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그 놈의 계승자.
“비겔 자작은?”
“사살했습니다. 끝까지 황가의 편에 들겠다고 하여….”
“멍청한 자 같으니라고.”
뒤누아 영지 한편에서 보고서를 받아든 하이람은 거칠게 혀를 차며 눈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이건, 이건 아닙니다. 백작님! 우리를 이 곳까지 끌어올린 것은 폐하가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
안면이 함몰된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자의 어깨에는 남작위의 인장이 박혀있었다.
“끌어올렸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 또한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카르디어스의 최측근이자 그의 사냥개로 살아온 것이 수십 년.
목줄을 잡고 있던 황제가 사라진 이상, 그는 자신의 야망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폐하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폭거가 용인되리라고…!”
“죽은 황제를 들먹여서 어쩔 셈인가, 남작.”
“큭…!”
카르디어스 황제를 들먹이는 하이람의 눈에는 한 줄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도, 제국도, 그리고 영광도. 모두 살아남은 자의 것일세.”
승리하는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그것을 최우선으로 삼아,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푹.
“커헉…!”
심장에 박힌 검과 함께 남작의 입에서 핏덩이가 솟아올랐다.
“이걸로 내부 반대파벌은 전부 사라졌군.”
거사 계획을 밝히자 이에 반대한 신흥귀족파의 측근들.
예상 외로 수가 많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겨우 준비가 끝난 건가.”
식민지의 제어권을 잃은 것은 뼈아프지만, 덕분에 클라우스 황자는 식민지에서 나올 수 없다.
이런 상황에 최대한 빨리 알프라이아를 정벌하여 전쟁을 끝낸다면, 그는 케인의 명성을 뛰어넘어 제국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자기 마음대로 황제를 바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영웅이!
“제국의 두 공작이 사라진 지금, 백작님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불안요소는 남아있지.”
모든 준비를 마친 하이람이었지만, 그의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 있었다.
“얀, 베르쿠트…. 그 천출의 기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젠 백작이 되었네. 그 시궁창에서 기어 나온 지 단 1년 만에!”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운 좋게 피를 타고나, 근본도 알 수 없는 힘으로 제국을 뒤집어 놓으며 종횡무진하는 얀.
단지 황제의 장난감이라 생각한 이는 어느새, 제국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세력으로써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젠 더 두고 볼 수 없지.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다.”
쿠르르르…!
벨커스의 인장을 지닌 콜로서스들이 알리에노르 저택의 외벽을 허물고 있었다.
“아무리 백작님의 행사이지만, 뒤누아의 성을 훼손한다면 원로파의 반발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예상한 일이네.”
멀리서 무너져가는 뒤누아 공작가의 저택을 바라보던 하이람은 물고 있는 담배를 떨어트려 비벼 껐다.
군납용으로 보급되는 싸구려 담배였다.
“여기서 찾게 될 것에 비한다면 사소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하이람의 발밑에는 뒤누아 가문의 집사 파비앙의 시체가 놓여져 있었다.
“백작님!”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하이람은 이윽고 무너진 저택 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이로군.”
저택 중앙에 위치한 무도회장.
극장으로 사용되던 호화로운 공간의 벽을 허물자, 거대한 철벽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평기사 브랜든과 이갈. 두 사람이 찾아냈습니다.”
“그 외의 목격자는?”
“없습니다.”
집사의 말이 들려오자 고개를 끄덕인 하이람은 곳곳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목격자는 최소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기질적인 한 마디.
그 말에 하이람의 집사, 다이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 말에 하이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크는 등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역시, 쓸 만한 도구야.”
그렇게 혼잣말한 하이람은 홀로 눈앞에 있는 철문을 바라보았다.
스걱!
쇳소리와 함께 그의 팔뚝에 생겨난 핏방울이 점점 커져, 팔의 윤곽을 따라 흘러내렸다.
“처음부터 모든 걸 타고난 창조주의 후예. 그렇기에 그대는 나와의 협력마저 거부했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알리에노르를 차갑게 비웃은 하이람은 철문 앞에 자신의 피를 떨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반족짜리 무지렁이가 가져 온 정보로 만들어낸 피다. 과연 주인 잃은 네 성은 이걸 구분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식별 코드, %^$^&$$…! 인증 완료. 에어록 개방합니다.]
