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47화 (147/186)

147. 씨앗을 싣고.

“결국 이 전쟁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는 말이군.”

제국은 자신만이 온전한 창조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진정 두 종족이 다른 종이었다면, 하프엘프는 나타나지 않았지.]

쐐기를 박듯 아크의 보충설명이 뒤를 이었다.

반쪽짜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하프엘프도, 동물과 같은 고블린도, 마력을 다루는 엘프도.

결국 서로 뒤섞여 분화된 같은 종이다.

“네 입장에서 보면…. 제국과 알프라이아의 전쟁은 말 그대로 촌극이었군.”

[부정하기는 않겠네.]

그 말에 얀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존에 그가 상식으로써 가지고 있던 인간과 아인에 대한 경계, 세상에 대한 인식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인간의 국가니 아인종의 국가니, 그렇게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군.”

종의 생존을 건 전쟁이라며 합리화하고, 그렇게 이어진 전쟁.

그러나 실상은 이러했다.

이전의 인류가 그러했듯이, 그저 동족상잔의 연장선상일 뿐.

[이 사실을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대의 몫이지.]

“그것 뿐인가? 내게 이 광경을 보여준 이유가?”

얀의 물음에 아크의 말이 멈췄다.

염치없는 부탁을 하려는 듯, 그는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만 이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가 너에게 뭘 해 줘야 하길래 이런 걸 보여준거지?”

그렇게 말하자 잠시 뜸을 들인 아크가 입을 열었다.

[…난, 떠날 것이다.]

그 말에 얀이 되물었다.

“어디로?”

그렇게 말하자 얀을 둘러싼 스크린이 밤하늘 너머에 있는 거대한 우주를 비췄다.

[난 이민선. 인류의 씨앗을 지닌 최후의 방주.]

이윽고 화면이 꺼지고 화면 속에 아크의 몸체, 거대한 고래의 형상이 나타났다.

구름을 뚫고, 하늘을 넘어 별 사이를 누비는 아크의 모습.

[씨앗을 가지고 날아가, 그들이 살 수 있는 새 세상을 찾는 것. 그것이 내게 각인된 명령이지.]

그렇게 말하자 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것은 나의 목적과 의무 뿐. 우주로 날아가라는 명령은 가지지 못했네.]

완성된 방주는 이 항구에 정박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수많은 콜로서스와 마력을 다루는 엘프.

그리고 사람을 먹는 고블린의 침공이 겹쳐지며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은 단 한명도 남지 못했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기계.

그러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또한 기계의 딜레마였다.

“그러니 명령을 달라?”

[그것이 나의 유일한 결핍이며, 이루지 못한 과업.]

‘나’ 라고.

그 성질 더러운 닐조차 자신을 ‘본 AI’ 로 말하는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한 얀은 별 고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주지.”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한마디.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아크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권한 계승권자의 승인을 확인. 외우주 이민선 아크, 상태점검 개시.]

쿠르르르르…!

수천 년 간 움직이지 않던 아크의 정박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하나 둘 하늘 위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자, 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크를 향해 말했다.

“난 네가 달라는 것을 줬어. 그러니 너도 내놔.”

[그러지.]

발두르를 부술 수단.

그것을 요구하자 얀이 서있던 돔의 스크린이 올라오며 그곳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건…?”

[지금 남아있는 시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무기일세.]

눈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대포였다.

글레이프니르의 키보다도 거대한 발사기와, 그 발사기의 세 배 길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송곳.

[설계 인식. 제원 산출 중.]

셀계도면이 무기라는 것을 인식한 닐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분석 완료. 지대함 질량사출병기, ‘미스틸테인.’ 재질 및 부품 규격 데이터 산출.]

그와 함께 왼쪽 눈에 나타나는 예상 파괴력과 관통력 등을 살펴본 얀의 눈이 깊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수단에 불과할 뿐, 이것만 가지고는 발두르를 죽일 수 없네.]

작은 송곳으로도 인간을 죽일 수 있다. 단지 쉽지 않을 뿐.

그렇게 말하는 아크의 목소리를 들은 얀은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뭐 어쩌겠어. 해야지.”

***

“정말로 떠나는군요. 아크.”

아크가 떠나기로 한 시각은 늦은 밤이었지만, 숨낳은 인파들이 몰려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스카르의 지하에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방주, 아크.

계승자인 얀의 허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늘 위로 올라가는 창조주의 씨앗을 구경하러 수많은 인파가 몰렸기 때문이었다.

“저런 게 하늘로 올라간다면, 여기저기서 말이 많을 텐데.”

발사장치는 지하에 있었기에 발사시설이 발각될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아가는 아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잔스카르는 교단과는 앙숙과 같은 나라니까요. 교황이 직접 부정하면 되겠죠.”

‘그 녀석이? 오히려 이용할 것 같은데.’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성직자들의 권위를 끌어내리던 호르헤 라피스의 얼굴을 떠올린 얀이 쓴웃음지었다.

“괜찮아요. 저렇게 기뻐하는 걸 봤으니.”

마치 떠나는 연인을 보는 듯 한 목소리에 그것을 듣던 렌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을 애써 무시한 루미는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아크의 모습을 바라보며 얀을 향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의 평생의 소원을 이뤄주셨습니다. 인류연방에 소속된 단말로서, 계승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고저 없이 이뤄지는 루미의 말에 얀은 어깨를 으쓱였다.

“명령에 죽고 못 사는 저 녀석과는 다르게, 넌 할 얘기가 있는 거지?”

