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제가 계승자입니다.
쿠르르르-!
알현실 중앙으로 통하는 거대한 문이 열리자 붉은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자 양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저 자가 얀 베르쿠트….”
“알리에노르 공작의 청혼을 거절한 자가 아닌가?”
“식민지에서 베릭트 황자님과 함께 싸웠던….”
“형벌부대…!”
각계각층에서 들려오는 얀에 대한 소식을 중얼거리는 귀족들이 있는가 하면, 그의 출신을 알아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얀을 잠시 바라보던 황후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환관이 그녀를 대신해 질문했다.
“얀 베르쿠트 경. 그대는 케인 로렌츠의 반란 현장에 난입하여, 황제 폐하를 시해한 케인 로렌츠와 교전. 그를 사살했다고 진술했다. 맞는가?”
“맞습니다.”
이미 황도군 장교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내용이었다.
“또한 그대는 케인 로렌츠의 부친, 클로드 로렌츠 노공작의 지시에 따라 이 전단을 퍼트렸다. 이를 시인하는가?”
그렇게 말하며 판관이 들어 보인 것은 황제의 비밀이 적힌 전단지였다.
“시인합니다.”
얀이 그렇게 말하자 그를 바라보던 귀족들이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대는 이 전단의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이것을 퍼트렸는가?”
“예.”
얀이 짧게 긍정하자 귀족들 중 몇몇이 혀를 찼다.
제국 전체를 뒤흔들어놓을 사고를 쳤음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
판관 또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을 찌푸린 뒤 얀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이 전단을 퍼트린 이유가 무엇인가? 상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그 말을 들은 얀의 얼굴이 깊어졌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는군.’
환관이 유도한 대로, 강요에 의한 행동이었다고 한다면 얀의 죄는 감형된다.
동시에 귀족들 사이의 반발도 누그러지고, 원로파의 반발수위 또한 낮출 수 있겠지.
그렇지만 얀의 머릿속에는 케인의 마지막 말들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난 자네를 통해 세상을 바꾼 걸세.’
그 한마디.
그것이 상관으로써, 자신을 케르단에서 끌어올린 은인으로써 내린 최후의 명령이었다.
“아니오.”
환관. 아니, 그 뒤에 앉아있는 황후의 얼굴.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기족들의 면면을 살핀 얀이 입을 열었다.
“전단에 적힌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나지막이 이어진 한 마디.
얀의 그 말과 함께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저 자는 지금 황실을 능멸하고 있다!”
“아니! 황실이야말로 제국의 근간을 능멸한 것이오! 몸을 갈아타다니! 어찌 그런 말도 안되는…!”
“일개 기사의 헛소리입니다 황후 전하!”
“원로파의 사주인가?! 어서 바른대로 고하라!”
임계에 다다른 폭탄이 터지듯 순식간에 억눌러왔던 발언들을 쏟아내는 양 파벌의 귀족들을 한 번씩 바라보며, 황후는 주먹을 쥐었다.
“모두 정숙하세요.”
하이람과 클로드.
양측의 구심점이 자리에 없는 이상, 과열된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것은 옥좌 옆에 앉은 황후 뿐이었다.
예상대로 그녀의 한 마디에 목소리를 낮춘 귀족들이 하나 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얀 베르쿠트.”
“예. 황후 전하.”
얀의 이름을 부른 제 1 황후가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생각이죠?”
입증할 수 있을 리 없다.
교국으로 간 케인 로렌츠가 그곳에서 무었을 봤던, 주동자인 케인과 클로드가 죽은 이상 눈앞에 있는 얀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를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저 자는 형벌부대 출신의 천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원로원이나 귀족들이 귀 기울일 일은 없지.’
지금 이 순간에도 얀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귀족들이 있었다.
신흥귀족파와 원로파 양측 모두에게.
그것을 알아챈 황후의 발언에 얀이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황제 폐하가 사용하던 기술은 고대인의 기술입니다.”
얀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함께 원로원의 좌석에 앉아있던 작은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 고대인의 콜로서스를 다루는 기사.”
전장을 겪었던 귀족들.
그리고 그곳에서 얀의 모습을 보았던 귀족들은 그 말을 들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교국이 인정한 ‘천사’의 선택을 받은…. 계승자입니다.”
“….”
“….”
잠시 동안의 정적이 회의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금 뭐…. 라고?”
“계승자? 천사? 내가 지금, 신학 강의를 듣고 있는 건가?”
몇몇 귀족들이 짐짓 태연한 척 비웃음 소리를 내었지만, 이내 그마저도 사그라들었다.
“저 분의 말씀에 거짓은 없습니다.”
귀족회의장의 한 편에 마련된 새하얀 의자.
그곳에 앉아있는 것은 제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초대된 창조주 교단의 추기경이 앉는 좌석이었다.
“미리안 추기경…!”
황성 내부에 설치된 창조주 성당을 관리하는 추기경 미리안은 품에서 교황의 증표를 꺼내들며 입을 열었다.
“저 분은 켈트 교국의 교황, 호르헤 라피스님이 인정하신 창조주님의 계승자요, 교국의 손님입니다.”
손님.
교국 내에서는 교황과 같은 권위를 지니는 칭호였다.
“하! 아무리 교황 성하의 인증이 있다 하더라도, 이곳은 제국입니다. 교단의 귀의한 사람뿐만이 아닌 모두가 납득을 할…!”
