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38화 (138/186)

138. 지금 죽이실 거 아니면 놔 주십시오.

“아, 진짜 이놈의 비.”

짧은 푸념과 함께 회의장 밖으로 나온 얀은 멀어져가는 귀족들의 마차를 잠시 바라본 뒤 품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 필요한가, 백작?”

회의장에서 들었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얀이 그 곳을 바라보았다.

‘딜런 에드월….’

웃는 얼굴의 에드월 백작이 미소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일정이 있으신 게 아닙니까?”

회의가 모두 끝났을 때, 그가 원로파의 새 실세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일정이 있다며 정중하게 그들을 물렸고, 이윽고 자신의 옆에 나타난 것이었다.

“있지. 제국 정계에 새로 떠오른 베르쿠트 백작을 만날 예정이었네만.”

“…전 한 번도 듣지 못했군요.”

그렇게 말하며 표정을 굳힌 얀이었지만, 얀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에드월 백작은 자신을 향해 라이터를 내밀어 불을 켰다.

“….”

“뭐하나 백작? 늙은이 팔 떨어지겠네.”

웃는 낮으로 그렇게 말하는 에드월을 보던 얀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불에 담배를 갖다 대었다.

푸우….

비구름으로 우중충해진 하늘로 올라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던 얀에게 에드월 백작이 말을 걸어왔다.

“자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원로파의 수장 노릇을 하게 되었어.”

“회의에서 발언하신 건 그 보답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얀의 날 선 듯한 목소리에 에드월 백작이 소리없이 웃었다.

“제국을 뒤흔들 백작의 탄생에, 숟가락이나 한번 얹어볼까 해서 말이지.”

숨김없이 자신의 의도를 말하는 에드윌 백작을 바라본 얀이 그를 향해 물었다.

“원로파에 합류하라는 뜻입니까?”

“우린 그걸 강요할 수 없네. 자네가 결정할 일이지.”

그 말에 얀이 미간을 좁혔다.

제국의 귀족사회에 자신을 드러낸 얀은 더 이상 변방의 천출이 아니었다.

고대인의 유산을 다루는 자.

창조주 교단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자.

제국은 혼돈에 빠트리고, 그와 동시에 제국을 혼돈에서 구해낸 자.

내전의 피해로 인해 당장의 세력은 미약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모두 수습하는 순간, 그는 케인 로렌츠에 견줄 수 있는 괴물이 될 것이다.

“지금은 하이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네에게 쉬이 접근하지 못하지만, 곧 나 같은 이들이 몰려들 걸세.”

황제와 로렌츠가 없어진 이상, 벨커스를 위시한 신흥귀족 파벌은 아무 거리낌 없이 세력을 확장할 것이다.

자신들을 제어할 황제도, 원로파를 보호하던 로렌츠도 사라진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가 축배라도 들고 싶을 심정이겠지.

“누군가는 동업을 제안하러…. 또 누군가는 목숨을 구걸하러 자네를 찾겠지.”

“백작님은 어느 쪽이십니까?”

“나 말인가?”

얀의 말에 그렇게 되물은 에드월 백작이 얀을 바라보았다.

“난 자네를 이용하려는 쪽이지.”

“….”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얀은 어느 새 다 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밟았다.

“황제 폐하와 로렌츠를 대신하여 벨커스를 누를 누름돌로써, 자네를 이용할 생각이네. 나도, 황후 전하도 말이야.”

백작의 작위는 허울일 뿐, 이들 역시 자신을 도구로써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자네도 우릴 이용하는 건 어떤가? 베르쿠트 백작. 필요한 모든 지원을 보장하겠네.”

에드윌은 말했다.

다른 귀족들이 이와 같은 제안을 보류하는 이유는, 하이람의 눈치를 살피기 때문이라고.

‘그 말인즉 에드윌 백작, 아니. 원로파는 하이람과 정면으로 대립할 생각이라는 거군….’

이미 황가에 대한 믿음이 깨진 원로들은 더 이상 웅크리고 있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어진 얀의 눈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응시한 채였다.

“지금은…. 그 대답을 드릴 수 없겠군요.”

“음? 어째서인가.”

어두운 빗줄기 속 한 구석을 응시하던 얀이 그렇게 말하자 에드월 백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손님이 와서 말입니다.”

“손님?”

그렇게 되물으며 얀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에드윌 백작이 흠칫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클라우스 황자….”

빗속에서 얀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는 이는 식민지의 총독, 클라우스 13황자였다.

“에드월 백작. 자리를 비켜주겠나.”

수행원도, 호위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비를 맞으며 선 클라우스가 그렇게 말하자, 에드월 백작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켰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일을 저지를 것처럼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제안은 항상 유효하니, 현명하게 판단하길 바라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월 백작은 뒤에서 대기하던 수행원들에게 손짓했다.

자신의 우산을 준비하는 시종 중 하나에게 클라우스의 보좌를 지시할까도 생각했으나, 그의 시선을 느낀 에드월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쏴아아아-

빗속에서 마주본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번엔 편지 없이도 오셨군요. 황자님.”

그렇게 말하며 얀은 빗속으로 들어가 클라우스에게로 걸어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클라우스의 오른손에는 로렌츠에서 살포한 전단지와 신문이 쥐어져 있었다.

얀을 바라보던 클라우스의 눈에 얀의 가슴에 끼워진 훈장이 눈에 들어왔다.

피 묻은 금빛 사자훈장.

케인의 가슴에 끼워져 있던 것이었다.

“케인의 유품인가.”

낮은 목소리의 황자가 그렇게 묻자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백작위를 얻었습니다. 케인 공작의 영지와 기사들도요.”

