진입했다.
투두두두두-!
[1구역, 클리어.]
[3분대, G-5 포인트로 이동. 수뇌부를 제압한다.]
[3구역 바리케이트! 돌파한다!]
[발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쏘아 올려지는 수많은 총탄에 대응할 수 있는 고블린은 없었다.
“유, 유령이다!”
“다들! 다들 도망쳐라! 전부 죽을 거다!”
이윽고 전의를 상실한 채 고블린들이 도망가던 순간, 남은 두 척의 상륙함의 해치가 열리며 그곳에서 무장한 수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요새는 제압됐다! 잔당들을 정리해!”
“지금부터 이 곳이 우리의 새 집이다! 개미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마!”
“돌격-!”
이윽고 몇 시간 후.
[내장 배터리 소진. 광학미채 해제합니다.]
총성과 비명이 잦아든 해상기지 한 가운데에 선 단델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치이이익-!
몸을 숨겨주던 장막이 점점 거둬지고, 쓰임새를 다한 배터리가 탄피처럼 튀어나와 연기를 뿜어냈다.
“인원보고!”
바이저를 벗은 단델이 허공을 향해 그렇게 외치자, 곳곳에서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중대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87중대, 사상자 없습니다.”
“없다고?”
자신이 지휘했음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단델이 되물었다.
“지, 진짜 없어? 부상자나 그 외에 열외인원은…!”
“중대장님. 진짜 없으니까 긴장 푸세요.”
대원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다리에 힘이 풀린 단델이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 죽었어…. 아무도….”
“중대장님 덕입니다. 훌륭한 지휘였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는 대원들을 바라본 단델을 이윽고 그들을 향해 마주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