“생체단말로서의 제 의무는 장벽 내부의 생명체를 지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곳에서 왕 노릇을 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얀은 눈앞에 보이는 잔스카르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한가운데에 위치한 고대인의 시설인 의사당. 이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잔스카르의 거리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력광이나 램프 대신 전등.

벽돌이나 기와로 만든 지붕이 아닌 철판을 이어 만든 집들과 건물들을 보며 얀은 루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전 생체단말로서의 의무보단 잔스카르의 보호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집니다.”

그렇게 말한 루미가 얀을 바라보았다.

“그 말인즉, 네게 있어서 난 인류의 계승자보단 3000명의 자국민을 죽인 인간으로 느껴진다는 건가?”

얀의 말에 루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인을 증오하는 생체단말이라.’

있을법한 얘기지.

그렇게 생각하며 얀은 루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잔스카르가 알프라이아를 지원하던 것도 사실이지.”

“아크의 말을 듣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인간과 엘프의 뿌리는 같다.

이 사실이 밝혀진 시점에서, 바일사르와 알프라이아를 오가며 전선을 백중세로 유지시키던 잔스카르의 의도는 명확했다.

“잔스카르의 진짜 의도는 전선을 교착상태로 만들어, 최소한의 희생으로 정전을 이끌어내는 것.”

뒤에서 다가온 렌의 보충설명이 이어지자 루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스카르의 조치는 전쟁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차선책이었을 뿐입니다.”

“백상어한테 살해당한 인간들에게 그렇게 말해보던지.”

“…!”

잠시 말문이 막힌 루미를 향해 얀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을 통해 이익을 올리던 것도 사실이야.”

“그게 가장 합리적이었으니까요.”

“그 합리가 너희에게서 명분을 빼앗아갔고.”

그 말에 루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와 다르게,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아. 알프라이아를 멸망시킨다면, 제국의 다음 목표는 잔스카르야.”

합리적인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싸움에는 언제나 인간의 감정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언급하자 루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해야해. 명분을 따라 제국의 다음 타겟이 되던지, 아니면 제국과 야합하여 살아남던지.”

그 말에 루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각 구역 체크 완료. 기체 상태 이상 없음. 발사 준비 완료.]

잔스카르의 거취를 두고 얀과 루미가 대화하는 사이, 발사 준비를 완료한 아크의 추진기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추진 제어 보조기능 활성화. 동조율 이상 없음. 해당 AI에게 관련 데이터 전송.]

[데이터 수신. 협조에 감사하네.]

담담하게 전해진 감사에 닐의 목소리가 화답했다.

[최후의 방주에게 행운이 있기를. 아크, 엔진 점화.]

발사 과정의 세부 조정을 담당한 닐의 인도에 따라, 아크의 추진기가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쿠오오오오-!

[점화 확인. 고정 해제.]

[이민선 아크, 발진.]

두 AI가 주고받는 짧은 신호와 함께 아크의 거대한 선체가 수직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인간의 멸망과 새로운 종의 탄생까지.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자는 이제, 그를 만든 이들의 씨앗을 가진 채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상부 장벽, 일시 해제.]

아크의 지시에 잔스카르를 감싸던 장벽의 윗부분이 사라지며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길을 만들어냈다.

[드디어, 억겁의 시간을 꿈꿔온 나의 숙명을….]

북받쳐오르는 아크의 음성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 여~전히 따분하네요. 그놈의 영광, 그놈의 의무, 그놈의 명령.

익숙한 목소리.

광기와 매혹으로 가득 찬 알리에노르의 목소리가 잔스카르의 하늘을 가득 메웠다.

“미친, 이 상황에?!”

[파일럿 위치 확인. 전투 대기중.]

얀의 침음성에 곧바로 그의 등 뒤에 나타난 글레이프니르가 조종석 해치를 열었다.

“저, 저거 뭐야?!”

“장벽 위에 떠 있는 게….”

“콜로서스?”

색색으로 빛나던 장벽의 윗부분이 사라진 곳.

그곳에는 날개를 펼친 흰 색의 콜로서스, 흐레스벨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는…!]

당황한 듯한 아크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흐레스벨그의 몸체가 아크를 향해 내리꽂혔다.

한 손에는 거대한 랜스를 쥔 채였다.

“안돼-!”

마치 비명과도 같은 루미의 한 마디가 들려왔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쿠콰콰콰쾅-!

하늘에서 내리꽂힌 흐레스벨그의 거체는 순식간에 아크의 선체를 수직으로 꿰뚫었고.

[아아….]

힘없는 목소리와 함께 아크의 선체는 불길에 휩싸인 채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잔스카르 시민 여러분~!

하늘을 가득 메우는 발랄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경에 그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레스벨그a2. 편대 링크 활성화. 2번에서 15번까지 생체 cpu 직렬 연결 완료.]

한 대씩, 한 대씩.

점차 수를 늘려가는 흐레스벨그가 날개를 펼친 채 잔스카르 수도를 감싸듯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그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닐.”

[적성병기의 전력평가 완료. 전투 회피가 권장됨.]

전투를 만류하는 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얀의 상태를 확인한 렌은 고개를 내저었다.

알리에노르는 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흉.

조종간을 쥔 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바일사르와 알프라이아 사이에서 박쥐 노릇을 한 대가입니다!

그 말과 함께 맨 위에 올라간 기체가 손을 들자, 그들이 들고 있는 랜스가 열리며, 그곳에서 하전입자포의 포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 포대, 방열 완료.]

조종석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입가를 비틀어 미소지은 알리에노르가 확성기를 향해 신나게 외쳤다.

- 제국의 의지 표명으로써 무력시위를 시작합니다! 제국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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