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56화 (156/186)

156. 오랜만에 뵙습니다.

“화물칸에 실린 거, 저거 방수포 아닙니까?”

“그러게. 어디에 쓸 생각인지.”

얀의 기사들과 87독립중대원, 그리고 카발리를 가득 실은 기차가 해안선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허, 개판이군.”

잔스카르 국경도시에서 출발한 기차가 함대 지휘소에 도착하기까지는 한나절이 걸렸다.

발두르와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해군 함정들의 상태는 멀쩡한 것을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었다.

“전함은 한 척도 안남았네요. 그나마 체급이 가장 큰 함선이….”

“이번에 새로 건조되었다던 콜로서스 상륙함. 그리고 저것뿐이군.”

기차의 차창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함선 세 척과 그들 사이에서 포탄을 적재하고 있는 벨로스터를 본 얀이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얀. 그 사이에 우리 아버지보다 출세했던데.”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초췌해진 인상의 카일 웬리는 오랜만에 만난 얀의 귀족 인장을 보며 웃음 지었다.

“상관의 목을 팔아 얻어낸 자리지.”

“피차일반이지. 너나 나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옷깃에 달린 백작의 인장을 보이자 얀은 상황을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 백작은 전사했군.”

“발두르의 첫 목표였어. 해군의 사령탑 역할을 하고 계셨으니, 어지간히도 눈엣가시였겠지.”

그렇게 말하는 카일의 눈에는 깊은 분노가 담겨있었다.

“뒤에 저건 뭐야. 하프 엘프?”

“아.”

그런 상황에 87독립중대원들 사이에 껴 있는 엘프인 라니스를 본 카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애완동물이라니, 중부지역 귀족들이랑 비슷한 취미인가?”

“비꼬지 마. 이유가 있어서 데려온 거니까.”

애완동물이라는 폭언에 아랫입술을 꾹 다문 라니스였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네가 데려온 거니 별 다른 제지는 않겠는데, 병사 숙소에는 얼굴 안보이게 해. 아님 복면이라도 씌우던가.”

그렇게 말한 카일의 눈 역시 진득한 살기를 담은 채였다.

“나 같은 윗대가리나 체면 차리는 거지, 그 상판을 까고 다니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자 라니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한 세기를 그렇게 살아온 이들에게 다가가 전쟁을 끝내자고 말하면, 그들은 그걸 듣는 시늉이라도 할까?’

이전에 잔스카르에서 얀이 그렇게 물었을 때, 그의 눈은 공허하게 비어있었다.

전쟁을 끝낸다 해서, 묵은 증오가 끊어지지는 않는다.

‘씨발 귀쟁이 새끼들이, 그 녀석은 내일이 전역이었는데…!’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사실 텐데, 그렇게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형도 동생도 다 죽고 나 혼자 남았어. 귀쟁이 새끼들은 한 마리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릴 거다.’

해상기지 곳곳에서 흘러들어오는 병사들의 감정을 느낀 라니스는 주먹을 쥔 채 묵묵히 그것을 받아내고 있었다.

“숙소를 따로 준비해 줘. 정비창에서 가까울수록 좋아.”

얀이 그렇게 말하자 어깨를 으쓱인 카일을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해. 지휘관 숙소도 태반이 남아도는 실정이라서 말이지. 그리고….”

말을 흐리는 카일을 보며 고개를 갸웃한 얀을 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뭐야, 그 때 그 시건방진 새끼 아니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에 얼굴을 구긴 얀이 고개를 돌려 그 곳을 바라보았다.

“가르드…. 황자님.”

잔뜩 골이 난 표정을 한 가르드 황자가 자신을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단장님.”

“알아. 포로 얼굴 숨기고, 너흰 미리 대기해.”

“알겠습니다.”

뒤에서 조용히 들려온 단델의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원들을 이끈 단델이 숙소로 이동했다.

“그 사이에 백작위니 기사단장이니, 팔자 좋아졌구만 그래?”

“황자님께서는 그 사이에 팔자가 꼬이셨고 말이죠.”

그 말에 가르드 황자가 표정을 구겼다.

