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43화 (143/186)

143. 베르쿠트 기사단.

내전으로 피폐해진 로렌 영지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까지는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 영주님. 이 내용이…. 정말입니까?”

“예. 확실하게 전해주십시오.”

로렌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얀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주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불의에 꺾여 없어질지라도 자신은 로렌츠의 일원이라는 자의식.

두 달 동안 얀을 두려워하고, 또 증오하던 수많은 로렌 지역의 영지민들을 마주치며 얀이 알아낸 사실이었다.

“영지도 제 기능을 회복했고, 행정 업무도 실무자 선에서 처리되고 있지요. 집사장님께서 총괄업무를 인계받으시면 영주 없이도 운영될 겁니다.”

그렇게 말한 얀은 서한에 자신의 서명을 새기는 것으로 할 일을 모두 마쳤다.

수신자는 제국 아카데미의 기사 지망생, 레온 로렌츠라고 적혀 있었다.

“확실히 레온 님은 케인 도련, 가주님의 종자시고 이름도 이어받았습니다만….”

“문제되는 내용이 있습니까?”

얀이 그렇게 되묻자 집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단지, 저로써는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이어서요. 한 번도 만나지 못하신 분인데, 이런 결정을….”

‘한 번 정도는 만나야 하는 건가?’

집사장의 말을 들은 얀은 서한을 든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한은 직접 전하죠.”

그렇게 답한 얀이 책상에 그 서한을 집어넣은 뒤, 밖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가까운 시일에 아카데미를 방문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영주님.”

집사장의 말을 들은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후우~!”

방을 나서자마자 안도감이 가득찬 집사장의 심호흡 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처음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으니….’

언론에 의해 뒤죽박죽으로 뒤섞이고 부풀려진 얀의 악명 때문인지, 이 저택에서 얀의 존재는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여, 영주님!”

“안녕 하, 하세…. 요….”

하녀들 중 몇몇은 아직도 자신을 보며 말을 더듬을 정도니,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는 아예 체념하기로 했다.

“이젠 제법 익숙해졌어.”

“그런가?”

자신을 기다리는 마차에 오른 얀은 렌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렌 영지의 대로변을 가로질러갔다.

“영주…!”

“베르쿠트 남작…!”

이전과 같은 극렬한 반발은 더 이상 없었다.

얀을 거부하는 것보다 무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법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도착 했습니다. 영주님.”

대로변을 달린 마차가 도착한 곳은 로렌 영지 북쪽에 위치한 평원지대.

로렌츠 기사단의 정비창이 있는 곳이었다.

“허! 드디어 납시었구만.”

마차에서 내리는 얀과 렌을 확인한 드워프 브락이 얀에게로 다가갔다.

“인원들은 도착했습니까?”

“아니. 하지만 출발했다는 무전은 들었어. 조만간 올 거야.”

그렇게 말한 브락은 정비창 한가운데에 세워진 글레이프니르를 바라보았다.

“저 기체. 살아있기라도 한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수시로 들려오는 닐의 음성을 애써 무시하는 얀이 그렇게 되묻자 브락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수리할 때는 그나마 내부 구조라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텄어!”

“허?”

얀의 헛웃음 소리에 브락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장갑판이 아예 열리지를 않는다고! 무슨 등딱지로 들어간 거북이 새끼도 아니고, 두 달 내내 장갑판만 두드리고 있었다니까?!”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브락이 그렇게 말하자 얀의 머릿속에서 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당 지성생물체는 약 12건의 기술정보 도난 전과가 있음. 기체 정보 차단을 위한 조치.]

“…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제국 기사의 제식 기체가 된 에퀴테스가 처음 전선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기술을 도용당했다며 화내던 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근데 이번 기체는 사실상 너도 개발에 참여한 셈이잖아.’

비쿠스 영지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을 기체들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묻자 들뜬 듯한 닐의 대답이 들려왔다.

[해당 기체는 미확인 골격구조에 인류연방의 기술을 접목하는 실험의 일환. 시뮬레이션 결과에 만족.]

‘뭔 차이인데?’

그렇게 머릿속에서 닐과 대화하고 있을 무렵.

“작은 어르신! 저기 옵니다!”

브락을 부르는 정비사의 목소리에 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발소리와 함께 마흔 기의 콜로서스가 정비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이봐. 저거 봐 저거.”

“콜로서스…!”

“문양도, 계급장도 없다니, 그럼 설마…!”

두 달 전 일어난 내전으로 인해 로렌츠의 젊은 기사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떠올린 영지민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흰 천으로 몸체를 가린 마흔 대의 콜로서스가 대로를 따라 움직이고, 하나 둘 모여드는 시민들은 그런 콜로서스를 바라보며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두 달 만에 고향 땅을 밟은 로렌츠의 기사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더 이상 기사라는 칭호도, 로렌츠라는 이름도 없었다.

환호도, 귀환을 축하하는 꽃잎도 없었다.

로렌 영지의 모든 이들은 천천히 걸어오는 자신들의 옛 수호자를 향해 짧은 애도만을 보일 뿐이었다.

쿵-!

이윽고 얀의 앞에 도열한 마흔 대의 콜로서스의 해치가 열리고, 그 안에서 기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색색의 화려한 제복을 입는 다른 기사단의 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은 얀이 입은 것과 같은 검은 제복을 입은 채 얀이 기다리는 단상 앞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오와 열을 정확히 맞춘 것이 아닌, 엉망진창인 대열.

그렇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다 모였나?”

당장 이들을 지휘하는 얀부터가 단상에 걸터앉은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50명 중 10명은 떠났습니다. 나머지 40명. 기체를 수령 받고 고향으로 복귀했습니다.”

생각보다는 낙오자가 많지 않았다.

