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에다의 인형극장.
몸 전체를 파고드는 듯한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을 뻔 했다.
그렇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얀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광경을 보았다.
“여긴….”
온통 새까만 공간.
마치 검은 연기 속에 갇힌 듯, 어두운 공간이었다.
히히히…!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얀이 얼굴을 찌푸렸다.
웃음소리.
언제 들어도 온 몸에 벌레가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들어왔어. 그 분이 들어왔어!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지?
보여드려야지! 네가 했던 것들! 우리가 했던 것들!
싫어하시면 어떡해? 안그래도 싫어하시잖아.
증오와 사랑은 방향의 차이일 뿐이야! 너도 그랬잖아!
우리도 그랬어!
우리도 그랬으니까! 저 분도 틀림없이 그럴 거야!
맞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수백 수천 명의 어린아이들이 제각각 말하고 있어 머리가 어질거렸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얀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신가보죠?”
익숙한 목소리에 얀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결국, 이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군요.”
알리에노르였다.
정확히는 알리에노르의 형상을 한 무언가.
시커먼 연기 속에서 윤곽만을 어슴푸레 드러낸 알리에노르의 편린이었다.
“이 참에 완전히 날 묶어둘 셈인가?”
“무슨 소리죠?”
“이 공간. 그리고 이 목소리.”
알리에노르의 되물음에 얀이 팔을 벌려 그들이 있는 공간을 가리켰다.
“렌과 동조할 때는 이런 걸 보지 못했어. 그렇다면 넌….”
그렇게 말하던 얀이 말을 흐렸다.
“후후후….”
낮게 웃어 보인 알리에노르의 형상이 얀에게로 다가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검은 눈, 검은 머리.
그와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 사이로 비추는 미소.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얀은 오히려 위화감을 느낀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알리에노르라고?’
자신이 기억하는 알리에노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탐욕과 집착, 그리고 광기가 묻어나는 뒤틀린 군상이었다.
그러면 지금 눈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여인은 뭐지?
마치 여느 인간과 대화하듯, 아무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다니?
“조금 칙칙하죠?”
그렇게 말한 알리에노르가 싱긋 웃어 보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연기로 뒤덮인 시커먼 공간은 순식간에 거대한, 그리고 호화로운 극장으로 변해있었다.
“이건….”
갑작스럽게 나타난 화려한 공간에 얀이 주먹을 쥐었지만, 그것을 손으로 잡아들어 올린 알리에노르는 얀을 붙잡아 한 구석으로 인도했다.
“자, 이 쪽으로 오세요. 가장 좋은 자리를 준비했어요.”
금실로 짠 테두리에 붉은 가죽으로 덮인 소파.
황금이 장식된 선반 위에 놓인 화려한 음식과 술.
풍요와 사치, 부와 오만으로 가득 찬 관객석을 보자 얀은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헛수작 부리지 마. 이런 식으로 날 묶어둘 속셈이라면….”
“속셈? 글쎄요. 저나 당신이나 이미 죽어가는 마당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그 말에 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떻게?”
“이중동조는 양방향 연결이에요. 당신이 단말의 몸을 사용하듯이, 단말 또한 당신의 내면을 바라보죠.”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를 바라본 순간, 얀은 그 자리에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때 오빠? 이러면 좀 믿음이 가?”
붉은 머리를 찰랑이는 색동옷의 엘프.
“라나…?”
무심코 손이 올라가려던 순간, 미소 짓던 라나의 모습에 노이즈가 끼며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당신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었어요.”
그 말에 손을 움찔했지만, 얀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이 알리에노르의 내면세계라면, 이 이상 동요를 보일 수는 없었다.
“애처롭네요. 얀.”
“그 입 닥쳐.”
알리에노르의 말 한마디에 억누르려던 분노가 새어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본 알리에노르는 순순히 물러나며 얀을 자리에 앉혔다.
“제가 당신의 기억을 봤듯이, 당신도 제 기억을 봐야겠죠. 그렇지 않나요?”
“흥미 없어. 내게 필요한 건 정보, 권한 그리고….”
“전부 드릴게요. 이걸 봐 주신다면.”
거짓말 하지 말라며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중동조로 인해 흘러들어오는 알리에노르의 감정.
그녀는 진심이었다.
“…오래 끌 생각은 마.”
“걱정 마세요. 이곳에서 영원히 살다 나와도 현실에서는 1분도 지나지 않으니까.”