뒤이어 뭐라고 더 반박을 하려던 귀족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어느샌가 나타나 얀의 옆에 선 렌.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황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디아나…. 렌…!”
“황가의 일원인 당신이라면, 내 정체도 알고 있겠지.”
제국의 제 1 황후를 향해 이어지는 반말.
마치 친구를 대하는 듯한 그 격의 없는 태도에 귀족들 중 몇몇이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저 여인이…?”
“성서에 나오는 천사? 창조주…. 고대인을 돕이 위해 만들어졌다던…?”
“영원한 삶을 사는 이들….”
앞에 나선 렌의 복장이 변하기 시작했다.
상복과도 같은 검은 드레스가 마치 물에 녹아 흩어지듯 풀어지며,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위장을 위해 검게 물들인 머리 또한 흰색으로 물들며, 그동안 숨겨왔던 새하얀 소녀의 모습이 제국 귀족들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저 모습은…!”
“할아버님께 전해들었던…!”
점점 변해가는 렌의 모습을 보며 원로원들 중 몇몇이 헛숨을 들이켰다.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새하얀 옷.
그리고 완전히 풀어져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무기질적인 옥색 눈동자까지.
그들의 가문에 전해내려오는 천사의 이야기, 혹은 목격담, 혹은 비밀.
구전되던 수많은 이야기에서 묘사되던 것과 꼭 닮은 여인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저 자란 말인가요? 당신이 선택한 자가?”
황후가 그렇게 묻자 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국 추기경의 인증과 눈앞에 나타난 진짜 천사.
그리고 그녀를 존대하는 황후의 태도까지.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은 그것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국 초대 황제, 바일사르 1세는 황성 지하에 잠들어있는 인류의 시설을 이용. 자신의 인격을 다른 몸에 옮기며 살아가고 있었어.”
렌의 그 한마디에 원로원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동시에 신흥귀족들에게서는 탄식이 나왔다.
눈앞에 있는 남자, 얀 베르쿠트.
그는 고대인의 피를 물려받은 계승자다. 그것을 부정할 방법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의 진술에 거짓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황후 전하.”
정적을 깨며 입을 연 것은 원로원의 늙은 귀족이었다.
“최초의 맹약이 거짓이었다고는 하나, 제국을 함께 만들어간 제국 신민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은 바.”
그렇게 운을 떼며 옥좌 옆에 앉은 황후를 바라본 것은 딜런 에드월 백작이었다.
“본 원로는 계속해서 제국을 위해 헌신하겠나이다.”
원로원 중 최연장자인 그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다른 원로원들 또한 황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대들의, 헌신에…. 감사하오.”
황후 역시 더 이상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듯, 원로들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마치 지나간 과거는 잊고 새로 시작하자는 듯한 어조.
그렇지만 고개를 숙인 원로들의 눈을 본 얀은 황후와 귀족들을 번갈아보며 쓴웃음 지었다.
‘다른 파벌일지언정, 같은 제국인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던 이전과는 달리…. 완전히 남을 보는 듯한 눈이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얀 뿐만이 아닌 듯 했다.
“….”
“….”
고개를 숙인 원로원들을 바라보는 신흥귀족 파벌들의 눈 역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이후의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반 대중과 언론에게는 전단의 내용을 최대한 은폐하며 안정을 도모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제국의 후계자를 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힘써주길 바랍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신흥귀족들과 원로들의 기싸움 사이에서, 황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뿐.
황실의 권위는 이 순간에도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럼 전하. 마지막 안건이 남아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귀족들의 회의를 지켜보는 얀을 힐끗 살펴본 환관이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황후의 시선이 얀의 왼쪽 가슴을 향했다.
케인이 이전에 황제로부터 받았던 금빛사자훈장.
금색으로 칠해진 사자의 얼굴은 붉은 핏자국을 지우지도 않은 채 옥좌 옆에 앉은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다음은 너냐.’
마치 이렇게 위협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훈장은, 케인 로렌츠의 것인가요?”
회의의 안건과는 하등 상관없는 질문이었지만, 그것을 본 황후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맞습니다.”
얀이 짧게 긍정하자 하이네 황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를 시해한 반역자의 훈장을, 제국의 귀족들이 참석하는 회의장에 차고 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
그렇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서늘한 독기를 감출 수는 없었다.
“음….”
이번만큼은 귀족들 또한 황후의 질문 앞에서 말을 아꼈다.
눈앞에 있는 것은 황제의 제 1 황후.
저 훈장의 주인에게 남편을 잃은 여인이었다.
“증명입니다.”
“증명?”
이어지는 얀의 대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하이네 황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제국을 전복하려 한 공작을 죽인 증명. 그리고 저와 제 부대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필요하다는 증명입니다.”
반역의 죄를 뒤집어썼다 해도, 케인 로렌츠는 그의 직속상관이다.
그의 추천이 없었다면 얀 자신은 케르단 전선에서 나올 수도 없는 운명.
그럼에도 귀족회의에 나타난 이 남자는 그들에게 자신의 은인을 죽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이…. 런…!”
“아무리 반역자라지만, 이런 자를 부하로 뒀단 말인가?”
곳곳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얀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마지막 안건 또한 그대에 관한 안건이니. 뭘 원하죠?”
그렇게 말하는 황후를 잠시 바라보던 얀은 주먹을 꽉 쥐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로렌 영지의 통치권과 기사단. 그리고 백작위를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