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48화 (148/186)

148. 흰 매와 검은 사냥개.

쿠오오오-!

산산이 부서진 아크의 잔해가 잔스카르 곳곳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다각전차는 언제 오는 거야?!”

“틀렸습니다! 가동하지 않아요!”

“잔해가 떨어진다! 모두 도망쳐!”

“꺄아아악-!”

“대피소! 모두 대피소로…!”

갑작스럽게 하늘에 나타난 콜로서스들과 부서져 쏟아지는 방주의 잔해.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지는 상황에 잔스카르 시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파일럿 탑승 확인. 시스템 기동.]

동력로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신경을 연결한 글레이프니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벽이 다시 올라오지 않잖아?”

아크를 하늘로 올려 보내기 위해 해제한 장벽.

그러나 아크가 사라지는 순간, 장벽이 없는 위쪽을 시작으로 점점 장벽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 전 포대. 발사~!

조종석에 앉은 알리에노르 경쾌하게 손을 올리자, 그녀의 기체를 둘러싼 열 네 대의 흐레스벨그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투콰아앙-!

쿠콰아아앙-!

하전입자포의 열선이 공기를 태우며 잔스카르 시내의 민간인 거주구에 내리꽂혔다.

“하늘에서 콜로서스가…!”

“어디야! 도대체 어디에서 공습을…!”

장벽이 해제되는 것과 동시에 나타난 수많은 흐레스벨그.

당장이라도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누른 얀은 머리를 가라앉힌 채 생각했다.

비틀린 그녀의 발상은 언제나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했으니.

‘당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고! 나와 같은 당신을 만들 거예요!’

이전에 흐레스벨그와 싸울 때, 알리에노르가 내뱉은 광소를 떠올린 얀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목표는 자기 자신.

그리고 거기에 방해되는 것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잔스카르인들은 내가 고대인의 계승자인 것. 그리고 제국군이라는 걸 알고 있지.”

그렇게 입을 연 얀이 하늘 위의 흐레스벨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했어. ‘제국을 위하여’라고.”

렌의 말에 글레이프니르의 추진기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국의 이름으로 이 난동을 일으킨 뒤, 날 자신의 공범으로 만들 생각이군.”

계승자인 얀의 방문으로 인해 아크는 깨어났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장벽을 해제했다.

“상황과 타이밍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야.”

잔스카르는 의장을 맡은 루미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의원 공화정. 무력시위를 빌미로 자국민을 학살한다면, 그들은 완전히 알프라이아 진영으로 돌아서게 된다.

“발두르의 출현과 케인, 황제의 죽음. 두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판도는 백중세.”

“잔스카르의 협조를 얻어내는 쪽이 전쟁의 주도권을 거머쥔다는 말이군!”

렌의 분석에 그렇게 답한 얀이 정신을 집중했다.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

그녀와의 연결을 부정하고, 그에 걸맞은 성과를 보여야 했다.

[글레이프니르, 전투 출력으로 전환.]

올라가는 글레이프니르의 동력로 소리와 함께 어깨에 장비된 입자포가 곧바로 불을 뿜었다.

투콰아앙-!

흐레스벨그가 쏘는 빛줄기의 세 배는 되는 거대한 빛무리가 새떼처럼 몰려든 흐레스벨그 진영을 향해 쏟아졌다.

[방어 대형.]

[역장 동조. 방벽 전개.]

서로 교신을 주고받은 흐레스벨그 세 대가 앞으로 나서 손을 앞으로 뻗자, 반투명한 막이 모습을 드러내 날아오는 글레이프니르의 하전입자포를 막아냈다.

쿠오오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빛줄기에 잠시 밀려나는 듯 보였지만, 이윽고 포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흐레스벨그들의 포구가 일제히 글레이프니르를 겨눴다.

“마친 잘 됐지.”

씹어뱉듯이 읊조린 얀의 입에서 뿌득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기회에 저 미친년을 죽여 버리면 될 테니까!”

당장 저 여자의 방해 때문에 케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동조율 고정 해제.]

억눌려왔던 분노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자 그에 반응하듯 글레이프니르의 장갑이 열리며 그곳에서 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플라이트 유닛, 점화.]

얀의 의지에 반응한 글레이프니르가 곧바로 흐레스벨그들을 향해 솟아올랐다.

끼기기기긱-!

글레이프니르가 내뿜는 검은 연기에 닿자, 쏘아져 나오는 입자포의 빛줄기들이 물에 녹듯 사라져갔다.

