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24화 (124/186)

124. 흑과 백.

“닐.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건가?”

방금 전, 닐의 안내음을 들은 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 스캔 결과, 전방에 대치중인 기체는 인류연방 정비창에서 제조된 기동병기임.]

“하, 이런 미친. 그렇다는 말은….”

그렇게 말을 흐린 얀이 눈앞에 있는 새하얀 콜로서스, 흐레스벨그를 바라보았다.

육중한 장갑으로 뒤덮인 글레이프니르와는 달리 ,곳곳에 내부 프레임이 들어난 경장갑 구조를 한 콜로서스였다.

양 어깨, 팔꿈치, 종아리 부분에 달려있는 추진기에서는 아직까지도 잔열이 남아있는 듯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릭. 스웨인. 추적은 실패입니다. 복귀하세요.

자신의 등 뒤에 도열한 황제의 중앙 기동부대에게 그렇게 말한 알리에노르가 기체를 돌려 그들을 마주했다.

“아, 알리에노르 공작님….”

결코 수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알려진 뒤누아 공작가의 가주가 나타났다.

제국의 최북단인 케르단 대삼림에.

그 사실을 떠올린 세 사람은 급히 알리에노르에게 예를 갖춘 뒤 대답하기 시작했다.

“송구합니다만, 공작 전하. 케인 로렌츠의 위치는 아직 파악중이며….”

- 공작.

“…예?”

나지막이 들려온 알리에노르의 한 마디에 릭이 의문을 표했다.

- 케인 로렌츠는 로렌츠 공작가의 가주이며, 귀족원의 원로 중 한 사람입니다.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사사로이 이름을 불러선 안되지요.

알리에노르가 확성기를 통해 고명한 귀족으로써 목소리를 내자 흠칫한 릭이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공작 전하. 그렇지만 저흰 황제 폐하의 직속으로서….”

당신에게는 명령권이 없다.

이것을 에둘러 말하는 릭이었지만, 이어지는 알리에노르의 한 마디에 이를 악물 수 밖에 없었다.

- 폐하께는 차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뒤누아 가문의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니,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공작가의 위세.

그리고 그런 가문의 명예를 건 선언.

여기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는 뒤누아 가문 전체와 맞붙어야 할 수도 있었다.

“…공작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그렇게 말한 릭이 수신호하자 얀을 둘러싸고 있던 스무 대의 콜로서스가 천천히 뒷걸음질 쳐 삼림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자아! 그럼 이제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우리 인사나 해요. 얀 베르쿠트.

마치 방금 전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글레이프니르와 마주선 흐레스벨그의 조종석 해치가 열리며 그 곳에서 알리에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이 옷은 남들 앞에서 보이기엔 부끄럽거든요.”

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질적인 검은 옷.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무늬와 색상이 아니었다면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할 복장이었다.

“저것도 고대인의…?”

“파일럿 슈트. 용도는 동조율 상승. 원래였으면 너도 입었어야 해.”

그 말에 표정을 살짝 구긴 얀이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기체를 조작해 조종실 해치를 열었다.

“하아~!”

조종석 사이로 얀의 모습이 나타나자 황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알리에노르는 두 손을 모은 채 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씨발. 소름 돋는데.’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시선.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얀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매혹과 고혹으로 온 몸을 감싼 그녀였지만, 얀이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불쾌감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트로이얀의 다리를 박살낸 것. 너인가?”

“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에 얀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유는?”

“취미에요.”

취미라. 고대인의 생체단말을 잡아서, 자기 멋대로 가지고 노는 게 취미?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트로이얀에 대해 떠올린 것인지 웃는 얼굴의 알리에노르가 설명을 시작했다.

“계승자랍시고 인간을 하나 데려왔는데, 제 기준으로는 실격이었어요. 그래서 벌을 준거죠.”

다리를 잃은 채 비척거리는 트로이얀과 그를 바라보던 알리에노르의 모습을 떠올린 얀이 머리를 굴렸다.

“너에게 다리를 잃은 트로이얀은 식민지의 사막에서 쓰러졌고, 그것을 주운 것이 하이람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나?”

그렇게 묻자 알리에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설마 그가 제국을 휘어잡는 대귀족이 될 거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지만요.”

평온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는 알리에노르를 보며 얀은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100년이 넘도록 저 외형을 유지한다면 이 여자도 생체단말인가? 아니야, 그렇다면 렌이 저 여자를 모른다고 할 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설들은 많았지만 그것을 검증할 시간도, 필요도 없었다.

그녀를 향해 권총을 겨눈 얀이 알리에노르를 바라보며 곧바로 물었다.

“케인 단장이 지닌 편지. 네가 꾸민 짓인 건가?”

그 말에 알리에노르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부정할 생각은 마. 단지 확인을 위해….”

“그랬다고 하면. 절 죽이실 건가요?”

얀의 말을 끊고 들려온 알리에노르의 한 마디에 얀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질문에 대답해.”

“맞아요. 제가 그에게 건넸어요. 황제의 진실과 함께.”

그렇게 말한 알리에노르는 그 당시를 떠올리듯 시선을 위로 향한 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옛 인류의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생명을 늘리는 황제의 비밀. 그걸 말해주니 표정이 정말 볼만하던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즐거운 듯 웃음지은 알리에노르가 얀과 시선을 맞췄다.

“그가 교국에서 진실을 찾아낸 이상, 제국은 그를 용납하지 못해요. 물론 진실을 알아버린 이상, 케인 로렌츠 역시 제국을 용납하지 못하겠죠.”

“그렇다면, 케인은…!”

“봉기하겠죠. 그리고 로렌츠 가문은 역적이 되어 죽어가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얀이 주먹을 쥐었다.

