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흑과 백(2)
쐐애애액-!
유성이 떨어진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검이 얀을 향해 내리꽂혔다.
카앙-!
맞부딪힌 글레이프니르의 대검과 흐레스벨그의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글레이프니르의 것과는 달리, 가시에 가까울 정도로 얇은 세검이었다.
[단분자 커터, 가동.]
[적성병기의 진동 확인. 파장 동기화.]
끼이이이이-!
비명소리와도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
그와 함께 맹렬하게 진동하는 두 검 사이에서 충격파가 흘러나왔다.
“이건?!”
출력으로, 그게 아니라면 절삭력으로.
기체의 장갑을 두부 자르듯 갈라버리는 글레이프니르의 대검과 맞부ㅤㄷㅣㅊ혔음에도 불구하고, 하늘 위에서 내리꽂힌 흐레스벨그의 세검은 상처 없이 멀쩡했다.
- 플뢰르는 가동한 지 100년이 넘어가는 인공지능이에요. 깨어난 지 1년이 되어가는 당신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 하, 그러셔?
여전히 하늘에 떠있는 흐레스벨그가 떨어지려는 찰나, 곧바로 접근한 글레이프니르의 손이 날아가려는 흐레스벨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 어머?
- 어딜 도망가려고!
그 말과 함께 얀은 붙잡은 흐레스벨그의 다리를 그대로 휘둘러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콰앙-!
“렌!”
“조준 확인. 입자포 발사.”
그리고 곧바로 목표를 포착한 렌이 어깨에 장비된 하전입자포를 흐레스벨그에 퍼부었다.
쿠오오-!
그렇지만 그 순간.
[경고. 적 실탄병기 감지.]
“씨발!”
투콰앙-!
경고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얀이 몸을 옆으로 튼 순간, 레일건의 탄환이 글레이프니르의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 와아! 처음 써보는 대 입자탄이었는데, 생각보다 괜찮군요?
검증도 제대로 안한 채 싸우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본 곳에는 왼팔을 열어놓은 채 전자파를 튀기고 있는 흐레스벨그의 모습이 보였다.
“팔 안에 레일건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흐레스벨그였지만 그녀 역시 입자 빔에 대한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지, 왼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좌완부 가동한계. 기능 정지합니다.]
“어머,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나봐요?”
조종석 안에서 울리는 플뢰르의 목소리에 그렇게 답한 알리에노르였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가지 않았다.
- 즐거워…! 즐거워요! 얀!
온 몸을 가득 채우는 전투의 고양감과 희열에 완전히 녹아내린 알리에노르의 얼굴.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얀은 저 여자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 기체, 접근.]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등과 허리 부분에 장비된 추진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불을 내뿜으며 흐레스벨그의 동체를 글레이프니르에게로 쏘아 보냈다.
“직선으로 온다. 닐!”
[명령 확인.]
직선으로 달려드는 흐레스벨그의 모습을 보며 눈을 빛낸 얀이 말하자 글레이프니르가 곧바로 등에 장비된 대검을 꺼내들었다.
쐐애애액-!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속도였지만 이번에는 두 번째 공격.
“같은 수에 두 번이나 당할 줄…!”
- 같은 수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즐거운 듯 웃음기가 가득한 알리에노르의 목소리는 악마의 그것과도 같았다.
[3번 생체 CPU. 오버클럭 개시. 동조율 고정 해제. 관성제어 및 동조 부하를 3번 생체 CPU에게 이관.]
그리고 그 웃음소리와 함께, 흐레스벨그의 확성기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 끄아아아악-!
“이 소리, 들어본 적 있는데.”
타우르의 부품으로 전락한 라엘의 비명소리를 떠올린 얀이 이를 갈아붙였을 때, 돌진중인 흐레스벨그에게서 이번이 일어났다.
[메인 파일럿 교체. 생명유지모드로 이관. 관정중화 장치 가동.]
키리리릭-!
마치 도탄 된 탄환이 벽을 튕기듯, 쏘아지던 속도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튀어 오른 흐레스벨그가 그것을 받아치려던 글레이프니르의 대검을 피해냈다.
“이런, 미친?!”
