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28화 (128/186)

128. 원수의 앞으로.(2)

“하이람 공.”

얀이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웃는 낮의 하이람 벨커스가 얀에게로 다가왔다.

“어려운 때에 좋은 걸음 해 주셨소. 생각해보니, 이렇게 단 둘이 얘기하는 건 처음이군.”

“그렇습니다.”

웃음 섞인 하이람의 인사에 답하며 얀은 그와 눈을 마주보았다.

“저 자가….”

“얀 베르쿠트….”

여유로운 웃음을 만면에 띤 하이람과 달리, 양 옆에 도열한 벨커스의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얀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차라리 저렇게 쳐다보는 게 훨씬 편한데 말이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대하는 하이람을 바라보며 얀은 가슴이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계속해서 맛보고 있었다.

“제국 곳곳에서 활약이 자자한 기사가 함께하니, 훨씬 든든하오.”

자신을 꿰뚫어보려는 듯한 하이람의 시선을 받아내던 얀이 슬며시 입가를 비틀었다.

“예. 교국에서도, 식민지에서도. 벨커스 가문의 협조 덕에 일이 수월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얀은 내밀어진 벨커스의 손을 맞잡았다.

‘교국에서는 비델과 그의 제자들을. 루브라-바일사르에서는 그가 식민지에 풀어놓은 수족들을 전부 죽였었지.’

움찔.

그리고 얀은 그 순간, 벨커스 백작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 자가…!”

“본가의 기사만 몇 십을 죽여 놓고 잘도 그따위 망발을…!”

얀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기사들이었지만, 닐의 음성감지모듈 덕에 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외지에서 일어난 일이니, 이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지.”

나지막이 그렇게 말하는 하이람의 눈에는 짙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역 밖에 마련된 주군지로 얀을 안내한 하이람은 멀리 보이는 로렌츠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이미 몇 차례 전투가 있었던 듯, 건물 곳곳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본의 아니게 옛 지인과 검을 맞대게 해서 미안하오. 그렇지만 이는 모두 제국을 위한 일이니.”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는 모르는 이가 본다면 정겹다고 느낄 정도로 평온했다.

‘닐.’

[명령 확인. 열상 카메라로 전환.]

한쪽 눈의 시야가 뒤바뀌며 사람들의 체온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며 분노한 듯 열을 올리는 벨커스의 기사들을 보던 얀은 이윽고 시선을 돌려 로렌츠 저택을 바라보았다.

‘사용인들은 전부 철수했군. 남은 건 소수의 방어병력과 기사단….’

모든 퇴로가 막힌 이상, 절대적인 우위는 진압군인 하이람에게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제국 최고의 기사단인 로렌츠 기사단.

케인의 지휘 하에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중앙 전선을 탈환한 기사들이었다.

“분명, 자네의 부대는 13황자님 직속이었지. 지휘계통에는 케인 로렌츠가 자네 상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다.”

얀이 짧게 답하자 흡족한 듯 미소 지은 하이람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주군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진해서 뛰어든 게로군. 참으로 기사의 귀감이야.”

그 말을 들은 벨커스 가문의 기사들은 얀을 바라보며 비웃기 시작했다.

“제 몸 보신을 위해 옛 상관을 버리다니, 로렌츠의 기사 답군 그래.”

“로렌츠라니, 그런 말 말게. 형벌부대 출신이 아닌가?”

“하하하!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기사들은 명백히 얀 자신에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였지만, 하이람은 딱히 그것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니, 제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

제국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잃은 클라우스는 식민지에서 나올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얀의 뒷배인 로렌츠는 반역의 짐을 진 채 제국의 공적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얀과 87독립중대는 끈이 떨어진 연과 같은 신세였다.

“백작님. 요청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요청?”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얀은 하이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신은 시체로 가득한 참호에서 기어 나온 인간.

이보다 더 한 상황도 숨 쉬듯 겪어왔다.

얀은 그렇게 되뇌며 하이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13황자님의 직속부대로써, 독립 작전권을 요청합니다.”