- 대단해요! 입자 분해기능을 이런 식으로 응용한다니!

마치 재롱부리는 아이를 칭찬하듯 알리에노르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하늘로 올라가는 글레이프니르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쿠콰앙-!

이윽고 대포를 소는 기체들을 지나친 채 곧바로 중앙에 위치한 기체를 향해 쇄도한 글레이프니르가 등에 장비된 대검을 꺼내들었다.

- 하지만, 공중전은 처음이시죠, 얀?

그 말과 함께 아래로 푹 꺼지며 검격을 피해낸 흐레스벨그가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목표 확인.]

[포위섬멸 진형.]

[교차사격 개시.]

그리고 순식간에 구형으로 글레이프니르를 둘러싼 흐레스벨그들이 얀을 향해 입자포를 발사했다.

- 모든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 연기로는 막아낼 수 없을 거예요 얀!

- 그래도 너 하나쯤은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어!

투콰앙-!

입자포 세례를 이리저리 피해내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의 몸체가 흐레스벨그를 향해 들이쳤다.

“렌!”

“확인. 이중동조, 개시.”

검의 사거리가 확보된 찰나의 순간, 생체단말의 시야를 확보한 얀이 곧바로 흐레스벨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자, 선물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예상한 듯, 지휘개체를 지키러 검로에 뛰어든 흐레스벨그 한 기가 몸을 던져 그것을 막아냈다.

[11번 CPU, 박진휘. 폐기절차 개시.]

“그게 누구였더라? 이제 기억도 잘 안나네.”

무기질적인 인공지능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린 알리에노르는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달려드는 11번 기체를 바라보았다.

- 아아아아악-! 아파! 아파아아-!

제어장치 내부에 들어있는 것은 철심이 박혀있는 고대인의 뇌.

억지로 기능을 과부하 시켜 동력로를 폭주시킨 흐레스벨그가 비명소리와 함께 글레이프니르를 끌어안으려 했다.

[자폭장치 가동 확인. 폭발까지 5…. 4…. 3….]

“스캔 완료. 중앙 좌측. 핵심 제어부!”

렌의 말과 함께 휘둘러진 단분자커터가 곧바로 달아오르는 기체의 심장을 꿰뚫어 반으로 갈라졌다.

- 그럼 이제 두 명을 보내볼까요?

폭발을 면한 채 두 갈래로 갈라져 떨어지는 흐레스벨그의 몸체.

그렇지만 빙글거리는 알리에노르의 조롱과 함께, 흐레스벨그의 인공지능이 무감정하게 내뱉었다.

[6번, 3번 CPU, 론 글렌츠. 황 레이 첸. 오버클럭 개시.]

“아아아아악-!”

“죽여! 죽여줘어어-!”

기계음인지 비명인지, 아니면 절규인지도 모를 비명소리와 함께, 두 기의 기체가 추가로 얀에게 뛰어들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이 미친년이…!”

- 자! 다음은 셋! 그 다음은 넷이에요! 당신은 언제쯤 지쳐 땅에 떨어질까요?!

너무나도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감싸쥔 알리에노르가 희열에 찬 채로 소리쳤다.

[지시 하달. 교전기체 의외에는 폭격임무 수행.]

[15번, 수신.]

[9번, 수신.]

인간의 두뇌를 박아 넣은 채,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알리에노르의 꼭두각시들.

다섯 기의 기체가 전열에서 조금 벗어나, 대열을 갖추기 시작하는 잔스카르의 병사들을 향해 입자포를 쏘아 올렸다.

쿠콰쾅-!

“수동조작으로 돌려! 포구는 최대한 위로…! 크아악?!”

“방열 완료!”

“쏴-!”

움직이지 않는 대포와 기갑장비들을 수동으로 조작하여 몇 발의 포탄이 하늘 위에 떠있는 흐레스벨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멍청하긴.”

그러나 전자장비의 보정 없이 수동 조준으로 쏘아일린 포탄들은 하늘 위에 떠 있는 흐레스벨그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자 그럼, 인형놀이나 계속 할까요?”

잔스카르의 인간들에게 경멸을 내비친 알리에노르가 그렇게 말하자, 글레이프니르를 둘러싼 기체들이 일제히 랜스를 꺼내들었다.

“이대로 소모전이 된다면, 제한시간이….”

