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원수의 아비(2)
“와~ 나 진짜 미치겠네. 뭐가 문제야?”
얀의 일갈을 듣고 순간 주춤했던 트로이얀은 마치 그 사실을 숨기려는 듯이 얀을 향해 짐짓 태연한 듯 말했다.
“가능성이 없어보며? 아닐걸? 이거 봐.”
그렇게 말하며 그가 꺼내든 것은 원통 안에 담겨있는 피.
라엘이 자신의 피를 뽑아갈 때 썼던 주사기와 같은 형상의 물건이었다.
“하이람에게 줬던 혈청이다. 약빨 지리고! 효과도 빵빵해! 그리고 이거!”
두 번째로 꺼내든 것은 투명한 약물. 투명한 액체 곳곳에 푸른빛이 서려있는 물건이었다.
“핏불 테리어들이 채취한 피로 만든 거다. 마력 주입기! 알프라이아에서 쓰는 것보다 50%는 더 주입할 수 있어! 어때?”
얀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몸속에 가득 찬 열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얀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트로이얀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얀을 향해 외쳤다.
“야 이 답답한 새끼야! 내가 다 해준다고! 힘! 복수! 네 비루한 인생에 대한 보답! 근데 뭘 그렇게 고민하고 앉아있어?!”
계속해서 자신에게 오라고 외치는 트로이얀의 얼굴에서는, 렌과 같은 생체단말들의 지성도, 관찰자로써의 중심도 찾아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끝없는 탐욕.
오랜 세월동안 겪은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깊은 혐오가 만들어낸 상처투성이의 광기였다.
“설사 그가 저것을 받는다고 해도, 마력을 지닐 수는 없어.”
주먹을 쥔 채 분노를 모으고 있는 얀을 대신해 나선 것은 렌이었다.
“무슨 말이지?”
“그의 피. 기동병기를 운용하면서 나노머신이 주입되었고, 완전히 일체화했어. 이제와서 다른 성분으로 변질시킬 수는 없을 거야.”
무감정하게 이어지는 렌의 말에 트로이얀이 눈을 크게 떴다.
낙담, 실망…. 아니, 차라리 절망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 눈깔은…!”
이윽고 얀의 왼쪽 눈에 시선이 닿은 트로이얀의 눈동자 내부가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씨발…?”
다시 한 번 천박한 욕설이 렌을 향해 쏟아졌다.
“야, 1번. 네 임무가 뭐야. 계승자를 찾고, 보호하는 거잖아! 근데 애를 이 꼴로 만들어놔?! 이 쓸모없는 년이!”
“그의 의지야. 난 그저 지켜볼 뿐.”
조용한 목소리로 답하는 렌의 얼굴은 평온했다.
“지켜봐? 니가 나냐? 관찰은 내 임무고, 네 임무는 보호잖아 이 멍청한 년아! 사지 멀쩡한 상태로 데려와도 모자랄 판에 짝눈으로 데려와?! 심지어 저 기계들을 주렁주렁 달아서!?”
이윽고 분에 못이긴 트로이얀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미친 듯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몇 년 만의 계승자인데!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씨발! 씨발! 씨바아아알-!”
쿠르르르르….
그가 분노하며 날뛰는 것과 동시에 소정도시의 한 구역 전체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얀. 이 반응은….”
“나도 알아. 기다리고 있어.”
조용히 이어진 렌의 물음에 얀의 낮은 목소리가 답해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이번에도 꽝이잖아…!”
진동이 멈췄음에도 분을 다 삭이지 못한 트로이얀이 얀을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쿵-!
- 유감스럽게 됐군. 트로이얀. 모처럼 ‘신선한 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난 자가 있었다.
케인 로렌츠였다.
“이건 또 뭐야.”
예상 밖의 불청객이 나타났다는 것에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트로이얀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케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신선한 몸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트로이얀을 향해 케인이 한 말을 되뇐 얀이 그렇게 묻자, 트로이얀과 얀 사이를 가로막아선 6호 콜로서스의 확성기에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정도시…. 정확히는 이 구역에 잠들어있던 고대인의 기술일세.”