“이 속도에서 급격한 방향전환은, 파일럿의 몸이…!”
안에 인간이 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급격한 기동.
아무리 고대인의 콜로서스라고 해도, 이런 과도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안에 있는 파일럿은 곤죽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촤아아악-!
그렇지만 흐레스벨그는 지면을 휘저으며 땅에 착지한 뒤, 글레이프니르의 등을 향해 오른팔을 뻗고 있었다.
[3번 생체 CPU 기능 정지. 4번 CPU로 교체합니다.]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제어권을 확보한 알리에노르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뒤가 열려있어요. 얀?
“뭐?!”
글레이프니르의 등 뒤에서 들려온 알리에노르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피로감도 담겨있지 않았다.
투콰앙-!
온 몸을 얻어맞은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충격이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을 뒤흔들었다.
“끄으으윽?!”
기체의 외부가 아닌, 진동을 통해 내부에 있는 파일럿의 몸을 파괴하는 특수 병기.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듯 머리가 핑 돌았지만, 지척에 다가온 흐레스벨그의 존재를 알아챈 얀은 가까스로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와아!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니, 정말 멋져요!
이젠 저 여자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복장이 뒤집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한 얀은 곧바로 흐레스벨그를 향해 입자포를 쏴 갈겼지만, 방금 전과 같은 고기동을 이용한 흐레스벨그는 곧바로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치겠군. 반응할 수가 없어.”
“생체 CPU를 이용한 2중 동조. 인간의 두뇌를 교체해가면서 기체 조작의 부하를 분산시키는 기술이야.”
“사람 뇌를 무슨 탄창 갈아 끼듯이….”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악랄한 방법이었지만, 성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처음 보는 무기들과 고기동, 그리고 글레이프니르를 상회하는 속도와 반응성.
글레이프니르와 호각을 이루는 성능의 기체와 교전한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얀의 등 뒤에서 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래는 복좌형 병기를 위해 개발된 기술.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우리도 사용할 수 있어.”
“…허, 그래?”
앞전에 들려온 비명소리를 떠올린 얀은 렌이 말한 기술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하지 말라 노래를 부를 텐데, 웬일이야?”
그렇게 묻자 렌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
“어차피 막지 못한다면, 등을 밀어주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 대답을 들은 얀은 입가를 비틀며 등 뒤에 앉은 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뇌가 망가질 확률은?”
“없어. 있다 해도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감정이 섞여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믿지. 해.”
얀이 짧게 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렌의 눈앞에 반투명한 화면 수십 개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 5분정도.”
“어떻게든 버티란 말이군.”
렌의 주문에 고개를 끄덕인 얀이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알리에노르를 향해 양 팔을 들어올렸다.
“닐!”
[장갑 폐쇄. 충격 제어.]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투콰앙-!
폭음과 함께 피어오른 먼지가 걷히자, 그곳에는 흐레스벨그의 검날을 붙잡은 글레이프니르의 모습이 보였다.
- 설마, 잡아내시다니! 대단해요!
- 그렇게 여유 부리는 것 치고는, 기체 상태가 말이 아닌데 그래?
처음 보는 창조주의 기체였지만, 싸우다 보면 약점 또한 드러나는 법이었다.
흐레스벨그의 경우에는 프레임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 빈약한 장갑과 떨어지는 공격력이 그것이었다.
- 창조주의 콜로서스를 다루는 파일럿은 제국 역사상 처음이라며 난리치더니, 전부 헛소리였군?
흐레스벨그를 붙잡은 얀이 그녀를 향해 이죽거렸다.
떠보기 위한 질문. 대답은 없었다.
- 이 정도 성능을 지닌 기체가 버젓이 있으면서, 엘프와의 전쟁에는 왜 참여하지 않았지?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 그것을 알아챈 알리에노르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아무 거리낌 없이 얀을 위해 정보를 내놓았다.
- 전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만 움직이니까요.
- 제국을 지켜? 알프라이아와의 전쟁은 제국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얀이 되묻자 알리에노르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 전쟁은 제국 역사에서 몇 번이나 있어왔어요.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이 제국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죠.
그리고 어차피 이길 테니까요.
