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역사.
거대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것도, 그리고 그것을 품고 있는 이 공간도.
거의 시가지 하나를 다 품을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유선형으로 뻗어있는 흰 색의 거대한 배였다.
배? 물고기? 굳이 빗대자면 고래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자신을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에 얀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넌 뭐지?”
그렇게 말하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그대의 AI가 알려준 대로일세.]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답답하다는 듯 추궁하는 얀의 모습을 보자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승자의 칭호를 받았으나,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아크라고 불린 목소리는 그렇게 말한 뒤 렌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연유로 고르게 된 것인가?]
그러자 렌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래. 그대는 끝까지 우리와는 다른 길을 갈 생각이군.]
“너흰 걷지 않았어.”
[그래. 지금에 와서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네.]
알 수 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렌과 아크를 보며 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것을 보고 있던 루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발두르를 잠재울 방법을 원하고 있어요.”
발두르.
그 이름이 나오자 아크의 목소리가 에다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래. 발두르. 그는 원래대로 돌아왔는가?]
‘그? 인격이 있단 말인가?’
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어두운 표정을 한 루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능은 회복했을 뿐, 여전히 성황의 꼭두각시입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전장 5KM]의 거대한 함체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르르….
낮게 깔리는 진동음.
마치 노인의 한숨, 한탄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격도, 자아도 거세당한 채, 수호자의 의무만을 다하고 있는 나의 친구여….]
그렇게 읇조리는 아크의 목소리를 들으며 얀이 입을 열었다.
“발두르를 수리한 건 잔스카르가 아닌 저 녀석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건가?”
얀이 그렇게 말하자 루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조물의 왕이 부탁하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았네.]
그렇게 말하는 아크를 향해 얀이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죽어가는 친구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없겠는가.]
그 말에 얀은 입을 다물었다.
친구.
죽어가는 친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기에, 얀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앞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이젠…. 방법이 없군.]
그렇게 읊조린 아크가 얀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 몸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보여주지.]
차분한 음성과 함께 거대한 공동에 다시 진동음이 들려왔다.
구우우웅-!
이윽고 거대한 함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얀의 눈앞으로 내려왔다.
[생체단말은 이 구역에 출입할 수 없네. 홀로 들어오게.]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얀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계단에 몸을 실었다.
푸쉬이익-!
공기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에는 벽이 있었다.
마치 도서관과 같은 수많은 수납공간에 빼곡히 들어찬 유리관.
그 수가 적어도 수십만은 되어보였다.
“이게 뭐지?”
그렇게 묻자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인류의 유전자 샘플 64만 개체. 그리고 배양장치일세.]
그렇게 말하자 얀의 왼쪽 시야에 영상이 들어왔다.
시험관에서 꺼낸 핏줄과 같은 것이 기계장치에 들어가자, 그것이 점차 태아의 모습으로 변하고, 곧이어 갓난아기, 성인 남성의 몸으로 변하는 과정이.
“…그래서. 내게 부탁할 일이 이건가? 이들을 부활시키라고?”
끓어오르는 혐오감에 얼굴을 찌푸린 얀이 그렇게 물었지만, 아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 종자를 퍼트리고, 키워서.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라. 그렇게 말할 셈이라면…!”
[의무를 간직한 동포들이라면, 예외없이 그렇게 말했겠지.]
그렇게 말한 아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얀의 눈앞에 다른 문을 열어보였다.
[직접 보는 것이 빠르겠군. 들어오게.]
그렇게 말한 아크의 지시에 따라, 얀의 발밑에 자그마한 화살표가 생겨났다.
[인류의 멸망. 그리고 자네 종족의 탄생까지. 그 역사를 목도하게.]
***
얀이 거대한 공동에 들어서자, 빛과 함께 나타난 영상이 얀의 사방을 비췄다.
[고블린, 오크, 엘프. 각각 노동, 군사, 미용을 위해 만들어진 세 종류의 인공생명체에 의해 인류는 전에 없던 번영을 맞았지.]