“고대인의, 기술?”
얀이 그렇게 되물으려 하자, 이마를 감싸 쥔 트로이얀이 눈을 질끈 감으며 케인을 향해 말했다.
“야. 씨발 넌 또 뭔데?”
“케인 로렌츠. 바일사르…. 아니, 그저 기사 나부랭이일 뿐이다.”
‘뭐?’
자신의 소속을 명확히 하지 않는 케인의 언행에 얀이 의아해하는 찰나, 짜증이 잔뜩 섞인 트로이얀의 목소리가 수정도시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그 기사라는 새끼가 왜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인류 시설에 흙발로 쳐들어와서, 다 잡은 물고기를 이렇게…!”
그렇게 일갈하려던 트로이얀은 이내 한숨과 함께 체념한 듯 내뱉었다.
“됐다, 씨발. 1번 저 개년 때문에 어차피 꽝이었으니.”
그렇게 트로이얀이 뿌득 이를 갈아 붙이는 사이, 콜로서스의 확성기를 통해 케인의 목소리가 얀에게로 내리꽂혔다.
“잘 듣게. 얀 소령. 이 시설, 수정도시에는…. 인간의 육체를 갈아 끼우는, 영혼을 옮기는 기술이 잠들어있어.”
“영혼을, 갈아 끼운다고요?”
“그래. 저 생체단말의 정신을, 자네에게로 옮길 수 있는 기술을 말이지.”
그 말에 얀은 조용히 탄식했다.
“그래, 그런 기술이 있을 수도 있겠지.”
이미 아이의 몸에 수백 년 분량의 지식과 경험을 주입하는 기술이 있다.
그렇다면 그 기술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고대인이라면, 그 범위를 바꾸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겠지.
지식이 아닌 인격을, 경험이 아닌 자아를.
“아~ 진짜 듣고 있으니 미개해서.”
그렇게 말하며 대화에 끼어든 것은 트로이얀이었다.
“영혼이 뭐냐 영혼이? 하여튼 고상하셔 정말.”
- 그러는 네놈은 지나치게 천박하고 말이지.
확성기를 통해 케인의 조롱이 이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도 별 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을 케인이었지만, 그 변화를 눈치 챈 이는 렌 혼자뿐이었다.
“천박? 구 인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보노보 새끼들이, 지금 나한테 천박하다고 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한 트로이얀이 더 못 참겠다는 듯이 허공에다 대고 손짓했다.
“야. 더 못 들어주겠다. 그냥 여기서 다 뒤져버려.”
트로이얀이 그렇게 말하자 케인의 콜로서스가 그를 향해 거대한 검을 겨눴다.
- 아무리 생체단말이라 해도, 오러 블레이드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네 잘난 계획도 여기서…!
케인이 그렇게 말하며 검에 마력을 모으는 순간.
“그니까, 닌 씨발 혓바닥이 너무 길다고요 이 고상한 새끼야.”
트로이얀의 한 마디와 함께 케인의 검에 불꽃이 튀었다.
카앙-!
- 크윽?!
위험을 감지해 마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단숨에 검이 부서졌을 정도의 충격.
이윽고 그 가공할 위력의 포탄을 쏘아올린 장본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시간을 버는 동안 놀아주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다 뒤져.”
일그러진 미소를 띤 채 이어지는 한마디와 함께, 수정도시의 지면이 미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 이 진동은, 설마?
그렇게 말하며 검을 치켜든 케인의 콜로서스를 둘러싸고, 거대한 사냥개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별히 전투용으로 개조한 핏불 테리어 50기다. 이번엔 너흴 지켜줄 핵탄두도 없는데, 이걸 무슨 수로 막으시려나?”
- 제길! 이렇게 수가 많아서는…!
그렇게 케인이 침음성을 흘리는 때였다.
쿠구궁-
진동.
낮게 울리는 나지막한 진동이 수정도시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뭐야.”
예상에 없던 진동이 감지되자 의아함을 느낀 트로이얀이 뒤늦게 시설 전 구역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한 구역.
