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오랜만에 뵙습니다.
“읍! 으읍-!”
어두운 창고 건물 속.
눈과 입을 모두 틀어막힌 채 발버둥치고 있는 미리암은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원로파와 베르쿠트 백작이 손을 잡았다니, 그런 낌새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벨커스가 제국 전체에 풀어놓은 정보망은 항상 얀과 그의 부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부대원 개개인의 이동경로와 물자의 이동, 심지어는 그곳을 드나드는 드워프들의 행적까지.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든 구속을 풀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낡은 나무판자의 마찰음과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울리는 낮고 둔탁한 소리.
제국군 장교의 군홧발 소리였다.
“풀어.”
짧은 목소리에 우악스런 손들이 미리암을 잡아 고정시킨 뒤 눈을 가린 천과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냈다.
“커헉!”
그동안 쉬지 못한 마른 숨을 내뱉은 미리암은 숨을 컥컥거리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 네놈들은…!”
이미 사방이 얀의 기사들로 둘러싸인 상태.
로렌츠 가문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벨커스의 심복인 미리암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짙은 살기로 가득했다.
“이 정신나간 것들! 이런 짓을 벌이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성 싶으냐?! 백작께서 이 일을 안다면 네놈들은…!”
분노에 차 그렇게 소리치는 미리암이었지만, 이내 그는 느껴지는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뭐, 뭐야?”
원수의 심복이 눈앞에 있음에도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 잃은 개들 치고는 꽤 말을 잘 듣지?”
차가운 목소리.
그제서야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알아챈 미리암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시체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차갑고, 도 창백한 피부.
베르쿠트 백작이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오. 백작!”
“납치했지. 넌 전투 중 행방불명으로 처리됐고.”
고저 없이 이어지는 얀의 목소리에 미리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렇다고 해도 백작께서…!”
“기사 수십을 데리고 알프라이아에게 패배해, 그 와중에 시신도 없이 행방불명된 지휘자. 언론이 과연 널 뭐라고 보도할까?”
“큭…!”
로렌츠의 붕괴로써 벌어진 제국의 대 분열.
본래는 벨커스와 로렌츠, 두 축으로 갈라져 각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던 언론들 역시 이러한 정치적 분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벨커스 기사단의 첫 패배. 에드윌 백작이 돌아갔으니 슬슬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겠지.”
“기사들이 패배한 것은 그대와 지크 백작이 정보를…!”
“그렇게 증언해 봐. 저 세상에서 말이지.”
벨커스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악화되었고, 원로파의 손을 빌려서야 겨우 상륙부대를 막아낼 수 있었다.
벨커스 기사단에게 연안방어를 일임한 뒤 델타 콜로서스의 존재를 은폐한 카일의 계략이었겠지만, 기사단이 모두 전멸한 이 시점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벨커스는 알프라이아를 막을 수 없었고, 원로파의 기사들과 베르쿠트 기사단이 그들을 처리했다.
그 사실만이 남아 제국 곳곳에 퍼질 터였다.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 것이오?”
“왜냐고?”
시체조차 수습하지 않은 채 땅바닥에 버려진 벨커스 기사들의 시신.
쓰레기처럼 부서져 버려진 콜로서스.
그리고 팔다리를 묶인 채 그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자신까지.
“도대체 우리 벨커스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오! 도대체…!”
“대가없는 선의는 없으며, 이유 없는 악의도 없다.”
얀이, 그리고 미리암의 주인인 하이람 벨커스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그 한마디를 듣자 더 항변하려던 미리암이 입을 다물었다.
“그, 그 말은…?”
“죽은 선임이 알려준 말이지. 자신을 이 곳으로 보낸 자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라고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얀은 폼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그거…!”
“슬슬 감이 오나?”
하이람이 말버릇처럼 내뱉던 말.
그리고 그가 피우는 담배.
“난 케르단 전선의 형벌부대 출신이지.”
연기가 흘러나오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그렇게 말하던 얀이 고개를 숙여 미리암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잘 생각해 봐. 케르단이라고.”
“케르, 단….”
“네놈들의 진실을 알게 된 자들을 처분하기 위한 쓰레기 소각장.”
그렇게 말하자 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미리암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고 있냐고? 당연히 봤으니까.”
얀의 시선이 미리암을 응시했다.
“그, 그 눈은…. 설마 당신?”
기억의 심연을 더듬던 미리암이 이제야 생각이 닿은 듯 중얼거렸다.
그래, 저런 눈을 한 녀석이 있었다.
제 피붙이도 아닌 가짜 어미를 위해 하인들을 죽이고, 자신과 백작의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이.
먹지 못해 삐쩍 마른 팔. 상처투성이인 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숨겨뒀다가 내민 부엌에서 훔친 과도까지.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급히 피가 필요했다.
때마침 그에 적합한 재료가 준비되어서 백작에게 권했고, 백작은 이를 허락했다.
그리고 그 하녀를 지키겠다고 달려든 소년의 이름은….
“얀…. 베르쿠트….”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떠올릴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지.
하루에도 수십 명의 재료가 벨커스의 피를 만들기 위해 쓰여지고 그들 중 사연 없는 이들은 없으니까.
“드디어 알아챘군.”
자신은 특별하지 않다. 얀은 복수의 이유를 묻는 클라우스 황자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일주일에 수십 명의 재료가 벨커스의 피를 위해 소모된다.