얀의 그 말을 들은 하이람의 눈썹이 휘었다.

“그 말인즉, 내 지휘하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의미인가?”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을 뿐입니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알겠네. 그리 하지.”

“감사합니다.”

예상 외로 선뜻 허락이 떨어졌지만, 하이람 역시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로렌츠일세. 보병 위주의 편성으로는 감당하기 힘들겠지.”

그렇게 말한 하이람은 자신의 뒤에 도열한 기사들 중 둘을 불렀다.

“너희들은 앞으로 베르쿠트 경의 부대에 합류하여 함께 작전한다.”

“예!”

“알겠습니다. 가주님.”

가주의 명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 답한 기사들은 얀에게 다가와 정중히 예를 취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베르쿠트 경.”

자신의 부대에 합류한 벨커스의 기사.

그 사실이 견딜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문 얀이 하이람을 바라보았다.

“작전권은 인정하지만, 우선 이들과는 작전 내용을 공유하도록 하게.”

“저희 부대에 콜로서스 수량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아이린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는 얀이었지만, 하이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네가 그랬듯이, 나 또한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네.”

“…쯧.”

말로 정치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되뇐 얀은 그에게 들리지 않게 혀를 찬 뒤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가주님.”

얀이 자리를 떠다는 것을 본 두 명의 기사가 다가가자, 하이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독 작전이라니, 웃기는 소리. 지체할 필요 없다. 놈을 죽여라.”

“혐의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기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묻자 입꼬리를 올린 하이람이 즐겁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온갖 반골들을 힘으로 짓눌러 만든 것이 저 자의 부대가 아니더냐? 뒷배가 사라지자 내분이 벌어졌다 말하면 되겠지.”

하이람의 그 말에 두 기사가 마주 웃어보였다.

“이걸로 얀 베르쿠트와 그의 부대도….”

“여기서 끝이군.”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두 기사는 얀의 뒤를 따라 87중대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

벨커스의 사병으로 이루어진 이 군영에 들어온 순간, 그들이 벗어날 방법 따위는 없었다.

[…녹음 음성 재생 완료.]

“역시. 여기서 날 파묻을 속셈이었군.”

막사에 도착한 얀은 닐의 음성감지 모듈이 도청한 소리를 들으며 이를 드러냈다.

지원 병력으로 자신과 87중대를 요청한 것은 하이람 본인.

케인과 더불어 그 끄나풀인 자신을 제거할 의도가 다분했다.

“비델을 죽일 때와 같이 부대원들을 풀 수는 없어.”

“나도 알아. 상대는 신흥 귀족파의 수장이니.”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었지만, 얀 자신은 벨커스를 위협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어쩔 생각이야?”

얀을 바라보던 렌이 그렇게 묻자 잠시 생각하던 얀은 이를 드러낸 그대로 입가를 비틀며 으르렁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겨우 기사 둘로 날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저 개새끼는 날 너무 얕본 거다.”

그렇게 뇌까린 얀이 왼쪽 눈에 이식된 닐을 불렀다.

[호출 확인.]

“작전플랜 D. 대원들 전원에게 공지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얀의 왼쪽 눈동자가 이리저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삐-

뒤이어 얀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부대원들이 들고 있는 소형 수신기에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부중대장님.”

막사에서 대기중이던 대원들이 다가오자 고개를 끄덕인 단델이 입을 열었다.

“나도 확인했어. 플랜 D. 신호하면 곧바로 출동한다. 경계 철저히 해.”

“알겠습니다.”

서신도, 전언도 필요 없는 실시간 통신.

보병과 공동작전을 펼치던 것을 기억해낸 닐이 정비시설을 이용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수신기를 대원들에게 보급한 결과였다.

***

쿵-! 쿵-!

모두가 잠든 새벽.

숙소를 크게 울리는 육중한 발자국소리에 얀의 숙소를 감시하던 두 명의 기사는 화들짝 놀라 자신들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이 새벽에 콜로서스? 심지어 두 대를?!”

