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베르쿠트 백작.
“백…. 작위라니! 그런 말도 안되는!”
태연자약하게 내뱉은 얀의 한 마디에 먼저 분개한 것은 왼쪽을 차지하고 있는 신흥귀족들이었다.
“주제를 아시오 베르쿠트 경! 백작이라는 작위가 어떤 작위인 줄 알고 그 따위 망발을…!”
“제국 건국의 공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공작위. 그리고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백작위이죠. 제 말이 틀립니까?”
“윽…?!”
얀의 반문에 말문이 막힌 귀족이 이를 악물었다.
얀의 말은 과거 부유한 평민이나 외부인들로 시작하여 제국에서 작위를 얻어낸 신흥귀족파들.
그 중에서도 그들 파벌의 수장인 하이람 벨커스를 겨냥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식민지인 루브라-바일사르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을 진압함으로써, 벨커스 공은 백작이 되었죠.”
그렇게 말한 얀은 비어있는 옥좌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폐하를 시해한 범인을 죽이고 정국을 안정시킨 시점에서, 저 또한 비슷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모습을 본 신흥귀족들과 몇몇 원로들마저 치를 떨었다.
“정국을 안정시켜?! 그대가 퍼트린 전단이 제국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와중에 그 따위 궤변을 늘어놓는가!”
“안정시켰죠. 적어도 전 지금 여러분들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한 얀의 한마디에 황후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당신, 지금 뭐라고?”
“전단에 의해 혼란한 상황에서, 제 증언까지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잠시 뜸을 들인 얀이 웃는 낮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는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자 좌중의 귀족들이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세속적인 국가라고는 하나, 제국은 엄연히 창조주 교단을 국교로 삼는 국가.
교단의 인증을 받은 창조주의 계승자가 전단의 내용을 진실이라 말하는 순간….
‘황가의 정통성 전체가 흔들린 순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 상황에 저 자의 증언이 퍼지게 된다면.’
‘세력을 죽이고 숨어있던 민중파들이….’
‘온 제국을 아수라장으로…!’
몇몇 이들은 당혹에, 또 몇몇 이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것을 확인한 얀은 차갑게 웃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감사인사라도 좀 해주십시오. 제가 방금 여러분들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언젠가 클라우스가 말한 적이 있었지.
참 다양하게 불경한 친구라고.
얀이 그 말을 떠올리는 사이 귀족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이 자가 감히…!”
“제국을 만들어 온 우리를 가지고 놀아?!”
그 동안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던 외부인이 나타나 자신들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귀족들의 분노에 찬 일갈이 이어졌지만, 얀은 태연자약하게 왕좌 옆에 앉은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정해주십시오. 황후 전하.”
“…!”
눈앞에 있는 남자는 황가와 귀족 전체에게 협박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경우, 자신은 밖으로 나가 증언할 것이다.
이곳에서 자신의 입을 막느냐, 아니면 제국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느냐.
“저 자를 당장 죽이십시오! 황후 전하!”
“맞습니다! 감히 황가를 향해 세 치 혀를 놀리는 불경한 자를 죽여야 합니다!”
“옳소!”
격한 반응이 튀어나온 것은 신흥귀족 파벌이었다.
출현한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는 신흥귀족은 카르디어스 황제의 구 귀족 밀어내기의 결과로써 태어난 이들이었고, 이들에게 있어서 황가의 정통성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신흥귀족 파벌은 제국이라는 국가보다는 황제라는 개인에게 충성하는 집단.
자신을 심문한 황도군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던 집단이었다.
‘이들을 통해 구 귀족의 잔재를 없애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들로 수뇌부를 채울 생각이었겠지.’
그런 뒤 자신, 아니면 다른 꼭두각시를 이용해 하이람을 제거한다면 그의 통치는 완벽해졌을 것이다.
‘황제 본인이 사라진 시점에서, 이 계획은 끝났지만.’
한 명의 절대권력이 다스리는 국가의 최대 단점은 그 절대권력 자신이다.
성군, 암군, 폭군.
통치자의 성향에 따라 수십, 수백, 수천만 명의 운명이 결정되는 불안정한 체제.
고대인의 기술을 얻은 황제는 건국자인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그것을 보완하려 했다.
‘죽지 않는 성군의 나라라….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
죽은 황제를 비웃은 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차분한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언행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으나, 이치에는 맞는 말입니다. 황후 전하.”
방금 전 황후를 향해 원로원을 대표해 입을 연 남자, 딜런 에드월이었다.
“제국 함대를 교란하던 백상어, 수정도시 조사권, 식민지의 반란까지…. 제국의 어느 군대도 내지 못한 성과들을 보이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 사료됩니다.”
그 말을 들은 황후가 미간을 좁혔다.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속내는 따로 있군.’
그렇게 생각한 황후는 더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케인 로렌츠와 그의 가문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기사들이 소실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벨커스 가문의 기사들이지요.”
거의 내전에 가까울 정도의 병력을 동원한 소탕전.
상대편 파벌의 동조를 확인한 딜런 백작이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어갔다.
“제국 기사단의 한 축인 벨커스가 손실을 입은 바, 그 공백을 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위해, 이 기사에게 작위와 영지를 내려야 한다?”
“맞습니다.”
딜런 백작의 말에 얀을 둘러싼 귀족들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각자 머리를 굴리느라 바쁘군.’
그렇게 생각한 얀은 딜런 백작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 자의 말 덕분에 생각 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 듯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미심쩍었다.
‘왜 하등 상관없는 날 돕는 거지? 무슨 이익이 있길래?’
대가없는 선의는 없으며, 이유 없는 악의도 없다.