그렇게 전하는 얀이었지만 케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전단, 그리고 신문의 내용. 사실인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얀이 케인의 시체를 내밀며 포상을 요구했다는 소식은 이미 제국 신문을 통해 퍼진 뒤였다.

‘진상을 말한다 한들…. 지금은 들리지도 않겠지.’

잠시 말없이 케인을 바라본 얀은 사건을 설명하는 대신, 짧게 답했다.

“사실입니다.”

그 순간.

뻐억-!

클라우스의 주먹이 얀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털썩!

아무런 저항 없이 그것을 받아낸 얀의 몸이 빗물로 진창이 된 흙바닥을 굴렀다.

“얀….”

[위험 감지. 파일럿 보호를 위한 원격기동 실시. 기체 도착까지….]

“둘 다 끼어들지 마. 명령이다.”

명백한 적의를 담은 공격에 렌과 닐이 반응했지만, 얀은 손을 들어 그들을 막은 뒤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좀 풀리십니까?”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 얀이 그렇게 말하자 으득, 이를 갈아붙인 클라우스 황자가 곧바로 다가와 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왜 내게 알리지 않았나.”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다시 한 번 클라우스의 주먹이 얀을 후려쳤다.

한 순간에 턱이 돌아갈 정도로 강한 충격에 얀의 몸이 다시 한 번 바닥을 굴렀다.

퉷!

진흙투성이가 된 얀은 말없이 입에서 핏덩이와 함께 산산조각난 어금니가 튀어나왔다.

“이빨은 만들어줄 수 있으려나.”

회의장 문 한구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렌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클라우스가 다시 그를 잡아 일으켰다.

“왜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이런 짓을 벌였어-!”

“알고 계셨다면. 뭐라도 할 수 있으셨습니까?”

그 말에 클라우스가 말문이 막힌 듯 헛숨을 들이켰다.

“죽은 베릭트 황자의 자리를 차지한 당신이 반역에까지 연루되었다고 한다면. 황자님은 살아남으실 수 있었습니까?”

케인이 클라우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

그가 식민지가 아닌 자신의 영지로 향했던 이유를 말하자 클라우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단 말이다! 나의 심복이! 함께 제국을 바꾸자 맹세한 맹우가 누명으로 죽어갈 때! 난 저 안락한 총독부에 눌러앉아 아무것도…!”

“제국은 바뀌었습니다. 오시면서 보신 대로.”

얀의 말에 클라우스가 주먹을 쥐었다.

‘또 한 대 날아오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얀이었지만, 클라우스는 잡고 있던 그의 몸을 끌어당기며 당장이라도 그를 씹어 먹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케인이 없는 제국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럼 그만 두시죠. 황권이고 개혁이고 전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하자 얀을 향해 휘둘러지려던 클라우스의 주먹이 도중에 멈췄다.

“지금의 감정에 휘둘려 목적마저 잊어버린다면, 당신은 저와 함께할 이유도, 그럴 가치도 없습니다.”

흐르는 빗물은 어느 새 두 사람의 머리칼을 흠뻑 적신 채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눈가에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다. 빗물일 것이다.

끊임없이 그렇게 생각하는 얀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클라우스를 마주보았다.

“공작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함께 제국을 바꾸겠다고.”

“……!”

얀의 말에 클라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케인을 죽인 자가 감히 그와 함께 한 약속을 들먹이는가!”

“하시는 꼬락서니를 보니 잊어버리신 것 같아서.”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얀의 말에 클라우스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뻐억-!

얀의 얼굴을 후려친 클라우스가 곧바로 권총을 꺼내 얀의 얼굴을 겨눴다.

“….”

권총을 든 클라우스의 손은 당장이라도 쏠 듯 실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그렇지만 권총을 발사되지 않은 채, 무심하게 얀의 미간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클라우스 또한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다.

얀이 케인을 죽인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얀이 보이는 행보 역시, 로렌츠의 보호가 사라진 사람들을 수습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케인이 죽어갈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그리고 평생의 친구를 잃은 상실감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그에게서 이성을 앗아갔다.

“이제 좀 머리가 식으셨습니까?”

자신에게 겨눠진 권총은 보이지도 않는 듯이 얀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애써 원래의 말투로 돌아온 클라우스 황자가 얀을 노려보았다.

“내 형을 죽인 것도 모자라…. 내 친구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는군.”

“정 참지 못하시겠다면, 죽이시죠.”

얀의 대답에 클라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죽이실 거 아니면 여기까지 하고요.”

그 말에 클라우스는 힘없이 총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쥐어 터트릴 듯 꽉 쥐고 있던 권총의 약실은 처음부터 비어있었다.

“안에 탄이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겨서 죽여 버렸을 걸세.”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얀에게 다가가 진흙투성이가 된 그에게로 다가갔다.

“벨커스를 전부 죽이고 나면, 그 후에는 죽이든 말든 황자님 알아서 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 말. 절대 잊지 말게. 얀 베르쿠트.”

적의를 가득 담은 한마디.

그렇지만 이내 손을 내민 클라우스는 얀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대원들은 모두 자네 영지로 집결했네. 곧 로렌으로 향할 걸세.”

“알겠습니다. 그쪽에서 합류하죠.”

클라우스의 설명을 들은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옷에 묻은 진흙들을 털어냈다.

“아, 그리고.”

고저 없는 얀의 목소리가 클라우스를 부르자 클라우스 황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뻐억-!

얀의 주먹이 클라우스의 안면을 강타해, 그를 진흙탕 속으로 처박았다.

“이게 무, 슨…?”

“이제 제 직속상관이시니, 두 대는 깎아드렸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얀은 등을 돌려 로렌으로 향하는 기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 하하하….”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인지하지 못한 클라우스였지만, 이내 픽 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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