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원수의 앞으로
케르단 전선의 막사. 창 밖에서 불어온 차가운 공기에, 얀은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
몸을 일으키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그를 엄습해왔다.
자신의 감각이 아직 살아있음을 깨달은 얀은 고개를 들어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여긴….”
“케르단 전선기지. 아이린이 옮겨줬어.”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얀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밑으로 내리깐 채 앉아있는 새하얀 소녀가 있었다.
“내가 본 것. 꿈이 아니지?”
아무런 맥락 없이 이어진 질문이었지만, 렌은 거기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2중동조의 부가 효과 중 하나야. 두 개의 의식을 동시에 기체에 동조시키는 순간, 서로의 기억 일부가 공유될 수 있어.”
“그 말인 즉, 내가 꿈속에서 본 것은 네 기억이다?”
얀의 되물음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기회가 있었기에 했고.”
“내가 계승자이기 때문에?”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말에 얼굴을 구긴 얀이 그렇게 내뱉었다.
자신이 렌의 기억 중 일부를 보았다는 말은, 렌 또한 자신의 기억 중 일부를 봤다는 말이 된다.
“불쾌해? 내가 네 기억을 훔쳐봤다는 것.”
자신의 생각을 읽은 듯한 렌의 한 마디에 멈칫한 얀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고쳤다.
“피차 똑같은데, 나 혼자 억울해서 뭐하겠어.”
애써 자신의 감정을 지운 얀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내가 본 영상들. 그게 고대인의 역사인가?”
렌은 조용히 얀을 바라보았다.
“뭘 봤어?”
“많은 걸 봤지. 단편적인 것들뿐이었지만.”
그렇게 운을 뗀 얀은 렌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수천 대가 넘어가는 글레이프니르와 거대병기,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공중전함들.
그리고 그것들을 낙엽처럼 짓밟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거인들의 모습.
“넌 그걸 혼자 바라보고 있었지.”
“….”
얀의 말을 들은 렌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꿈 얘기는 여기까지. 중요한 일이 남았어.”
그렇게 대화를 끊은 얀은 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물었다.
“케인은?”
“반역자로 공표. 검거되었다는 소식은 없어. 시간을 생각한다면….”
“로렌 영지에 있단 건가. 그나마 다행이군.”
기체에서 정신을 잃은 얀이 깨어나기까지는 꼬박 삼 일이 걸렸다.
그 사이에 케인이나 로렌츠 공작가 둘 중 하나는 끝났을 것이라 생각한 얀이었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로렌츠와 케인 둘 모두가 건재했다.
“알리에노르, 그 여자는?”
“황제의 기사들이 데려갔어.”
“쯧, 결국 못 죽였군.”
짧게 혀를 찬 얀이 막사 밖으로 나오자, 정비중이던 87독립중대원들이 얀을 발견한 뒤 경례했다.
“중대장님 오셨습니까.”
이윽고 부대원들을 관리하는 단델이 얀에게로 다가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보고하기 시작했다.
“정비는 완료했고, 중대원들 체력도 괜찮습니다.”
“아이린이 글레이프니르를 옮겼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렌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묻자 단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쿵-!
이윽고 전선 한 구석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얀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에퀴테스급 콜로서스 한 대가 보급품을 들고 기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좋습니다 기사님! 이곳에 내려주세요!”
- 아니, 그러니까 저한테 존댓말 하시지 말라니까요….
“이제 저보다 상관인데, 당연히 말을 높혀야죠! 막내기사님!”
“하하하하-!”
보급품을 확인하던 중대원이 그렇게 외치자 곳곳에서 대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저런 문답을 누구랑 나눴었더라?
얀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선을 돌렸을 때, 그의 앞으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 저 새끼들….”
“황도군이잖아?”
그들의 옷을 알아챈 대원들이 표정을 구겼다.
붉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
릭과 스웨인. 그리고 에밀리가 지휘하는 황도군이었다.
“얀 베르쿠트 소령. 케인 로렌츠 일파의 토벌에 협조하길 바랍니다.”
“협조라…. 제가 말입니까?”
자신의 관등성명을 부르는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당신은 반역자 케인 로렌츠가 자신의 본거지로 향할 때 그것을 ㅤㅉㅗㅈ는 황도군을 막아섰습니다. 이 점을 시인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죄를 씻기 위해 저희에게 협조해도 모자랄 판에 의문을 제기한다니요. 당신의 행동은 국가 반역자인 케인 로렌츠의 행위에 동조했다고 봐도 되는 겁니까?”
얀의 방해에 이어, 알리에노르의 방해까지.
황도군으로써의 체면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릭은 이전에 만났던 때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황도군의 대부분은 천출에서 선출된 황제의 개인 병사들. 황제를 욕보이더니 눈이 돌아갔군.’
그렇게 생각하던 얀은 정보를 알아낼 겸, 눈앞에 있는 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라고는 하나, 제가 기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입니다. 정확한 혐의가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얀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점점 몰려드는 87 독립중대 대원들을 보자 황도군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 지휘관님…!”
“이 자들은 형벌부대 아닙니까?”
“콜로서스 지원 없이 대응하기에는…!”
일과를 끝낸 후였기에 무장한 대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어깨에 새겨진 낙인, 그리고 살벌한 눈빛을 바라본 황도군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케인 로렌츠의 죄목은 반역죄. 그가 민중파에 가담하여 제국을 전복하려 했다는 증거들이 모두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 지었다.