“씨발,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황자님 탓이죠. 벨커스의 그늘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죽치고 있으면서,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셨습니까?”

제국의 2황자에게 할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불경한 언사가 튀어나왔다.

“이, 이 새끼가…?”

“뭐요. 꼬우면 지난번처럼 쳐 보시던가.”

“큭…?!”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얼굴을 붉힌 가르드였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는 별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측근들은…. 이미 아무도 안남았군.’

구름처럼 그의 곁을 지키던 수행원과 경호원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본 얀이 그렇게 비웃었다.

황제의 비밀이 사실이라는 것을 안 시점에서, 제국의 황자들은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었다.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황족들은 후원받던 귀족가들에 의해 버려지거나, 굴욕적인 매매혼으로 팔려가는 신세.

그마저도 안되면 가르드 황자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변방 출신의 버러지가, 감투 좀 썼다고 제국 황족과 맞먹으려 들어?!”

“글쎄요, 고대인의 계승자쯤 되면 맞먹어도 할 말 없지 않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가르드 황자를 향해 이죽거린 것은 얀이 아닌 카일이었다.

“이 새끼들이 쌍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 가르드였지만, 그는 얀의 등 뒤에 선 기사들의 시선에 몸을 움츠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얀 베르쿠트!”

“압니다. 버텨봐야 몇 년이겠죠.”

원한으로 쌓아올린 자신의 지위도, 그리고 자신의 남은 생명도.

언젠가부터 밖으로 잘 나오지 않게 된 렌을 떠올리며 얀은 그렇게 답했다.

“근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황자님은 어떤가요?”

목소리를 낮춘 얀이 한 걸음씩 가르드에게 다가갔다.

벨커스의 그늘 아래에서 자신과 로렌츠를 노리던 양아치 황자.

내심 분노가 끓어올랐는지, 아니면 케인의 죽음 이후로 참을성이 없어진 것인지, 가르드에게 다가간 얀은 검은 얼굴을 한 채 그를 마주보았다.

“벨커스의 후원도, 개인의 힘도 없이. 언론이 쌓아올린 거짓 성과만 가득한 철부지 황자.”

“너, 너…?”

이어지는 폭언에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들려던 가르드가 움직임을 멈췄다.

“말해 봐. 이 양아치 새끼야.”

이제는 존칭도, 황족에 대한 일말의 존중조차 사라진 얀의 모습.

그 모습을 본 가르드가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닌 공포였다.

“넌 과연 며칠짜리 인생일까?”

“그, 그…!”

느껴지는 시선은 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버려졌다고는 하나 한 때 벨커스 백작가의 한 축이었던 황자.

그를 바라보는 베르쿠트 기사단은 당장이라도 그를 콜로서스로 짓뭉갤 기세였다.

“거기까지 해. 베르쿠트 백작.”

얀의 지위를 입에 담은 카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자 혀를 찬 얀은 살기를 거뒀다.

“으헉?!”

털썩!

자신의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힘이 풀린 가르드 황자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사단 수송에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나마 예의를 차리며 그렇게 말한 카일이 얀과 기사단을 데리고 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가르드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중얼거렸다.

“씨발, 씨발! 백작은 왜 날 이런 곳에 보내서…! 이대로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판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사이, 회의실을 향해 걸어가던 얀은 한숨과 함께 카일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계승자라니,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어?”

“제국 신문사는 지금 최고 호황이야. 이거 보라고.”

카일은 그렇게 말하며 외투 주머니에 꽂힌 신문을 들어보였다.

신문 1면을 장식한 것은 클라우스의 안면을 후려진 자신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황제가 몸을 갈아 끼운다는 의혹을 최초로 유포한 자가, 백주대낮에 황족을 폭행했으니.”

“오늘 일이 알려지면 또 난리가 나겠군.”

그렇게 말하자 피식 웃어 보인 카일은 얀을 향해 말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이런 일도 곧 일상이 되지 않을까 싶네.”

폭언과 반말, 살해협박.

황족을 대한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폭거를 휘두르는 얀이었지만, 가르드는 그런 얀을 향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작금의 제국에서 황가의 위신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벨커스가 뒤누아 성을 무너트린 것. 알고 있나?”