그들 한 명 한 명은 각자의 사연과 가족, 정인을 가진 이들이었고, 그들을 짓밟고, 누명을 씌워 케르단으로, 수도의 하수구로, 알 수 없는 깊숙한 곳으로 처리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미리암의 일과였으니까.
자신과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도, 자신보다 더 기구한 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난 합당한 이유로 이곳에 선 게 아니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
렌이 자신을 발견했기에.
케인이 자신을 끄집어냈기에.
클라우스가 자신을 지원했기에.
“그렇다보니, 언젠가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있었어.”
“….”
“내가 항상 입에 담던 복수는 사실 핑계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검은 눈.
엉망진창으로 뒤덮인 알리에노르의 광기, 탐욕으로 얼룩진 트로이얀의 욕망.
그 외에도 수많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고 있어야 할 눈에는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는 것도, 이곳에 서 있는 것도, 전부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붙잡기 위한 명분일지도 모른다고.”
생존을 위해 분노를 잃었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었다.
참호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동료들의 시체 속에 숨어, 함께하던 이들의 부산물을 챙기며 살아온 10년.
처음에 가진 원한도, 야니카를 잃은 상실감도,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전부 닳아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네 얼굴을 보니 깨달았어.”
자신이 생존을 위해 웅크리던 때, 그들은 내 어머니의 시체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동료의 죽음을 뒤로 하고 도망쳤을 때, 그들은 다른 이들의 피를 뽑아 영광을 취하고 있었다.
자신이 동료의 군번줄 대신 주머니 속 건량 한 줌을 챙기던 그 때, 그들은 이들의 시체를 딛고 서서 황금으로 된 잔에 술을 채우고 있었다.
“네놈들을 전부 죽여버리지 못한다면, 난 절대로 편히 눈 감을 수 없을 거라는 걸.”
그 말과 함께 얀이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빈틈을 보이다니!”
마력을 끌어모은 미리암이 자신을 묶은 밧줄을 풀어헤치며 순식간에 얀이 있는 곳을 향해 짓쳐들었다.
“대업을 위해선 그 어떤 죄라도 기꺼이 짊어질 것이다! 그것이 백작님과 나눈 나의…!”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그 말과 함께 얀을 향하던 미리암의 손목을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스걱-!
이윽고 절단면을 따라 흘러내려 떨어진 것은 그의 손목.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눈을 크게 뜬 미리암이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아아아악-!”
얀의 옆에 선 기사 한 명은 자신의 검을 타고 흐르는 미리암의 피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렌이나 케인, 클라우스 황자 이외에 내 사연을 들은 건…. 너희들 뿐이군.”
그렇게 말한 얀은 자신을 호위하듯 둘러싼 서른 명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
“어때? 그 손으로 직접 복수해보니.”
그 말을 들은 기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리 주군을 죽인 원수지만, 이런 명예롭지 못한 방식의 복수는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었지.”
그들이 입에 담은 말은 아니었다.
비쿠스 영지에서 이뤄진 훈련 중, 그렇게 말하며 성을 떠난 기사들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어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달콤하지 않아?”
몇몇 기사들이 그 말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르지.
그들은 지금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기 위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
“복수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원한의 굴레는 다른 원한을 낳을 뿐이다? 원수를 용서했을 때야말로 진정한 복수를 이룬 것이다?”
양 팔을 벌린 얀은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과 몸을 떨고 있는 미리암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웃기는 소리. 한 번도 원한을 진 적 없는 이들이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고? 눈앞에 원수의 피를 남기지 않았나.
다른 원한을 낳을 뿐이라고? 그 원한마저 남을 새 없이 철저히 짓밟으면 그만이지.
용서? 내가 용서한다고 해서 그가 참회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얀의 열변이 쏟아질 때마다, 흘러나오는 미리암의 피가 점점 늘어갈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참회의 가장 큰 동력은 죄책감이 아닌 공포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뉘우치는 시늉이라도 하지.”
그렇게 말하며 얀이 발걸음을 옮겼다.
얀이 미리암에게서 멀어질수록 그것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점점 가운데에 웅크린 미리암을 향해 가까워져 갔다.
“시, 심문을 할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난 네놈들에게 어떤 정보도…!”
“풉!”
정말로 그의 말이 우습다는 듯 터져 나온 얀의 웃음소리에 미리암의 말이 멈췄다.
큭큭큭….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기사들의 어두운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이들이 한 때 로렌츠의 기사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스산한 웃음소리였다.
“심문?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되는 모양이지?”
벨커스에 대한 정보 따위, 잔스카르의 정보망을 손에 얻은 지금에 와서는 한 줌의 가치도 없었다.
“말했지. 벨커스에 대한 복수만큼은 확실하게 주겠다고.”
그 말에 기사들이 띈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첫 번째 복수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며 얀은 미리암을 향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떤 죄라도 짊어질 거라고? 그럼 짊어져 봐. 별로 멀리 있진 않으니까.”
그런 뒤, 얀은 그대로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쿵-!
낡은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였지만, 미리암에게 있어 그것은 훨씬 더 거대하고 무거운 문이, 철문이 닫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자, 잠깐만…. 나, 난…!”
“기대해라. 미리암 벨커스.”
기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함께, 그를 감싸는 그림자가 점점 더 짙어졌다.
검이 뽑혀나가는 소리,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는 소리, 장갑을 낀 손을 꺼내 주먹을 쥐는 소리.
수많은 소리가 미리암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자 그의 눈에 공포감이 서렸다.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복수의 대상을 눈앞에 둔 기사들의 표정은 마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희와 희열에 가득 찬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