누군가가 버릇처럼 되뇌던 말을 생각해낸 얀이 그를 주시했지만, 딜런 백작은 황후를 향해 입을 열 뿐이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로렌 영지를 누가 맡게 된다 한들, 반발을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로렌 영지는 사실상 옛 로렌 공국을 격리시켜 놓은 자치구역.
영지의 주인이 죽은 뒤 제국 출신의 인사가 통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베르쿠트 경은 죄수로 가득한 비쿠스 영지를 훌륭하게 안정시킨 바, 이 상황을 해결한 적임자라 사료됩니다.”
범죄자들을 격리시켜놓은 무법지대에서 왕처럼 군림한 것이 얀 베르쿠트.
그 사실을 떠올리자 황후 또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황후 전하!”
이대로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은 원치 않았는지, 신흥귀족 파벌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쿠스 영지는 그 크기는 광대하나, 50명의 중대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인구가 희박한 영지입니다. 헌데 그 영지의 병력에게 옛 공작령을 맡기게 된다면….”
그 말을 끊은 것은 얀의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제 기사단을 요구한 것입니다.”
“…병사를 달라. 그 말인가?”
황후의 되물음에 얀은 고개를 저었다.
“병사들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사들도요. 필요한 것은 전하의 승인뿐입니다.”
그 말에 황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로렌츠 기사단의 잔당이 당신의 영지로 흘러들어갔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군요.”
“제국 전역에 퍼트리는 것 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 말에 몇몇 신흥귀족들이 발끈한 듯 몸을 일으켰으나, 황후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반역자의 부하였던 자들을 다시 기용하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나 기사의 신분이 아닌….”
잠시 말을 멈춘 얀이 슬쩍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제 휘하의 형벌부대로 말이지요.”
그 말에 장내가 순식간에 웅성거렸다.
“로렌츠의 기사들을 형벌부대로?”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기사였던 이들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좌중의 귀족들을 바라보며 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기사의 신분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 부대는 형벌부대. 그들을 제 부대로 전입시켜 투입한다면, 충분한 처벌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력을 지닌 기사들이 얀의 휘하로 들어간다.
황제가 공인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집단이 한 순간의 얀의 휘하로, 형벌부대 출신의 기사 아래로 내려간다는 뜻이었다.
‘호오, 단순히 출세에 미친 괴물인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로렌츠의 사람들을 지키는 건가.’
원로원의 최연장자인 그가 얀을 바라본 순간, 얀 또한 그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
자신을 떠보는 듯한 눈빛.
그것을 알아챈 에드월 백작은 헛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래. 내 도움을 의심하며 몸을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용해먹을 생각이군.’
당돌한 친구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분명…. 제국 군인에게 내려지는 처분 중에 블랭크(Blank) 라는 징계가 있었지요?”
그렇게 말하며 원로원 중 한 명을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원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3성 장군의 계급장을 달고 있는 노장이었다.
“본래는 직위만을 해제한 뒤 종군케 하는 징계이지만…. 그 죄가 역모일 경우에는 신분, 직위 등 모든 것이 박탈되지요.”
반역의 죄를 썼다 하더라도 그들은 기사.
심지어 제국 최강의 기사라 불렸던 로렌츠의 기사들이었다.
죽일 바에는 차라리 최전선에 내세워 싸우다 죽으라 하면 되지 않겠느냐.
“흐, 흐음….”
“전선에 공백이 심해진 것은 사실이니….”
“이미 전단이 퍼진 마당에, 이 이상 시민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이람 공의 지시가….”
신흥귀족 파벌의 귀족들이 하나 둘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딜런 백작이 흡족한 듯 웃어보였다.
‘황제와 로렌츠가 사라지니, 가려져있던 이들이 머리를 내미는군.’
같은 원로파의 체면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적을 동조시키는 특유의 화술.
원로파의 최연장자라는 직위에 걸맞게, 딜런 백작은 자연스럽게 좌중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하이람이 이 자리에 없기에 가능한 일인 걸까, 아니면….’
황제라는 절대 권력과 로렌츠 공작가의 세력에 눌려있던 다른 원로들이 하나 둘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얀은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면 다른 분들도 이의는 없으신 건가요?”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황후가 그렇게 묻자 원로파는 일제히 긍정의 뜻을 비췄고, 신흥귀족들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등관을 막을 만한 마땅한 논리를 생각해내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의결하겠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황후가 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국의 공적인 케인 로렌츠를 제거한 공을 기리는 바, 기사 얀 베르쿠트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며, 그와 동시에 로렌 영지의 관리 권한 또한 이관합니다.”
황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함께 근위병 두 명이 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황도군 출신인가? 표정 관리 좀 하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험악한 표정을 한 근위병들은 굳은 얼굴로 얀을 향해 인장을 내밀었다.
제국의 백작임을 상징하는 사자의 문양이 조각된 도장이었다.
“기사 얀 베르쿠트. 황후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반란에 가담한 로렌츠 가문의 기사들은 신분과 작위, 계급을 박탈. 죄수의 신분으로 얀 베르쿠트 백작의 87 독립중대로 배치합니다.”
황후의 말로써 형벌이 확정되자, 기사단 출신의 원로들 사이에서는 이따금씩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제국 최고의 기사단에서 형벌부대의 소모품으로 강등된다니.
기사된 자로써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적인 처사였다.
“이로써 얀 베르쿠트 경은 공식적으로 제국의 귀족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 말과 함께 귀족원의 귀족들이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케인의 목숨을 대가로…. 하이람과 대등한 위치까지 올라왔군.’
인장을 쥔 손은 당장이라도 그 안에 있는 백작의 인장을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얀은 애써 그것을 억누른 뒤 박수를 보내는 귀족들, 그리고 중앙에 선 황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형벌부대의 진창에서 기어 나와, 귀족원의 일원으로써 제국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베르쿠트 백작이 제국에 나타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