“성서대로군. 고대인이 이종족을 만든 건가.”
그 말과 함께 얀의 눈앞에 인체 모형도가 나타났다.
“…이게 이종족? 아인종이라고?”
그렇게 말한 얀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블린이라 표시된 생물은 그저 키 작은 인간에 불과해보였고, 오크 또한 상체 근육이 발달한 성인 남자. 그리고….
“미용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마치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아름다운 외모를 한 인간을 보며 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새 노동력을 확보한 뒤 만들어진 것이 인류 연방일세.]
그 말과 함께 얀의 눈앞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웃음으로 가득한 그 남자의 뒤편에는 대륙 지도가 그려진 푸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국가의 존엄과 정체성을 주장하며 그것을 반대하는 이들은 오크의 손에 사라졌고, 고블린의 손에 의해 도시는 빠르게 건설되었지. 그들의 희생 덕에, 인류는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네.]
한 톨의 먼지도 없이 깨끗한 도시.
사람들은 아무 근심 없이 온갖 유희를 즐기고 있었고, 오크와 엘프들이 그 시중을 들고 있었다.
[노동에서 해방되며, 국경이 사라지고, 분쟁이 사라져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시대. 그렇기에 모두가 외쳤지.]
인류에게 영광을.
새 시대에 영광을.
고대인의 유물을 상대하며 수십 번은 들었던 그 말에 얀이 코웃음 쳤다.
그의 조소에 응하듯, 화면 속 인간의 세상은 점차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제국이 영원하지 않듯이, 이들의 평화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팽창하는 인구와 그 수요를 맞추기 위해 더더욱 증가하는 피조물의 수. 이를 버티지 못한 인류연방은 외우주 거주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중력 공간에서 움직이는 건축물을 보자 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을 넘어간다니, 교국에서 알면 난리가 나겠군.”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관이 통째로 산산조각나는 감각에 얀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신앙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적은 처음이었다.
[수십억 명이 거주할 거대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선, 거대한 몸이 필요했지. 그렇기에 인류는 네 번째 피조물을 만들었다네.]
아크의 말에 반응하며 화면이 전환되었다.
새하얀 실험실에 일렬로 누워있는 수백 구의 몸체.
그것을 보던 얀은 조립중인 그것의 몸체를 보며 혀를 찼다.
“콜로서스 골격. 그렇다면 콜로서스는…?”
[그들의 네 번째 피조물, 거인의 뼈일세.]
그리고 그것이, 잔스카르가 콜로서스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고.
이어지는 아크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한 얀의 눈앞에 영상이 이어졌다.
위성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거인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 그것을 홍보하는 이들까지.
[그렇지만 빛이 있다면 그림자 또한 있는 법.]
그 말과 함께 나타난 것은 도시의 지하 깊은 곳에 모여 있는 엘프들이었다.
[인간의 풍요를 떠받들던 피조물들은 세대가 지날수록 지성과 사상을 발전시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네.]
화면 속 엘프들, 그리고 오크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인류의 풍요를 동경했고, 불우한 자신들의 삶을 저주했으며, 이윽고 자신들의 창조주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사건이 벌어진다.]
콜로서스의 거대한 몸을 유지시키고, 식량 없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동력기관, 마력로.
어느 연구자가 개발해낸 미지의 동력기관에 의해 콜로서스 개발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최종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실험샘플을 옮기던 엘프의 몸에 이변이 일어났어.]
마력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에 장기간 노출된 엘프는 마치 작은 마력로를 몸에 지닌 듯 그 힘을 다루기 시작했다.
“마력….”
[지금은 모두가 그렇게 부르지.]
염동력, 불꽃. 수많은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엘프는 인간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에 꼭 걸맞은 존재였고, 곧이어 엄청난 고가의 상품으로써 인간의 부의 상징이 되었다.
[엘프는 개량되지 시작했네. 그들을 사고파는 인간의 수요에 의해.]
