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보여주고 싶지 않아.
전투중이던 흰색 콜로서스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자 단델이 손을 들었다.
- 전투 중지!
확성기를 통해 들려온 단델의 목소리에 경계중이던 기사들이 하나 둘 무기를 수납했다.
“사상자 보고.”
[세 대가 피탄. 사상자는 없습니다.]
[B분대, 확인사살 실시하겠습니다. 엄호 바랍니다.]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애써 평정을 유지한 단델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좋아. 경계 철저히 하고. 시가지와 민간인에게는 되도록 피해가 없도록….”
“잠깐만요.”
자신의 말을 끊고 들려온 아이린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낀 단델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삐-
계기판에 표시된 동력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중추인 글레이프니르로부터 추가 동력이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이 상황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
“글레이프니르가 정지된건가?!”
“단장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와 함께 아이린의 카발 리가 그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 긴급상황! 전 대원, 단장님의 기체를 찾는다! 어서!
***
“씨발, 기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의식을 붙잡은 얀이 알리에노르를 보며 묻자 싱긋 웃어보인 그녀가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자전이 제 특기였거든요. 이것 봐요.”
그렇게 말하며 알리에노르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상의의 어깨를 찢어 그곳에 새겨진 것을 보여주었다.
붉은 색으로 새겨진 09라는 숫자.
렌의 어깨에 새겨진 것과 같은 것이다.
“생체단말…?”
“네!”
사뭇 발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에다는 연극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계승자님. 인류연방 소속 9번 생체단말, ‘에다’ 라고 합니다.”
그 말에 얀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아는 생체단말은 너처럼 상처가 날 일이 없는데.”
“아, 이거요?”
얀의 질문에 답하는 알리에노르의 옷 사이사이에서는 찐득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정신을 인간의 몸으로 전이시켰어. 생체단말의 유전코드와 함께.”
“그게 가능한 건가?”
얀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선 렌이 그렇게 말하자 얀이 되물었다.
“황제의 기술을 받았죠. 생각보다 괜찮지 않나요?”
얀의 물음에 답한 것은 렌이 아닌 알리에노르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렇게 운을 뗀 알리에노르의 두 눈이 곡선을 그렸다.
“제 몸에 코드가 있다면 당신이 모를 리 없을텐데, 처음 만났을 땐 왜 모른 척 한거죠?”
렌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자 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들 중 하나로서 살겠다면, 그걸 파헤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어.”
“그 덕분에 전 지금 여기 있는데요?”
네 안일한 판단 덕분에 자신이 얀을 위협하고 있지 않느냐.
책망하듯이 이어지는 알리에노르의 물음이 들려왔지만,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 보세요 1번.”
그렇지만 알리에노르, 에다는 더 할 말이 남은 것인지 계속해서 렌을 추궁하듯이 물었다.
“마치 자신이 선물인 양,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인 양 포장하면서 다가갔죠?”
“….”
“그의 목적을 이뤄주겠다는 핑계로 그의 원한을 볼모로 잡아, 당신을 필요로 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왔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는 점점 더 얀이 있는 조종석 깊숙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감정이 없는 척, 논리만을 위해 행동하는 기계인 척. 슬슬 지겹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며 알리에노르가 렌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우리 중 가장 미쳐있는 건 당신이잖아요?”
알리에노르가 렌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거기까지야. 알리에노르.”
얀의 오른손에 들린 권총이 그녀의 미간을 겨눴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군요.”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의 얼굴은 마치 억지로 일그러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차라리 울고 있다고 해도 될 표정이었다.
“돌발상황이 있긴 했지만, 칼자루를 쥔 건 우리다. 기체도 없는 상황에서 뭘 하겠다는 거지?”
“기체가 없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말한 알리에노르의 눈 속에 몇 가지 문양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전자전에 특화된 생체단말이 이런 양산기 하나를 장악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지?”
그 말과 함께 글레이프니르와 연결된 목덜미에 격통이 밀려왔다.
파지지직-!
“끄윽?!”
마치 주마등과 같이, 순식간에 여러 가지 풍경이 얀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 빠른 전환에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봐요. 이대로 동조율을 과부하시키면, 전 곧바로 기체를 장악할 수 있어요.”
비웃듯이 이어지는 말에 얀이 알리에노르를 노려봤다.
“날 산 채로 얻기 위해 그걸 참고 있다. 그렇게 말할 생각인가?”
“네! 죽어버리면 당신의 그 눈을 볼 수 없잖아요?”
웃음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오자 얀은 구역질이 치밀었다.
‘내 주변 인물들을 전부 죽이겠다. 그렇게 말했었지.’
지금 글레이프니르를 빼앗긴다면, 알리에노르는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대와 부하들을 전부 죽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얀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악물며 미소 지었다.
“시체라도 괜찮다면 어디 가져가 보시던가.”
“뭐라고요?”
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얼굴을 찌푸린 알리에노르가 되물었다.
철컥!
실탄이 약실에 장전되는 소리.
그와 함께 얀의 손이 자신의 관자놀이로 향했다.
“당신 지금 무슨…!”
알리에노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얀의 손에 들린 권총이 곧바로 불을 뿜었다.
타앙-!
잠시 동안의 정적.
얀의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갔어야 할 총탄은 누군가의 손에 가로막혀 있었다.
몸에 마력을 두른 알리에노르의 손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절 거부하는 건가요?”
자신과 함께 할 바에야 삶을 포기한다는 얀의 행동에 알리에노르의 평정이 깨졌다.
