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30화 (130/186)

130 공작이 아닌 왕으로서.(2)

쿵-!

황성 입구를 지키는 황도군의 콜로서스가 세로로 두 동강난 채 바닥에 쓰러졌다.

- 케인 로렌츠?!

- 로렌 영지에 있는 것이 아니었나?!

제국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다섯 기의 에퀴테스급 콜로서스.

그들의 어깨에는 로렌츠 가문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 황궁 심층부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그곳에 황제의 본거지가 있어.

- 그런데, 빨리 가기는 글러먹은 것 같습니다.

황성 내부에서는 돌격포를 사용할 수 없다.

온갖 원로와 귀족들의 거처.

그리고 황제가 살고 있는 바일사르 시내에서 오발사고가 터진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쿠콰콰쾅-!

그렇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런 상식을 모조리 뒤엎듯, 황도군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황궁을 향해 돌격포를 난사하고 있었다.

- 제길, 황족들은 어찌 되는 상관없다는 건가?!

- 상관없겠지. 황제 입장에서 황족들 따위는 다시 만들면 그만일 테니!

제국의 황족은 바일사르 제국에서는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과 같았다.

황제의 피를 받은 이들은 그 자체로도 계승권을 지니기 때문에, 권력을 노리는 귀족들은 그들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젠 아니었다.

황제에게 있어 황족이란 자신의 대체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

예비 육체를 만들어내는 공장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 가주님. 먼저 가십시오.

쿵-!

일제히 방패를 세운 네 명의 기사들이 케인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 전부 처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네 기사들을 보며 케인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마나 링크덕에 여기까지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지만, 그게 없다면 이들은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 알겠네. 곧 돌아오지.

그렇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인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다들, 고마웠네.

그렇게 말하며 그들을 지나쳐갈 때마다, 기사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 언제나 저희의 영웅이셨습니다.

- 긍지를 잊지 마십시오. 가주님.

- 당신이 저의 왕이었습니다.

짧은 작별인사. 케인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쿵-!

굉음과 함께 땅을 딛고, 케인이 탄 에퀴테스가 황궁으로 쏘아져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막아선 황궁 문 앞을 바라본 네 명의 기사들.

- 허이구. 이것들 좀 보게.

- 중앙군을 전부 중부전선에 쏟아부었는데, 이런 여력이 남아있었단 말이야?

그들의 눈앞에는 마흔 대의 콜로서스가 돌격포를 겨눈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성벽에 에퀴테스! 당장 포격을…! 크아악?!

- 화력이 너무 거셉니다!

사방으로 포위된 로렌츠 저택이었으나, 배수의 진을 친 로렌츠의 기사들의 저항은 상상을 초월했다.

쿠콰쾅-!

- 젠장, 성벽을 뭐로 만들었길래 아직까지…!

- 돌격! 돌격해!

각지에 흩어진 로렌츠의 기사들을 긁어모았다고 해도 로렌 영지에 모인 콜로서스는 약 100기.

그에 비해 벨커스가 이들을 무너트리기 위해 데려온 기사의 수는 300을 넘어섰다.

평지에서 이루어지는 전투였다면 진작에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사라져버렸을 병력 차이.

그렇지만 만전의 준비를 해 온 벨커스의 기사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이곳은 로렌 영지였다.

- 뒤에서 나타났습니다!

- 젠장, 미친 놈들이 민가를 뚫고…!

모든 로렌츠의 기사들은 이 영지를 누비며 콜로서스를 배웠고, 기사로서 수련 받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성벽에서 보냈다.

미로처럼 얽힌 건물들과 장벽, 그리고 엄폐물.

저택 부지 사이사이마다 들어찬 비밀통로들은 저택 내부로 진입한 벨커스의 기사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에 흩어진 기사들은 어떻게 되었나?”

전투의 양상을 지켜본 클로드가 그렇게 묻자 집사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케인 가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일부는 수도로, 나머지는 비쿠스 영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먼저 출발한 정비사와 기술자들도….”

“좋아. 그럼 여기 있는 친구들은 모두 내 저승길 동료로군.”