제국의 2대 공작이 민중파에 가담했다.
제국에 사는 그 누가 듣는다 해도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래, 민중파라…. 거짓 죄목으로는 딱이군.’
혁명의 정신을 부르짖다 케르단 전선으로 끌려왔던 자신의 선임병을 기억해낸 얀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부대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거기까지. 다들 물러나.”
얀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하자,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살벌한 표정을 하던 대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고친 뒤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도 일종의 위협인가요? 교국에서 했던 것처럼?”
대원들의 눈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에밀리가 추궁하듯이 물었지만, 얀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죄목이 어떻든 간에, 이곳에서 단장님을 욕보이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적반하장격으로 짐짓 경고하듯 얀이 그렇게 말하자 이들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호칭에 주의하십시오, 얀 소령. 아까부터 반역자에게 기사단장이라니!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당신 부대의 안위도…!”
얀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릭이 짜증을 못 이겨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스웨인의 팔이 앞으로 나서려던 그를 가로막았다.
“리, 릭! 안됩니다!”
“스웨인? 안된다니, 황제 폐하의 병사인 우리가 무슨…. 흡?!”
분기탱천한 릭이 거기까지 말하며 전선기지를 돌아본 순간, 그는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
“….”
조용했다.
온갖 소음과 고함소리, 그리고 병사들의 잡담으로 가득했던 케르단 전선기지의 모든 병사들.
그들이 일제히 붉은 제복을 입은 이들을 바라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경계병, 기관총 사수, 저격병, 심지어는 장교들까지.
정적 속에 달아오른 머리가 식자,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인지 깨달은 릭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있는 곳은 케르단 전선기지.
제국에게 버려져 죽음으로 내몰린 병사들이, 케인에 의해 승리를 거머쥐어 살아남은 곳.
그 소속은 제국군이되, 누구보다도 제국을 혐오하게 된 자들의 소굴이었다.
“황명인 이상, 저와 제 부대에게 거부권은 없겠지요. 오늘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형벌부대인 자신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렇지만 저흰 13황자님으로부터 독립 작전권을 부여받은 부대입니다. 이 이상의 지시는 삼가주셨으면 합니다만.”
이제는 루브라-바일사르의 총독직까지 겸하게 된 클라우스의 입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이람 공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빠를 겁니다.”
하이람.
릭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얀의 표정이 굳었다.
“하이람, 이라고 하셨습니까.”
재차 되묻는 얀의 말에 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진압군 사령관으로 하이람 벨커스 공을 임명하셨습니다. 현재 로렌 영지에서 토벌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얀이 주먹을 쥐었다.
저들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지껄인 걸까.
케인을 죽여라? 벨커스의 밑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그 말을 들은 얀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웃어보였다.
그가 살심을 품었을 때 나오는 웃음, 분노를 숨기기 위한 인위적인 웃음이었다.
‘카르디어스 반 바일사르. 그 또한 내 적이다.’
***
로렌! 로렌입니다!
이전에 클로드의 장례식 때에는 하객으로 가득했던 로렌의 역이었지만, 지금 이 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었다.
“부상자다! 이쪽으로 옮겨!”
“제기랄,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소모전을 계속 할 속셈이야!”
“기사단은 언제 출발하는 거냐고…!”
이미 하나의 거대한 병동으로 변해버린 기차역은 부상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기사단 병력은 안보이는군. 대부분이 보병들이야.”
“로렌츠 공작가는 기사가문이 아닌가요? 왜 굳이 보병들을….”
아이린이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전쟁중이야. 그리고 케인은 그 와중에 반역자로 낙인찍힌 거고.”
얀이 그렇게 말하자 뒤이어 렌이 보충설명을 이어갔다.
“이미 반역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어 쓴 상황에서, 내전에 의한 피해자가 늘어날수록 로렌츠에 대한 여론…. 민심은 악화돼.”
“그 말인 즉, 이 병사들은….”
‘벨커스는 내 아들을 지키고, 로렌츠는 내 아들을 죽였다.’
기차에서 훑어본 신문의 내용을 떠올린 얀이 낮게 한숨 쉬었다.
“내전을 이용해 벨커스의 인지도를 높이고, 로렌츠의 인지도를 낮추려는 수작. 치졸한 방식이지만, 효과는 확실해.”
그렇게 말하는 것과 거의 동시라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로렌츠를 향한 저주가 뿜어져 나왔다.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반란이라니, 이제 무슨 제국의 공작이란 말이야!”
“제 정신이 아니야. 아무리 왕좌가 탐이 났어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로렌츠는 선을 넘었어!”
“이렇게 되면 그들이 지원하던 13황자도…!”
케인에 대한 악담은 이윽고 로렌츠와 뜻을 함께하는 클라우스 황자에게까지 마치기 시작했다.
“정치꾼들 노는 꼴 하고는.”
대중의 평가는 시작부터 바닥을 치던 형벌부대로써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클라우스에게 있어 이것은 커다란 위기였다.
반역자의 후원을 받은 황자.
이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우선 로렌 영지로 가 케인과 접선한다. 그 뒤에 대책을 의논해야….’
그렇게 생각에 잠긴 얀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을 때였다.
“오오, 반가운 얼굴이 보이는군.”
뒤로 넘겨 묶은 회색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
그것을 알아본 얀은 끓어오르는 살심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이람…. 벨커스.’
웃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오는 이는 벨커스 가문의 가주.
하이람 벨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