알리에노르의 텅 빈 눈이 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처음 만난 게 1번이라서? 당신에게 이 기체를 준 게 1번이라서? 당신에게 꿈을 이루도록 해 준 게 1번이라서?”
얀은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붓는 알리에노르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일 그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면요? 당신을 찾아온 것이 저 배신자의 계획이었다면요?! 당신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면…!”
“상관없어.”
그 말에 알리에노르가 입을 다물었다.
일그러진 미소 또한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였다.
“대가없는 선의는 없으며, 이유 없는 악의도 없다.”
기억 속 누군가가 말버릇처럼 되뇌던 말을 읊은 얀은 알리에노르를 노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기체를 움직이는 대가로 수명을 지불한다지만, 이 녀석에게는 아직 값을 치르지 않았거든.”
“…!”
렌을 가리키는 그 말에 얀의 앞을 가로막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처박혀있던 날 끌어낸 녀석이다. 달라는 건 뭐든 해 줄 생각이야.”
이전에 케인이 그러했듯이.
얀의 말에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철컥!
두 번째 실탄이 장전되는 소리와 함께 권총의 총구가 다시 한 번 얀의 관자놀이를 겨눴다.
“선택지를 제시하는 건 나다. 꺼지던가. 아니면 죽이던가.”
확인시키듯 쐐기를 박는 얀의 한마디에 알리에노르이 표정이 절박해졌다.
“저화 함께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살 수 있어요!”
“네 장난감으로? 필요 없어.”
“원하는 모든 걸 드릴 수 있어요!”
“그 대가로 난 모든 걸 빼앗길 테고.”
“절 당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고요!”
“날 네 것으로 만드는 대신이겠지. 줘도 안가져.”
“왜-!”
계속된 설전의 끝은 비명과도 같은 절규였다.
“드디어 찾았단 말이야! 드디어 알아냈단 말이야!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숭배하는 것! 그런데 왜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건데! 왜!”
가면으로 두르고 있던 검고 탁한 감정이 휘몰아치며 그녀의 이성을 점점 빼앗아갔다.
“렌. 시간은 이쯤 하면 충분히 벌어준 거 아닌가?”
그렇지만 알리에노르의 절규에 답한 것은 얀의 차가운 비웃음뿐이었다.
“시…. 간?”
넋을 잃은 듯한 알리에노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렌은 조용히 허리에 연결된 케이블을 통해 신호를 보내며 기체를 다시 깨우기 시작했다.
“코드 탐지. 회로 차단. 시스템 리부팅.”
우우웅-!
동력로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조종석 곳곳에 불빛이 들어오고, 곧이어서 굵은 중저음이 조종석을 가득 메웠다.
[글레이프니르, 시스템 재기동. 내부 미허가 인원 구속절차 개시.]
그 말과 함께 얀을 둘러싼 조종석에서 기계장치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양산형 AI 유닛주제에 감히…!”
자신의 뜻대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 평정심을 잃어버린 알리에노르가 그렇게 내뱉으며 조종석 밖으로 몸을 뺀 순간.
“9번 생체단말, 에다!”
등 뒤에서 들려온 루미의 외침에 흠칫 놀란 알리에노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투웅-!
총소리.
아니, 대포를 쏘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뒤로 밀려나온 알리에노르의 하반신이 터져나갔다.
“아…!”
그녀의 양 손에는 거대한 대물저격총이 들려있었다.
철퍽!
터져나간 상반신이 바닥에 떨어져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알리에노르는 아직도 의식을 잃지 않은 채 얀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허탈한 듯 웃어 보인 알리에노르의 손이 위로 올라가 하늘을 향했다.
“결국 당신도 절 필요로 하지 않는군요.”
그렇게 말한 알리에노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처참한 표정이었다.
“그럼 나도 필요 없어. 전부 다.”
그리고 전부 체념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그녀의 검은 눈이 붉게 물들었다.
“중추 인격이 각 클론들에게 지시 하달.”
알리에노르의 목소리에는 한 줌 광기도, 한 줌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굳어버린 얼굴을 한 채 입만을 움직여 말하고 있었다.
“흐레스벨그 잔존 개체. 제어 권한을 생체 CPU에서 메인 클론으로 인계.”
키잉-!
기능을 정지한 채 멈춰있던 일곱 기의 흐레스벨그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기존의 푸른 빛이 아닌 붉은 빛.
글레이프니르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안광이었다.
“1번 인격 적용. 펜리르 시스템, 각 클론에게 강제 시술 개시.”
그렇게 지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알리에노르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리고.
- 아아아아아악-!
- 꺄아아아악-!
- 아아아아아아악-!
확성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잔스카르의 시내를 가득 메웠다.
“지금 뭐라고…!”
알리에노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시술. 그것을 직접 겪은 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침음성을 내뱉은 순간.
- 원하시는 대로, 죽여드리죠. 얀 베르쿠트.
- 원하시는 대로, 죽여드리죠. 얀 베르쿠트.
- 원하시는 대로, 죽여드리죠. 얀 베르쿠트.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듯, 똑 같은 목소리가 겹쳐 얀이 있는 곳을 향해 울려 퍼졌다.
[경고. 적 기체 재기동.]
그리고 그 말과 함께, 하늘 위로 솟아오른 일곱 기의 흐레스벨그가 일제히 얀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말인즉 저 일곱 기 안에 타고 있는 게 전부?”
“알리에노르의 복제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천천히 내려오는 일곱 기의 흐레스벨그를 보며 얀이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