그렇게 말한 클로드가 등을 돌려 광장으로 걸어갔다.

- 노공작님.

- 20년 만에 지휘를 받는군요.

- 다시 한 번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클로드 역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네들도…. 그 때 그 시절 그대로군.”

벨커스와 로렌츠 간의 결투가 한창이던 시절, 자신과 함께 수십의 기사를 도륙 냈던 노기사들.

세월의 흐름에 풍화되었을지언정, 그들의 눈에 담긴 투지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자! 우리 늙은이들이 활약할 때가 드디어 왔다!”

그의 외침에 남아있던 기사들의 콜로서스가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이 곳에 모여 있는 로렌츠의 기사들은 대부분 마흔을 넘긴 베테랑, 혹은 노익장들이었다.

- 우리가 이곳에서 스러진다 해도!

- 뒤를 이어갈 젊은 기사들이 있을지니!

구우우웅-!

마력로가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한 기의 콜로서스가 몸을 일으켰다.

로렌츠의 인장이 새겨진 망토를 두른, 콜로서스.

클로드 로렌츠의 콜로서스인 철기사였다.

- 87독립중대가 내부의 콜로서스를 제압하고 있다! 성벽을 막아라! 그 누구도 우리의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라!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진 클로드의 한 마디에 고무된 기사들이 일제히 기세를 올렸다.

- 가자!

- 성 안에서 교관 노릇만 하려니 좀이 쑤시던 차였지!

- 노공작님을 따르라! 로렌츠를 위하여!

그렇게 저택에 남아있던 콜로서스들이 성벽을 향해 움직이는 사이, 저택 부지 내부로 들어온 벨커스 기사들은 마치 유령이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 이, 이런 미친?!

- 기체가 말을 안들어! 어째서…?

갑작스럽게 힘을 잃고 쓰러진 동료의 콜로서스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하나 둘 기어오르고 있었다.

카가가가가각-!

고속으로 회전하는 톱날이 조종석을 보호하는 콜로서스의 장갑판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87독립중대원들이 쏜 총탄이 빗발쳤다.

- 보병?! 말도 안 돼! 어떻게 콜로서스를…!

투다다당-!

바로 옆에서 동료들이 죽임당하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력로에 마력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조종석에 가해지는 엄청난 진동에 곧바로 속을 게워내야 했으니까.

“A포인트, 2기 무력화. 기사 한 명 사살했습니다.”

[좋아. 아이린은 그대로 왼쪽 건물 문 앞에서 대기. 30초 후에 페이지 콜로서스가 한 기 지나간다.]

무전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단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87독립중대원들이 곧바로 나머지 한 기를 향해 달려갔다.

“젠장, 젠장! 형벌부대 버러지들이 이 따위 비겁한 수를…!”

억지로 열린 조종석 해치 사이로 내밀어진 총구를 보며 그렇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어으, 씨발 토사물 냄새.”

“기사님도 속은 우리 버러지들이랑 별 다를 바 없나보지?”

짧은 조롱과 함께 기관총의 총탄이 기사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무력화된 두 대의 콜로서스.

중대원 네 명의 목숨을 대가로 만들어 낸 성과였다.

- 이 버러지들이 감히 기사를…!

이윽고 단델이 말한 시각에 정확히 도착한 콜로서스가 중대원들을 향해 기관포를 겨누는 순간.

- 어딜!

쿠콰앙-!

옆의 2층 건물이 통째로 터져나가며 그 사이에서 아이린의 에퀴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어느 새 반대편에…!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잠시.

으지직!

곧바로 찔러들어온 아이린의 검이 저항하려던 페이지의 조종석을 짓뭉갰다.

“내부에 침입한 인원들은 전부 정리했습니다. 외곽 방어에 합류하겠습니다!”

[확인. 나머지 병력들 인원보고.]

무감정을 연기하는 단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대원들이 곧바로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50번, 32번, 11번, 29번. 소실했습니다. 무기는 회수했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무전기에서 짧은 답신이 흘러나왔다.

[…확인. 클로드 노공작님의 의뢰에 따라, 전 부대원은 작전플랜 C를 실행한다. 임무 기간은 1주…. 반드시 살아돌아와라.]