카일의 질문에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 신문이 난리더군. 황가의 대들보가 무너졌다고 말이야.”

“신흥귀족파 곳곳에서도 황제의 후원을 받던 귀족들이 숙청되고 있어. 조만간 벨커스의 수중에 떨어지겠지.”

“원로파는?”

“에드윌 백작이 진두지휘하고 있어. 아버지도 그쪽에 지지의사를 표했지만…. 보다시피 이 꼴이지.”

지원으로 온 것은 과녁밖에 되지 않는 거대한 수송선 세 척 뿐.

로렌츠의 몰락과 발두르의 출현이라는 악재가 겹친 제국은 아예 해군을 포기할 속셈인 듯 보였다.

“알프라이아 함대는 어쩌고 있고?”

“대규모 상륙전을 준비중이야. 제해권을 획득했으니, 해안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칠 수 있을 테지.”

절망적인 전황을 읊는 카일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얀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황가에 요청해서 날 이곳으로 부른 거겠지?”

얀의 부대를 지목해서 지원으로 요청한 명령서.

그곳에 찍힌 함대 지휘관의 인장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묻자 카일이 입가를 비틀었다.

“맞아. 이 상황에서 알프라이아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회의실에 도착해서 그렇게 말한 카일은 작전지도 한편에 놓인 수많은 모형 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발두르는 중부 전선으로 이동했어. 벨커스와 황도군이 틀어막고 있지. 그 말인즉, 곧 있을 상륙작전에 참가할 수 있는 함대는 이들이다.”

전함 다섯 척, 순양함 열 세 척, 구축함 스물, 그리고 벌떼처럼 모여 있는 상륙정들까지.

“상륙 위치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

그렇게 말하며 카일이 들어 보인 쪽지는 흥건한 피에 완전히 절어있었다.

“…정보원의 목숨을 써서 알아냈군.”

“이렇게라도 안하면 아버지를 뵐 낮이 없어.”

뒤이어 카일이 얀을 향해 서류를 건네고, 그것을 펼쳐본 얀은 피식 헛웃음소리를 냈다.

“이건 또 어디서 알아낸 건데?”

서류에 적혀있는 것은 식민지에서 활동하던 때, 루네스 항구에 나타난 콜로서스에 대한 기록이었다.

“제국 영해에서 일어난 전투인데, 해군본부에서 이 정보를 간과했을 리가 없잖아.”

카일이 붉은 잉크로 표시한 부분에는 루네스를 침공한 해방군의 콜로서스들이 이용했던 장비들의 정보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차 화물칸에 있던 방수포들은 설마….”

“뭐야, 오는 길에 봤어? 그럼 얼추 이해하겠네.”

그렇게 말한 카일이 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수처리한 콜로서스로 적 상륙부대를 급습한다. 수면 아래에서 공격한다면 가능성이 있지.

항구에서 솟아오른 콜로서스를 떠올린 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전술은 유효하지만, 수가 모자라. 적어도 해안선에서 상륙부대와 함포 사격을 받아낼 부대가 필요하지.”

전투함과 상륙정을 수장시킨다 해도, 벌떼처럼 몰려든 이들을 전부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밑에서 함대를 급습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육상기지가 점거당한다면 자신의 부대는 물속에서 질식해 죽어갈 것이 자명했으니.

그것을 지적한 얀이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대책이 있나?”

“대책? 그건 모르겠고….”

그렇게 말을 흐린 카일이 미소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상륙부대를 받아낼 고기방패들은 섭외해 놨지.”

똑똑.

그 말과 함께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도착했나보군.”

그렇게 중얼거린 카일이 웃는 얼굴로 들어오라 외치자, 문이 열리며 나이든 군복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일 백작님.”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본 얀은 눈을 크게 뜬 채 주먹을 쥐었다.

‘네놈을 고발하마. 얀 베르쿠트.’

그날, 자신과 야니카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 목소리.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묵은 원한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집사장….’

“증원군으로 참가하게 된 벨커스 기사단의 지휘자, 미리암 벨커스라 합니다.”

그 말과 함께, 벨커스의 인장을 목에 단 노인이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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