발자국 소리에 잠을 설친 병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은밀한 작전을 방해받은 기사가 불평했다.

“상부에 보고도 없이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오늘 밤에 콜로서스를 옮긴다는 말은 보고받지 못했다.

그렇게 불평하던 기사 중 한 명이 순간, 아차 싶은 기분으로 읊조렸다.

“보고가 필요 없는 단독 작전권…. 설마?!”

그렇게 말하면서 창문을 통해 얀의 방을 확인한 기사가 뿌득 이빨을 갈아 붙였다.

“뭐야, 도대체 어디로…!”

그렇게 말하는 사이, 글레이프니르의 서치라이트가 얀의 숙소를 감시하던 두 기사의 모습을 비췄다.

“크윽?!”

갑작스럽게 쏟아진 광량에 눈을 가린 기사들을 향해 얀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때마침 잘 되었습니다. 야간을 틈타 적진에 침투해 정보를 알아내려 합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전투복을 차려입은 얀이 있었다.

“야, 얀 베르쿠트…?”

“그렇다면 그의 기체에는 누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그들에게로 다가온 글레이프니르는 몸을 숙여 얀을 향해 손을 내밀며 조종석 해치를 열었다.

조종사가 타고 있어야 할 조종석은 비어있었다.

“코, 콜로서스가 혼자서…?”

그렇게 어안이 벙벙한 기사들을 어둠 속에서 비웃은 얀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글레이프니르의 손에 올라탔다.

- 작전 공지를 위해 처소로 찾아뵈었습니다만, 자리에 안계셔서 찾고 있었습니다. 때 마침 잘 되었군요.

이미 글레이프니르에 올라탄 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권한을 받았다는 명분 하나로 이뤄진 날치기 작전.

사전고지도 없이 이뤄진 얀의 행위는 군사작전이 아닌 돌발행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부대원들은 어떻게 할건가! 자네 혼자 간다고 해서 저 저택이…!”

거기까지 말하던 기사들은, 아차! 싶은 얼굴로 다른 막사들을 살펴보았다.

“아 씨발 뭐야?!”

“이 오밤중에 어떤 정신 나간 새…!”

새벽중에 일어난 날벼락에 몇몇 병사들이 볼멘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지만, 이윽고 그 소리를 낸 이가 누구인지를 깨닫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야, 얀 베르쿠트….”

“죽기 싫으면 입 다물어…!”

그리고 그러는 사이, 곳곳에서 랜턴을 키며 불을 밝히는 다른 막사들과는 다르게, 87독립중대의 막사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밖으로 나와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들은 저 자와 접촉한 적이 없…!”

촤악!

그렇게 말하는 두 기사의 눈앞에서 수십 명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어, 어느새…?”

완전히 무장을 갖춘 87독립중대원 50명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로렌츠 저택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자. 보고도 끝냈고, 사전고지도 했다. 할 일은 다 했으니 바로 가야지.”

“선 조치 후 보고. 전쟁의 기본 원칙.”

얀의 궤변을 덧붙이는 렌의 목소리와 함께, 글레이프니르의 거체가 로렌츠 저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작전 행동은 우리와 함께 하는 걸로 되어있지 않나! 베르쿠트 경!”

“우리도 어서 준비를…!”

그렇게 말하는 벨커스의 기사들이었지만, 그들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밤중에 벌어진 이 요란한 소동.

24시간 이곳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로렌츠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케인의 일파 중 하나인 얀은 어떨지 몰랐지만, 자신들은 저택 앞에 몸을 들이미는 순간 돌격포 세례에 벌집이 될 판이었다.

- 그럼 준비 하십시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만.

얀의 한마디에 기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로렌츠의 정문에 돌입한다면 로렌츠의 기사들에게, 목숨이 아까워 이곳에 남는다면 하이람의 손에 죽을 테지.

“젠장, 젠장…!”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이…!”

고뇌를 마친 기사들은 이를 악문 채 정비창으로 걸어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이, 처참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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