그 말과 함께 극장의 불이 꺼졌다.
미소 짓는 알리에노르의 얼굴이 사라지고, 이윽고 허공에서 들리는 박수소리와 함께 무대의 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
[옛날옛날 한 옛날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형과 위~대한 주인님들이 있었어요.]
봉제인형이 움직인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 기괴한 모습에 눈을 찌푸릴 새도 없이, 무대가 바뀌며 가지각색의 풍경을 보이기 시작했다.
[백 개의 인형과 백 명의 주인님들은 하늘높이, 바다 깊숙이, 저~멀리 땅끝까지 걸어가서 예쁜 집을 짓기 시작했답니다.]
“나, 김재희의 이름으로!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겠노라!”
[와아! 이 주인님은 성을 쌓아서 왕이 되었네요?]
“내 이름은 알베르트! 이 검을 보아라!”
[이 주인님은 멋진 검사가 되었어요!]
“이 연구가 우리 문명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야!”
[위대한 과학자가 된 주인님도 있었네요?]
연극을 해설하는 이들은 과장되고, 뒤틀린 데포르메. 그에 비해 무대에 나온 계승자들의 모습은 현실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주인님들의 곁에는 항상 인형들이 있었답니다!]
무대의 한 구석에 조명이 비치고, 알리에노르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 저 위에 서있는 그녀는 알리에노르가 아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 빛나는 눈.
9번 생체단말인 에다였다.
[그런 주인님들 중에서는, 집을 무너트린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는 분도 계셨어요.]
“에다. 난…. 이들의 삶을 부정할 수 없어.”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지닌, 선한 인상의 남자.
그의 등 뒤에는 각양각색의 아인들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의 전쟁을 기억하는 건 우리뿐이야. 이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그런데 어째서…!”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에다의 등 뒤로 기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봉제인형으로 만들어져 짜리몽땅하게 변한 수많은 기계들.
하늘을 나는 전함, 강철로 된 거미. 타우르를 경호하던 무인 드론, 핏불 테리어….
[주인님은 아이들의 영웅이 되었어요.]
[인류가 아닌 아이들을 사랑했어요!]
[집을 지어서 아이들에게 나눠줬어요!]
아이들.
인류의 피조물인 그들을 지칭하는 말과 함께 아기자기한 도시의 그림이 나타났다.
“돌아와 주세요.”
기계들을 이끌고 도시 앞에 나타난 에다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난 돌아가지 않겠어.”
결연한 표정의 남자와 그의 일행을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봉제인형들.
살벌한 오러가 그들을 뚫고 지나가자, 꽥! 소리를 내며 튕겨나간 인형들은 울면서 무대 밖으로 도망쳤다.
[주인님의 위~대한 활약으로, 나쁜 인형 에다는 붙잡혔어요!]
[나쁜인형?]
[에다는 나쁜 인형이야?]
[주인님이 나쁜 인형이라고 했어.]
[나쁜 건 누구야?]
[누가 못된 짓을 했어?]
주위를 둘러보니 관중석은 인형으로 가득했다.
아기자기하게 데포르메 된 에다의 모습을 한 인형들.
[누가 나쁜 거야? 누가 잘못한 거야? 에다가 잘못한 거야? 왜 잘못한 거야?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무대를 둘러싼 수천, 수만, 수십만의 인형들이 고개를 미친 듯이 좌우로 흔들며 질문을 계속해댔다.
“씨발.”
이것이 알리에노르의 내면세계. 그녀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얀은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여자, 이 생체단말은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라는 것을.
쿵-!
굉음이 무대를 메우고, 장면이 전환되었다.
한 치의 과장도, 생략도 없는 어두운 공간.
사방이 강철로 뒤덮인, 감옥과도 같은 공간.
그녀는 그곳에 가둬졌다.
사명을 져버리고 피조물들과의 삶을 선택한 주인에 의해.
“정지 명령 코드가 입력된 채, 수천 년을 갇혀 있었어요.”
[죽이고 싶지는 않다고 했어.]
[그래서 유폐됐어.]
[가뒀어.]
[버려졌어.]
그리고 암전.
다시 조명이 밝아졌을 때, 방의 한 구석은 부서져있었다.
“그때 그가 찾아왔죠.”
에다의 앞에 선 남자를 보았다.