이미 황제는 케인을 죽이기 위해 이 변방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였다.

이 시점에서 로렌츠가 봉기한다면, 벨커스 역시 중앙군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대로 공작을 시작할 터.

사면초가였다.

“하이람의 사람들은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모양이에요. 몇몇은 벌써부터 기사들을 모으고 있거든요.”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명예를 떨어트리고, 그 자리를 벨커스의 기사로 채우기 위해.

고대인의 기술로, 그리고 야니카의 목숨으로 만들어낸 기술을 써서, 그들은 케인의 가문을, 로렌츠를 잡아먹을 속셈이었다.

뿌드득!

이를 갈아붙인 얀이 알리에노르를 노려봤다.

“이런 짓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지?”

그렇게 말하자 알리에노르는 고개를 흔들며 얀의 반응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부아가 치민 얀은 계속해서 알리에노르에게 질문을 쏘아댔다.

“가문의 부흥을 걸고, 하이람과 거래했나?”

“설마. 뒤누아 가문은 황제의 도구에요. 그깟 거래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가문이죠.”

아니, 죽으려고 해도 살려내던걸요? 라고 덧붙히는 알리에노르였지만, 얀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하이람, 그리고 13황자인 클라우스와 같이, 뒤누아 가문도 제국의 패권을 노리는 건가?”

“제국? 허영과 탐욕으로 이뤄진 국가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죠?”

이후에도 몇 번이나 그런 문답이 계속되었지만, 알리에노르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목적이 뭐야. 알리에노르.”

마지막으로 얀이 그렇게 묻자, 점점 짙어진 알리에노르의 미소가 광소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히, 히히! 히히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자신의 목덜미에 겨누어진 총구를 보며 지었던 그 녹아내림 표정.

그 얼굴을 한 알리에노르는 얀을 향해 양 팔을 벌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에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얀과 글레이프니르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렌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애써 그렇게 되물은 얀이었지만, 짙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알리에노르가 계속해서 얀을 향해 외쳤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전부 없애버리고, 온전한 당신을 가질 거예요. 얀 베르쿠트!”

씨발.

이 여자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 한 것이 실수였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결국, 힘으로 누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제 성에서 열린 무도회를 기억하시나요?”

그렇게 말한 알리에노르는 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황홀감에 젖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당신이 말했죠. 전 가면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고.”

“그래. 그랬었지.”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당시의 불쾌감에 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이었어요. 제 내면을 알아챈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 한때 저와 같았던 인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뻤어요!”

얼굴에 홍조를 띄운 알리에노르의 모습은 연애소설에 나올 법한 사랑에 빠진 소녀의 그것이었다.

아니, 거대한 전투병기에 몸을 실은 채, 텅 빈 눈으로 외치는 그녀의 상태를 봤을 때, 이것은 사랑보단 일종의 잡착이고, 진득한 광기였다.

“당신은 말했죠. 형벌부대에 있었던 10년 전에는 당신 또한 저와 같았다고!”

“그래. 말했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했을지도 몰랐다.

가면 뒤에 욕망을 남겨놓은 알리에노르와는 달리, 그 당시의 얀은 그마저도 없었으니까.

야니카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녀를 살해한 되를 뒤집어씌워져, 형벌부대로 흘러들어왔을 때.

산산이 부서진 얀의 내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니 전 그 때의 당신을 원해요!”

“….”

그 말과 함께 알리에노르는 자신의 기체, 흐레스벨그에 몸을 파묻었다.

[웰컴, 파일럿. 생체 CPU 3번 가동. 2중동조 개시.]

철컥! 철컥!

마치 잃어버린 날개를 다시 꽂아 넣듯이, 글레이프니르와는 다른 두 개의 전선이 알리에노르의 양 어깻죽지에 연결되었다.

[흐레스벨그, 시스템 기동.]

구우우웅-!

이윽고 들려오는 구동음과 함께, 푸른 색 안광을 내뿜는 새하얀 콜로서스가 점차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그러니 전 케인 로렌츠를 죽일 거예요. 클라우스 반 바일사르를 죽일 거예요! 당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고! 나와 같은 당신을 만들 거에요!”

쿠오오오오-!

흐레스벨그의 추진기에 순식간에 불이 붙는 것과 동시에, 흰색 콜로서스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할 테면 얼마든지 해 봐. 벨커스와 같이 너도 묻어줄 테니까!”

[메인 파일럿 동조 확인. 글레이프니르, 시스템 기동.]

우우웅-!

이에 질세라, 동력로의 동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글레이프니르 또한 이에 맞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닐!”

[신호 확인. 전방 기동병기, 흐레스벨그를 적성병기로 인식. 피아식별장치 재조정.]

두 콜로서스를 감싼 장갑판들이 하나 둘 움직이며 마치 다가올 대결을 준비하듯 그들의 굳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플뢰르.”

기체에 자신을 연결한 알리에노르가 조종석에 대고 말을 걸자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아식별장치 재조정. 전방의 전투병기, 글레이프니르를 적성병기로 인식. 교전준비 완료.]

하늘 위에 떠있는 흐레스벨그가 점점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콜로서스라.”

공중으로 떠오르는 흐레스벨그를 잠시 바라보는 얀이었지만, 이내 그 역시 글레이프니르의 무장을 점검하며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 자, 이제 아무도 없어요, 얀! 방해꾼도, 케인 로렌츠도!

- 이 미친년이 진짜…!

쿠우우우우-!

하늘 위로 솟아오른 알리에노르의 흐레스벨그.

이윽고 솟구친 콜로서스가 글레이프니르에게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옛 인류의 콜로서스 끼리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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