푸쉬익-!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점점 열려가는 철문을 바라보며 하이람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분간해낼 수 있을 리 없지.”
문 너머로 펼쳐진 시커먼 공간을 바라보며 그의 입이 계속해서 열렸다.
“가짜로 만들어낸 피를 제 주인인 양 착각하는 이것들이, 창조주? 위대한 고대인의 문명?”
단순히 정해진 명령만을 수행하는 기계.
도구일 뿐이다.
“황족이니, 창조주니, 계승자니….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없지.”
그렇게 읊조리며 홀로 시설 내부에 들어온 순간, 천천히 기계실의 문이 닫히고,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파앗-!
그리고 그곳에 나타난 수백 개의 시험관.
인종, 성별을 가리지 않는 수많은 인간들이 눈을 감은 채 그 안에 담겨있었다.
“인간만을 연구한 것이 아니었군. 알리에노르.”
한편에 놓인 시험관들을 보며 하이람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엘프, 오크, 고블린. 그리고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이종족들이 보존된 채 시험관에 담겨 있었다.
“이걸로, 벨커스의 피가 부활한다!”
알리에노르의 예비 육체를 만들기 위해 준비된 수백, 수천 구의 클론들.
그들 모두에게는 전성기의 자신, 식민지의 영웅인 하이람에 비견할 정도의 웅대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
“성왕의 딸이라고?”
“네.”
마력을 소진한 기사들은 조종석에 늘어져 기절에 가까운 잠을 청했고, 87독립중대의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시민들의 구조작업에 한창이었다.
그 사이에 충격적인 진실이 흘러나왔지만, 얀과 렌, 그리고 루미 이외에 듣는 이는 없었다.
“그렇지만 넌….”
“하프엘프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필요?”
그렇게 되묻자 고개를 끄덕인 라니스는 얀을 바라보며 역으로 질문했다.
“하프엘프가 갖게 되는 능력. 당신은 알고 있지 않나요?”
그 말에 얀이 얼굴을 찌푸렸다.
‘라엘….’
“맞아요. 그와 같은 반쪽짜리 중 몇몇은….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죠.”
얀의 생각에 답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내보인 라니스는 표정을 굳힌 채 얀을 바라보았다.
“본의는 아니었어요. 전 단지, 증명하기 위해서….”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한 얀은 라니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 성왕의 딸이라는 자가 잔스카르에 와 있는 이유는 뭐지?”
“제가 온 게 아니에요. 버려진 걸 루미가 거뒀죠.”
라니스의 대답에 얀이 루미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혼혈종. 그들이 흘러들어오는 곳은 대부분이 교국, 혹은 이곳이었으니까요.”
“성왕의 딸이 하프엘프라는 사실. 그것을 숨기는 대가로 알프라이아에게서 편의를 얻었죠.”
제 제안이었어요. 라고 덧붙이는 라니스의 말에 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네 말은, 성왕을 죽여 알프라이아를 정상화할 테니, 침공을 늦춰 달라?”
“막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하다못해, 전쟁과 관련 없는 민간인들이라도….”
“민간인?”
라니스의 말에 반문한 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쟁이 이 지경까지 치달은 와중에, 관련 없는 민간인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한가?”
“그건…!”
한 세기를 계속해온 전쟁이 불러온 것은 단순한 물질적인 피해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반려가, 누군가는 형제가, 자식이, 은인이, 친구가, 이웃이, 상관이, 스승이….”
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알프라이아는 제국의 국민들을 죽여 왔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제국은 알프라이아의 국민들을 죽여 왔다.
“한 세기를 그렇게 살아온 이들에게 다가가 전쟁을 끝내자고 말하며 화친을 맺는다면, 그들은 그걸 듣는 시늉이라도 할까?”
질타나 비꼼이 아닌, 순수한 질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엘프와 고블린들을 살해하며, 그리고 그들의 손에 수없이 많은 사람을 잃으면서, 몇 번이고 고민해오던 내용이었다.
“그렇게 만들 거예요.”
“그걸 어떻게 믿지?”