그 사실에 놀라워할 겨를도 없이, 얀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영지에서 두 달 동안 구르고, 사람 아닌 벌레 취급도 당해보고….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운을 뗀 얀은 천천히 그들을 둘러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앞으로 갈 곳은 아마 그 이상일거다.”

짧은 한마디에 그들 중 몇몇이 마른침을 삼켰다.

“케인과 황제 사이에 있었던 일의 진상은 전부 들었겠지?”

대답은 없었으나, 얀 또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납득을 못한다. 혹은 날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인원들은 말해.”

몇몇 인원들이 주먹을 쥐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커스를 전부 죽이고 나면. 너희들 마음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

사실 황자님이 먼저 입찰했지만, 뭐 어쩌겠어.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얀은 쓴웃음과 함께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 부대, 87독립중대는 소모품이다. 형벌부대, 죄수, 사상범…. 인간 쓰레기통인 내 영지에서 골라온 소모품.”

가차 없는 얀의 한마디에 대원들 몇몇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리고 내 지휘를 받는 순간, 너희들도 똑같은 소모품이 될 테고.”

한 때 기사였던 이들이었지만, 이를 악문 그들은 얀의 통보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 한가지만은 약속하지.”

그들을 보며 웃음지은 얀이 기사였던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벨커스.”

각자의 생각에 잠긴 그들의 시선이 얀에게로 모였다.

“그 수족. 추종자. 관계자. 공범자….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버릴 거다.”

로렌츠의 기사였던 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머금었다.

“마지막 기회다. 떠날 사람은 지금 떠나. 막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 미친 짓에 가담하는 게 오히려 정신 나간거지-!

멀찍이서 그것을 구경하던 87중대원이 외치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얀이 말을 멈춘 지 5분.

이탈자는 아무도 없었다.

“좋아. 그럼 내 훈화는 여기까지.”

그렇게 말한 뒤 얀이 자리를 비켜서자 드워프인 브락이 단상 위로 올라와 그들에게 두툼한 서류를 하나씩 나눠줬다.

“너희들이 비쿠스에서 훈련했던 콜로서스, ‘카발리’에 부착될 고대인의 장비들이다!”

쌍방향 통신기.

전술지도.

사격 통제장치.

열원 감지기.

피아식별장치 등등….

이름마저도 처음 듣는 생소한 용어에 몇몇 이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델타처럼 장갑이나 출력이 월등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설명을 시작한 브락은 계속해서 기체의 단점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에퀴테스보다 얇은 장갑은 스치기만 해도 구멍이 뚫리고, 조종석 보호는 없다시피 하지. 사실상, 살아있는 관이라고 봐도 된다.”

혀를 차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이어지는 브락의 말에 일제히 눈을 빛냈다.

“그렇지만 이걸 한 달 내내 타고 다닌 네 녀석들이라면 알겠지.”

그 말과 함께 브락이 손짓하자 정비창 한 편에 세워진 콜로서스가 몸에 두른 흰 천을 벗겨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글레이프니르를 본떠 만든 듯한 검은 색 몸체와 에퀴테스 이상으로 날렵한 형상.

어깨에 장비된 돌격포는 콜로서스의 키와 견줄 만큼 길었고, 또한 거대했다.

“이 걸어 다니는 관은, 모든 지형을 주파하고, 현존하는 어떤 콜로서스보다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럼 대장님 기체보다 빠른 겁니까?!”

구경중인 대원들이 그렇게 묻자.

“뒤에 저거? 저건 괴물이지 콜로서스가 아니야.”

전에 보니까 아예 진짜로 날아다니던데, 그런 걸 어떻게 잡아?

브락의 말에 몇몇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서 장착될 장비들을 모두 숙달하게 된다면, 내 장담하지!”

그렇게 외친 브락은 가슴을 꼿꼿이 편 채 그들을 향해 외쳤다.

“너흰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콜로서스들을 쥐새끼 잡듯이 사냥할 수 있을 거다-!”

브락의 그 한마디와 함께 마흔 명의 기사, 아니, 콜로서스 조종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그 환호성 사이에서, 브락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들을 콜로서스로 내몰았다.

“지금부터 콜로서스에 전자장비를 부착한다! 기체 가지고 정비창으로 뛰어 와-!”

***

“중대장님 오셨습니까.”

“어.”

단델의 경례를 대충 받아넘긴 얀은 장비 부착이 한창인 정비창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과정 마친 신입들도 충원됐습니다. 이 인원에 콜로서스 수를 생각하면 이건….”

“대대급 인원이지.”

그렇게 말한 얀은 사격 훈련이 한창인 중대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단델.”

“예 중대장님.”

“이제 니가 중대장 해라.”

그 한마디에 잠시 말이 없어진 단델을 향해 얀이 계속해서 말했다.

“애초부터 명목상의 지위였어. 보병 전술은 나보다 네가 더 뛰어나고, 대원들 신임도 높지.”

자신의 지휘를 받는 것보다, 단델의 지휘를 받는 것이 생존율이 높을 것이다.

“그럼 중대장님은….”

“지금 정비창에서 만들어지는 ‘카발리’.”

그렇게 말하는 얀의 머릿속에 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부 정정. 신형 기체가 아닌 생체 CPU탑재형 전투 보조단말로 통칭.]

그런 닐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얀은 말을 이어갔다.

“글레이프니르와의 연결을 통해 성능을 발휘하는 기체들이야. 운용방식까지 확립된다면, 이전 중대 병력으로는 갈 수 없었던 지역을 급습할거다.”

그렇게 말하자 표정을 굳힌 단델이 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그 말에 웃음지은 얀은 품속에서 황후의 각인이 찍힌 명령서를 내밀었다.

“잔스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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