엘프 수요를 맞추기 위해 원리조차 해명되지 않은 마력로가 무분별하게 퍼져나갔고, 마력을 지닌 엘프들은 점점 늘어났다.
[품종계량에 실패한 10만의 엘프가 살처분 되었지.]
그 다음 장면에 나타난 것은 시체의 산이었다.
‘이, 이게…! 이게 창조주가 우리에게 한 짓이라고…!’
‘엄마, 왜 여기에…!’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야!’
폐기장에 버려진 동족의 시신을 바라보며 엘프들은 절규했다.
슬픔은 의문으로, 그리고 분노로 바뀌었다.
자신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창조주들에게, 그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외쳤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왜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가치 없이 죽어가야 하느냐고.
그렇게 엘프들은 인간을 죽였다.
이윽고 무기를 든 오크가 그 행렬에 끼어들었다.
최하층에서 죽어가던 고블린들이 기어 나와 사람들을 습격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지.]
세 피조물들은 대표자와 정부, 군대를 만들었고, 인간의 무기를 빼앗아 도시를 파괴했다.
자신들의 영토를 만들고, 왕국을 만들어 독립을 선언했다.
“저 미천한 것들이!”
“방위군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젠장, 저 귀쟁이 새끼들이 어머니를!”
“죽어! 죽어어어-!”
[폭력은 폭력을 낳았고, 인간은 다시 무기를 들었다네.]
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무기들이 생산되었고, 거기에 몸을 실은 인간들은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피조물을 도륙했다.
[수많은 AI가 그 때 태어났었지.]
수가 적은 인간들은 로봇을 만들었다.
감정을 거세당한 채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지성체.
심장과 마음이 없는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장착된 무기를 피조물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렇게 피조물들의 저항이 멎어가던 무렵, 한 엘프가 우주로 올라갔다.
마력을 다루는 특수임무부대의 대장이었던 그는 우주로 올라가, 콜로서스 위성공장으로 들어갔다.
외우주를 탐사하기 위한 수백만 기의 콜로서스와 마력로.
그것을 붙잡은 엘프들은 외쳤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가축이 아니다!”
“우리는 존엄한 생명이다!”
그리고 그 순간, 거인들이 움직였다.
엘프의 마력에 반응하여, 수백만의 콜로서스가 공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대기권을 뚫고, 인간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수백만의 거인이 비처럼 쏟아져, 인간을 벌했다.
그리고 그 거인들이 만들어내던 외우주 콜로니들이 모두 지구로 떨어지며, 온 세상이 불꽃에 휩싸였다.
“이 광경은, 그 때 봤던….”
렌과의 이중동조.
그곳에서 본 환영을 떠올린 얀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탐욕에 매몰되어 멸망한 인류의 역사다.]
얀은 한동안 스크린이 비추는 인류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렌이 그러했듯이, 홀로 선 채 불타는 문명을 바라보았다.
[이후, 이 행성의 주인은 살아남은 피조물들이 되었지.]
얀의 등 뒤에서 아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지하로, 빙하로, 해저로 숨어들어 행성을 되찾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렇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종의 다양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그들은 도태되어 죽어갔고, 수많은 재건시설들만이 남았다.
“살아남은 인간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그렇지.]
“그렇다면 우리들은?”
바일사르와 알프라이아의 전쟁의 원인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물었다.
“엘프가 고대인의 피조물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인간은 뭐지?”
그렇게 묻자 스크린에 나타난 세 종족을 시작으로, 수많은 가계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
그 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낸 얀은 허탈한 듯 웃음 지었다.
[행성의 주인이 된 피조물들은 번성했다. 서로 뒤섞이고, 또 구별되며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어갔지.]
귀가 짧은 이들, 꼬리가 있는 이들, 사자와 같은 갈기를 가진 이들….
원본이 된 엘프와 오크, 고블린이 서로 뒤섞여 돌연변이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다시 분화하고 결합하며 모습을 바꿔갔다.
그리고 그렇게 뒤섞인 돌연변이들 중, 지금의 인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