시간만 주어진다면 영 다섯의 흐레스벨그를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자폭을 전제로 한 거침없는 공격과 축차투입은 얀의 체력을 꾸준히 갉아먹고 있었다.

[레이더에 반응 식별.]

“뭐야, 이 와중에 원군이야?”

닐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그렇게 이죽거리던 얀이었지만, 감지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얀은 이윽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희가 여기서 왜 나와?”

***

“어떻게 이 상황에 저 기체가…!”

“의장님 피하십시오! 이곳은…! 헉?!”

하늘에 떠 있는 흐레스벨그를 보며 경악한 것은 얀 뿐만이 아니었다.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병력을 지휘하던 루미에게 시선을 돌린 알리에노르.

“88번. 소꿉놀이는 끝났어요.”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우우웅-!

그녀의 기체가 손가락을 뻗자, 도시를 포격하던 기체 중 한 기가 포구를 들어 그녀가 있는 곳을 겨눴다.

“이렇게 허무하게…!”

절망한 표정의 루미가 그렇게 뇌까리며 흐레스벨그를 노려보던 순간.

콰아아앙-!

어딘가에서 날아온 포탄이 입자포를 쏘려던 흐레스벨그의 허리에 직격했다.

“돌격포?! 아크의 권한이 인계되기 전까지는 기갑장비를 운용할 수 없는데…!”

갑작스러운 포격에 루미가 놀라는 순간.

쿠콰콰콰쾅-!

얀을 둘러싼 흐레스벨그들에게도 수십 발의 돌격포가 쏘아 올려져, 그들의 진형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놨다.

“이건….”

[화력원 산출. 발포지점 표시.]

달려드는 흐레스벨그 두 기를 양단한 얀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뤄진 포격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통신 수신.]

그리고 닐의 안내음과 함께, 조종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단장님. 살아있습니까?]

[아무것도 못했는데 여기서 나자빠지면 진짜로 죽여 버릴 겁니다.]

그 말에 헛웃음지은 얀이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너네는 왜 여기 있는데?”

[도중에 명령이 바뀌어서요. 마중 나왔는데 이 난장판이 돼있지 뭡니까?]

통신기를 통해 들려온 것은 단델의 목소리였다.

“당신들은…!”

잔스카르의 도심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콜로서스들을 보며 루미가 눈을 크게 떴다.

어깨에 새겨진 사냥개의 문양.

그리고 글레이프니르를 빼다 박은 새카만 장갑과 거대한 돌격포까지.

“적어도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군. 닐!”

역전의 기회에 눈을 빛낸 얀이 닐을 향해 말하자 곧이어 화답이 들려왔다.

[명령 확인. 보조 전투단말, ‘카발리’ 40량. 데이터 링크 개시.]

키이잉-!

글레이프니르의 눈이 점멸하자, 일자로 찢어진 카발리들의 눈이 붉은 안광을 내뱉으며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바라보았다.

[표적제원 산출. 전술 통합 네트워크, 정상 가동.]

[사통장치 이상 없음. 전 병력, 포메이션 에코.]

[베르쿠트 기사단 첫 전투다. 죽는 놈은 지옥 끝까지 찾아가서 죽여 버린다!]

통합무전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기사들의 목소리를 들은 얀이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흐레스벨그를 바라보았다.

- 이건…!

- 네 행동을 예상했다면 거짓말이지. 얻어걸린 기회지만,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차가운 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알리에노르의 기체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당황했겠지. 나도 당황스러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얀에게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알리에노르의 목소리였다.

- 이까짓 인형들로…. 저 따위 장난감으로 감히 방해를…!

자신의 전투를 방해받았다는 불쾌감.

그리고 인간에게 쌓인 끝을 모르는 혐오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엉킨 목소리가 흐레스벨그의 확성기를 향해 흘러나왔다.

“아놀드!”

새로운 인공지능의 이름을 외치자, 무감정한 기계음이 그 말에 답했다.

[포위전 해제. 적 집단의 위험도를 상향조정. 전투대열 재배치.]

이윽고 전열을 가다듬는 열 기의 흐레스벨그가 잔스카르 시가지 곳곳으로 흩어지는 베르쿠트 기사단의 카발리를 내려다보았다.

“죽여 버려! 여기 있는 녀석들 전부!”

“막아낸다! 저 정신 나간 미친년과 인형들 전부!”

알리에노르와 단델의 목소리가 교차하며 마주본 흰 새들과 검은 개들은 서로를 향해 모든 화력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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