희미한 웃음을 띤, 호화로운 차림의 남자.
“마지막 남은 계승자라기엔 호위가 형편없다 싶더니, 이런 곳에 단말을 가둬둔 건가.”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은 제국의 황제, 바일사르 1세 였다.
“피조물의 왕이 무슨 볼일이야?”
“이젠 피조물이 아니다. 사냥감도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눈에는 뜻 모를 분노가 깃들어있었다.
“주인에게 복수하고 싶나?”
“할 수 없어. 생체단말은 인간을 죽이지 못해.”
“그럼 인간이 되면?”
황제의 반문에 알리에노르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인간?”
“왜. 아닌 것 같나?”
생체단말은 그들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인간이라 칭하고 있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정해지고, 존재는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가 살아남았으니, 이젠 우리가 인간이다.”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에다의 눈에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전뇌화 장치…. 73번이 연구했던….”
“이 녀석 덕분에 덕을 많이 봤지.”
툭.
에다의 눈앞에 머리가 떨어졌다.
밤하늘처럼 검푸른 머리칼.
그것을 본 에다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어쩔 텐가? 천사.”
“천사?”
“인간을 숭배하게 된 우리들이 너흴 부르는 말이지. 거룩한 창조주의 곁을 보좌하는 천사.”
그 말에 에다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곁을 보좌한다니.
한 번도 날 돌아봐주지 않았으면서.
천사라니.
날개를 부러트린 채 강철로 된 감옥에 가뒀으면서.
거룩하다니.
피조물에 애정을 느껴 그곳에 녹아들어가, 사명을 져버렸으면서!
“하…. 하하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늘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웃음은 가면 갈수록 짙고 깊어져, 어느새 얼굴 전체를 웃음으로 덮을 수 있게 되었다.
“히히히! 히히! 히히히히-!”
에다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광기와 증오가 얼룩져,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웃고, 웃고, 또 웃으며 점점 에다는 자신의 모습을 지워나갔다.
철컹-!
무대가 암전되고, 다시 밝아졌다.
이제 무대에 선 것은 에다가 아닌 알리에노르였다.
얼굴을 떠나지 않는 웃음과 광기로 가득 찬 눈.
그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은 주인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뒤섞여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냈다.
“이게 제 결말이랍니다. 계승자님.”
그녀는 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산처럼 쌓인 시체들 위에 걸터앉아, 얀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알리에노르는, 주인을 죽이고, 그의 반려를 죽이고, 그의 친구를 죽이고, 그의 후손을 죽이고, 그를 되살린 뒤 죽이고, 그의 반려를 되살린 뒤 죽이고…!”
그 말과 함께 관중석에 앉아있던 수십, 수백만의 봉제인형들이 일어났다.
이제 그들의 모습은 모두 알리에노르로 변해있었다.
그들 모두가 알리에노르였다.
수백만 명의 알리에노르였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그만.”
얀의 한마디에 관중석에 앉아있던 모든 알리에노르들이 멈췄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입을 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어떠신가요?”
싱그럽게 웃은 알리에노르가 얀을 향해 물었지만, 얀의 표정은 굳은 그대로였다.
“기구하네. 주인에게 버림받고, 유폐되어, 수천 년을 기다리고.”
그렇게 말하는 얀을 향해 고개를 숙인 알리에노르는 얀을 향해 물었다.
“그렇게 절 불쌍히 여긴다면, 절 받아들여주시겠어요?”
“…네 새 주인이 되라. 그 말인가?”
“네!”
양 팔을 벌린 알리에노르가 얀을 향해 외쳤다.
“이제 알 수 있어요! 당신의 기억! 당신의 원한! 당신의 원수! 당신은 저와 같아요. 얀!”
“그럴지도 모르지.”
모든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며, 얀은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리에노르, 그녀는 자신이 꿈꾸는 복수의 말로였다.
“그러면…!”
“그런데 말이지.”
한 줄기 희망을 품은 알리에노르의 말을 끊고, 얀의 선고가 내려졌다.
“네 사연과 내 원한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
[사용자 권한 인증 완료. 생체단말 9번. 강제 폐기절차를 진행합니다.]
“…!”
허공에서 내려온 목소리와 함께 알리에노르가 선 무대에 균열이 갔다.
이윽고 하나 둘 무너져가는 무대를 배경으로, 눈을 검게 물들인 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여기서 사라져라. 알리에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