“…수신 양호. 확인했습니다.”

“합류지점에서 뵙죠.”

그렇게 말하고 수신호한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위치로 달려갔다.

쓰러진 네 명의 대원들의 시신에서는 형벌부대의 낙인과 군번줄을 회수해 간 상태였다.

“이 난장판을 두고 혼자 내빼야 한다니.”

“양동작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전투가 한창인 로렌 저택의 한 구석.

네 개의 거대한 추진기를 단 날개가 글레이프니르의 허리에 끼워맞춰지며, 연결부 곳곳에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가 수리 88% 완료.]

“비행보조 프로그램도 끝났어. 가능해.”

그 말을 들은 얀은 목덜미에 연결된 글레이프니르의 시야로 고개를 들었다.

촤르르륵-!

눈앞에 수평선과 함께 기울기와 고도를 나타내는 인터페이스가 나타나고, 곧바로 비행경로를 표시하는 선이 나타났다.

[인터페이스 업로드 완료. 엔진 점화.]

쿠오오오오-!

동력을 연결한 검은 날개에 불이 들어오며, 추진기에서 내뿜어진 불꽃이 로렌츠 저택의 돌바닥을 태우기 시작했다.

- 뭐야?!

- 폭탄이 터진 건가?! 이 소리는 대체!

하늘을 통째로 뒤흔드는 거대한 엔진음에 깜짝 놀란 기사들이 소속을 막론하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자세제어 확인. 추력 편향장치 이상 없음. 이륙준비 완료.]

그 말과 함께 글레이프니르가 자세를 낮췄다.

무릎을 구부린 채 왼 팔을 땅에 대고, 땅을 태우던 추진기를 수평으로 향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몸체를 고정시켰다.

“가지.”

얀의 짧은 한마디.

곧바로 닐의 답변이 들려왔다.

[명령 수신. 글레이프니르, Take Off.]

그리고 그 한마디와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의 동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 …저, 저게 뭐야?

- 검은 콜로서스가…. 하늘을 날고 있어?

대각선으로 공중에 떠오른 글레이프니르는 이내 포탄과 같이 엄청난 속도로 구름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저, 저게 무슨?!”

한편, 진지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하이람 또한 눈을 크게 뜬 채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배, 백작님!”

“저건 얀 베르쿠트! 그 자의 기체입니다!”

“하늘을…! 콜로서스가 하늘을 날다니?!”

전투중인, 그리고 추가 투입을 위해 대기중이던 기사들.

하늘을 바라보던 부상병들.

그리고 며칠간 계속된 전투에 흐려지는 눈을 다잡은 로렌츠의 기사들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싸움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 그래, 날아오르는군.

그렇게 중얼거린 클로드가 곧바로 달려들어 넋이 나간 벨커스의 콜로서스를 추가로 베었다.

콰드득!

- 로렌츠의 기사들이여!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 클로드 노공작의 목소리에 로렌츠 기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 늙은 우리들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었다! 껍데기뿐인 성을 버리고, 나와 함께 최후의 복수를 하자!

그렇게 외치며 앞으로 나선 클로드의 콜로서스를 향해 벨커스 기사들의 돌격포가 불을 뿜었다.

쿠콰콰쾅-!

수십 발의 포성.

그렇지만 포연이 걷힌 곳에는 어느 새 세 대의 콜로서스가 대방패를 치켜들고 있었다.

쿵-!

그리고 그와 함께, 저택에 남아있던 모든 로렌츠의 콜로서스가 한 곳으로 모여들어 진형을 갖췄다.

“저 저건…!”

“로렌츠의 기사들이 몰려든다!”

마치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진형의 선봉에 선 클로드의 철기사가 방패를 받아들자, 다른 기사들 또한 일제히 방패를 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 제국은 우릴 배신했으나, 역사는 우릴 배신할 수 없으리! 돌격하라! 우리의 원수인 제국을! 하이람 벨커스를 죽여라!

그 말과 함께, 기사들의 콜로서스가 일제히 성 밖으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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