그렇게 말하며 얀은 라니스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잔스카르에 숨어있던 네가 어떻게 성왕을 죽이고 알프라이아를 협상장으로 끌어올 생각이지?”
“당신을 이용해야죠.”
“이용해서 어쩔 속셈이지? 성왕의 자리를 빼앗아 왕좌에 오르고 싶나?”
떠보는 듯한 얀의 질문에 이를 악문 라니스는 말없이 얀을 노려보았다.
“성왕 치하의 알프라이아가 어떤 꼴인지…. 인간들은 몰라요.”
“그럼 반대로 묻지. 넌 인간의 삶에 대해 알고 있나?”
어쭙잖은 이분법은 집어치워라.
그 말에 라니스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지며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린 대가 없이 움직이지 않아.”
“알고 있어요. 절 돕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뭘 건네줄 생각이지?”
“델타 콜로서스의 제조법.”
그 말을 들은 얀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알프라이아가 제국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내놓겠다고?”
“예. 탑승자의 생명을 빨아먹으며 가동하는 무기라니, 그런 건 존재해서는 안되요.”
치직-!
라니스의 대답과 함께 얀의 왼쪽 시야에 순간 노이즈가 꼈다.
‘닐?’
[…기체 센서에.]
이전과는 달리 대답이 늦자 의아하게 여긴 얀이 다시 그를 불렀다.
‘특이사항이 있나?’
그렇지만 어느 새 닐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부정. 센서에 이물질을 발견. 조치 완료. 글레이프니르, 정상 가동중.]
닐의 다급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사이, 얀은 자신을 바라보는 라니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지.”
“…!”
“어차피 주 목적은 알프라이아가 아니니까.”
단순히 돌발변수를 없애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작업이었다.
피를 보지 않고 끝낼 수 있다면, 주전론자인 하이람의 행동에도 제동을 걸 수 있겠지.
“방법은 있나? 성왕을 죽인다고 해서, 네가 바로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어.”
“그건 인간의 사고방식이죠.”
핵심을 찌르는 라니스의 말에 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너흰 다르다는 건가?”
“알프라이아는 성왕이라는 절대군주를 중심으로 움직여요. 인간들의 사회와는 다르게.”
“이 쪽에도 황제는 있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자 라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황제는 계승권과 귀족의 동의, 그리고 황가의 혈통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죠. 그리고 그 지배 또한 한계가 있어요.”
“부정은 하지 못하겠군.”
철혈군주라 악명 높은 카르디어스마저도, 팽창하는 벨커스의 세력을 잡아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두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황제의 정치력은 분명 뛰어났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절대군주의 통치가 아니었다.
“제왕의 권위는 유지하되, 그 방식은 합리에 기반한 왕정. 그것이 제국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얀은 다시 라니스를 향해 물었다.
“그럼 알프라이아는? 제국과는 다른 건가?”
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라니스는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발두르.”
바일사르 함대를 뒤집어놓은 공중전함의 이름이 들려오자 얀의 눈이 깊어졌다.
“알프라이아를 만들어낸 두 엘프, 알피와 라이아.”
역사서 속의 인물을 언급한 라니스가 눈을 빛내며 계속 말했다.
“그 두 사람이 끌고나온 그 거함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이…. 성왕의 권위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계승자와 같은 시스템이군.”
렌의 코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 때문에 잔스카르 전체의 통치권을 넘기려던 루미를 떠올린 얀이 그렇게 답했다.
“맞아요. 계승자.”
“뭐?”
짧은 긍정.
뒤이어서 들려온 라니스의 대답에 얀은 헛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프라이아를 건국한 두 생체단말, 알피와 라이아의 코드를 동시에 지닌 계승자. 그것이 성왕입니다.”
그 말에 얀이 입가를 비틀었다.
신비한 창조주의 유물.
거룩한 창조주의 유산.
그리고 계승자까지.
“사방 천지가 그놈의 유물이로군. 이제 정말 지긋지긋 해.”
그렇게 말하며 얀은 손을 들어 라니스를 가리켰다.
“넌 오늘부로 전쟁포로로써 87 독립중대가 관리한다. 짐 챙겨서 나와. 내일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