자신의 통제권에 놓인 다른 구역과는 달리, 생체단말인 자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비인가구역이 한 군데, 새로 생성되어 있었다.
기동병기 정비시설이 있던 구역이!
“시간을 끌던 건 너 하나뿐만이 아니란 뜻이지. 트로이얀.”
왼쪽 눈의 시야가 점점 바뀌는 것을 느끼며 얀이 그렇게 말했다.
“이 씨발새끼가! 당장 죽여!”
그렇게 외친 트로이얀이 얀이 있는 곳을 향해 핏불 테리어를 돌진시켰다.
쿠오오오-!
- 얀 소령!
위험을 감지한 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곳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얀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소리 높여 외쳤다.
“닐-!”
그리고 그 순간.
투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떨어진 검은 거인이, 달려오던 핏불 테리어를 짓뭉개버렸다.
- 자네, 콜로서스가…!
진회색을 넘어, 완전히 검은 색으로 물든 장갑판의 틈 사이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손톱과도 같았던 이전 형상과는 달리, 완전한 인간의 손 형태.
그리고 왼쪽 어깨에 완전히 장착되어, 목표를 조준하는 레일 캐논과, 오른쪽 어깨에 장비된 거대한 검.
[EUA-014A2, 글레이프니르. 롤 아웃. 파일럿 탑승 대기중.]
닐의 한 마디 함께, 하늘에서 미사일의 폭우가 쏟아졌다.
쿠콰콰콰콰쾅-!
수백 발에 달하는 소형 미사일들이 핏불 테리어들의 등판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거의 대부분의 기체들은 등판에 장비된 포탑이 파괴된 채, 혼란에 빠져버렸고, 관절부에 미사일을 맞은 기체는 균형을 잃고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연극하는 것도 아니고, 이 급한 상황에 똥폼이냐?”
완전히 새로워진 글레이프니르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을 마주하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 보인 얀이 그렇게 말했다.
[농담회로 작동. 주인공의 등장은 항상 늦는 법.]
“하, 주인공은 무슨.”
그렇게 말하며 얀은 내밀어진 글레이프니르의 손에 뭄을 실었다.
“렌!”
이윽고 손을 뻗은 얀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무심코 손을 뻗은 렌이 얀의 손에 이끌려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에 탑승했다.
[굿 모닝 파일럿. 글레이프니르, 동조 개시.]
목덜미에 꽂히는 이질적인 감각과 함께 뒤바뀌는 시야. 그리고 순식간에 눈에 들어오는 트로이얀의 모습을 보며, 글레이프니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메인 파일럿, 얀 베르쿠트. 서브 파일럿, 1번 생체단말. 기체 연결 확인.]
“이,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순식간에 뒤바뀐 전황에 눈을 부릅뜬 트로이얀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역시 투지를 잃어버리진 않았다.
쿠르르르…!
미사일에 당했다고 해도, 그들의 장갑을 뚫는 것은 요원했다.
- 얀 소령!
- 알고 있습니다.
하나 둘 몸을 일으키는 핏불 테리어들을 확인한 얀의 글레이프니르와 케인의 6호 콜로서스가 서로의 사각을 보완하며 서로 등을 맞댔다.
쿵-!
[근접 전투 모드로 전환. 근접무장 장비.]
오른손을 등으로 옮긴 글레이프니르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철컹-! 철컹-!
수납을 위해 접혀있던 검날이 일자로 펴지며, 글레이프니르의 키와 맞먹는 거대한 대검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단분자 커터, 가동.]
닐의 음성과 함께, 온 수정도시에 소름끼치는 진동음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잉-!
- 자네의 등을 맡게 되어 영광이네. 얀 소령.
얀의 대검에 질세라, 청명한 오러를 검에 두른 케인이 그렇게 말하자 글레이프니르의 확성기에서 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금 그 말 한 거, 본가 기사들에게는 얘기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은 두 거인들을 향해, 트로이얀의 지시를 받은 수십 대의 핏불 테리어가 돌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