그렇게 덧붙인 알리에노르는 마치 무언가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 뒤누아가 없애야 할 위협은 다른 위협이에요. 제국의 체제를 무너트리려는 요소. 그것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제 임무죠.
- 그 말인 즉?
- 케인 로렌츠. 현재의 제국에게 있어서는, 그가 가장 커다란 위협이에요.
제국 권력의 2인자. 제국의 공작인 로렌츠의 가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제 카르디어스 반 바일사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
- 케인을 ㅤㅉㅗㅈ는 걸 포기하고, 여기서 나와 푸닥거리나 하고 있어도 되나?
- 반대에요. 당신을 이 곳에 잡아놓기만 하면, 케인은 아무것도 못 한 채 죽어갈 테니까요.
로렌츠의 병력규모, 그리고 케인의 힘.
이미 황제가 로렌츠에 대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불확정요소는 자신 하나 뿐이라는 건가.
-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 그러세요.
얼굴을 일그러트린 얀이 웃고 있는 알리에노르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 카르디어스 황제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 제국을 주무르고 있는 건 도대체 누구냐.
잠시 동안 알리에노르는 말이 없었다.
글레이프니르의 붉은 안광을 응시하던 흐레스벨그의 푸른 눈이 서로를 잠시 마주보던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바일사르 1세.
- …씨발, 뭐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얀이 그렇게 되묻자, 무미건조한 알리에노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제국의 건국자인 바일사르 황제에요. 그가 건국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제국을 통치하고 있죠.
그렇게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끝났어. 동조 개시.”
순간 흘러들어온 충격적인 정보에 잠시 넋을 잃은 얀이었지만, 이내 목덜미를 통해 느껴지는 뻐근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프로그램 적용 완료. 조종계통 변경. 2중 동조 개시.]
조종석을 울리는 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와 동조되어있던 시야에 수많은 정보들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 자 그럼, 슬슬 쉬는 시간은 끝내야죠?
이윽고 들려오는 것은 흡족한 듯한 알리에노르의 목소리.
거기에 얼굴을 찌푸린 얀이었지만, 더 이상 정보를 캐낼 시간은 없었다.
[동조 상태 복구 완료. 흐레스벨그, 동조율 고정 해제.]
카앙-!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은 얀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자신을 붙잡은 글레이프니르의 팔을 튕겨낸 흐레스벨그가 곧바로 오른 팔을 앞으로 뻗었다.
- 이제 당신을 잡아가기만 한다면…!
희열에 찬 알리에노르가 그렇게 말하며 조종간의 트리거를 당기는 그 때.
글레이프니르는 알리에노르의 시야에서 벗어나있었다.
- …어?
지금까지의 여유로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당황한 듯한 침음성.
[동조율 고정 해제. 단분자 커터, 최대 출력.]
- 누굴 마음대로 잡아가려고?
뒤에서 들려온 얀의 목소리에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글레이프니르의 대검은 이미 흐레스벨그의 몸체를 사선으로 가르고 있었다.
촤아앙-!
최대 출력으로 진동하는 단분자 커터가 장갑판 사이로 튀어나온 흐레스벨그의 프레임을 가르고, 순식간에 그 거체를 사선으로 일도양단했다.
쿵-! 쿵-!
칼로 잘라낸 듯한 깔끔한 절단면과 함께, 미끄러진 흐레스벨그의 상체 사이로, 조종석에 탄 알리에노르의 모습이 보였다.
“씨발, 조금 더…. 아래였어야 했나.”
그러나 자신의 기체가 순식간에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알리에노르의 표정에서는 분노나 안타까움, 두려운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히, 히히! 히히히히!”
자신을 바라보는 글레이프니르의 새빨간 안광을 정변으로 바라보며, 알리에노르는 미친 듯이 웃어대며 그 안에 든 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신뿐이에요! 당신만이 날 압도하고! 날 소유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날…!”
그렇게 외치는 알리에노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글레이프니르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파일럿 의식 정지 확인. 신경 연결 해제. 생명 유지모드로 전환.]
눈을 내리깐 렌의 등 뒤에서는, 정신을 잃은 얀의 몸이 조종석 시트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