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원수의 아비.
쿵-
정비시설의 철문이 쇳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다.
이윽고 정비시설의 감지기들이 뻗어 나와 완전한 멸균공간에 옮겨진 글레이프니르의 동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좌완부 및 동체 각 부분에 비규격 부품을 확인. 제거 후 개량형 프레임 이식 개시.]
[관절부의 마모 및 장기간 방치로 인한 노후 현상을 확인. 동 모델의 2차 개량설계 반영 가능. 작업 목록에 추가.]
[외부 장갑 손상률 60%. 전 부위 탈거 후 3차 개량 설계안 반영.]
[후면부 장비무장에 비인가 탄환 사용을 감지. 포신 교체 및 운용능력 개량.]
수천 년 넘게 방치된 그간의 세월과 그 세월동안 거쳐 온 수많은 전투들이 나이테처럼 글레이프니르의 기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외부 장갑 탈거작업 개시.]
우우웅-!
동력로가 돌아가는 구동음과 함께 수많은 기계팔들이 글레이프니르의 거체를 에워쌌다.
철컹-!
어깨의 장갑이 떨어져나가고, 이어서 손등, 팔, 등….
육중한 장갑판들이 하나하나씩 떨어져나가며 장갑판 사이에 숨겨져 있던 글레이프니르의 은빛 내부 골격이 드러나고 있었다.
[프레임 구조 스캔 완료. 복구작업 개시.]
온갖 기계장치와 회로들로 들어찬 글레이프의 내부 프레임에 로봇 팔들이 달려들었다.
끼릭! 끼릭!
마모된 관절과 보조 골격들, 그리고 유압장치들이 새 것으로 교체되었다.
치이이익-!
드워프들이 임시로 복원한 왼팔이 떨어져 나가며 프레임 내부에 남아있던 증기들이 끓어오르듯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윽고 새로운 팔의 골격이 끼워 맞춰지자 닐은 곧바로 주먹을 쥐었다 피며 하나하나 새로워지는 몸의 감각을 확인하고 있었다.
[총3 개의 기초 설계안 및 11개의 개량안 자동 통합 완료. 작업 계획서를 관제 AI에게 전달합니다.]
정비시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얀을 태우지 않은 빈 조종석 안에 수많은 도면과 정보, 그리고 기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외에 인류연방군 표준 장비로써 일부 무장을….]
정비시설의 목소리가 거기까지 울려 퍼졌을 때.
[기체 관제용 AI 닐. 정비시설에 요구사항 제시.]
그 말을 끊고, 관제인격인 닐이 입을 열었다.
[수신된 개량안을 일부 수정 및 추가 무장 탑재, 최종적으로 메인 제네레이터의 출력 제한 해제를 요구함.]
닐의 말에 잠시 말이 없어진 정비시설의 AI가 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수정된 설계안 반영과 무장 탑재를 작업 목록에 추가합니다. 그러나 당 기체의 동력기관은 연방교전수칙에 의해 출력이 제한되었기에….]
[현재까지의 교전 데이터, 및 최종 사용권자의 신체정보를 당 정비시설에 제출. 재차 메인 제네레이터의 출력 제한 해제를 요구함.]
순간, 정비시설의 모든 기계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두 기계가 확인하는 것은 그간 얀이 거쳐 온 전투 데이터.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력으로 이루어진 장벽으로 폭발을 막아내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으로 단번에 콜로서스를 일도양단하는, 케인의 전투영상들이었다.
[본 기체의 최종 임무는 사용권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 그리고 본 AI의 요구는 기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고지함.]
그렇게 말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제출된 영상 데이터 검토 완료.]
기계장치들과 함께 정비시설의 AI의 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공 인격체 운용수칙 312항에 의거, 당 AI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최종 설계 제출.]
그 말과 함께 로봇 팔들이 글레이프니르의 흉부장갑을 탈거해내고, 가슴 정중앙의 동력로를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장착 가능한 추가 무장으로 A형, D형, G형 장비가 있습니다. 장착 예정인 장비를 선정해 주십시오.]
정비시설의 AI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어지는 닐의 대답은 빨랐다.
[전부 다.]
***
“이야~ 설마 EMP라니, 이 시대에 전자전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뭐야?”
전자전?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얀이었지만 눈앞에 찾아온 목표를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철컥!
“어, 뭐야. 쏘게?”
눈앞에 권총이 겨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얀의 표정은 능청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 너도 생체단말이라고 했지.”
자신의 옆에 선 렌처럼, 손으로 총탄을 튕겨내고 맨손으로 기계병기의 장갑판을 우그러트리는 인조인간.
그 사실을 알아챈 얀이었지만, 그럼에도 겨누고 있는 권총을 놓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미운 털이 박혔나보네. 죽자고 싸우기 전에 이유라도 알았으면 한다만?”
“이유?”
아예 모르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입가를 비튼 얀이 트로이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이람 벨커스를 키우고, 그를 백작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어. 맞아.”
깔끔한 긍정.
그 말과 함께 얀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탕! 탕! 탕!
연달아 세 발. 그렇지만 트로이얀은 굳이 손을 들어 막을 것도 없이, 그의 주변에 떠 있던 두 대의 무인 드론에게 손짓하여 날아오는 총탄을 막아냈다.
“칫.”
“보아하니 하이람 녀석한테 원한을 진 거 같은데, 어지간히도 돌아왔네. 본인을 죽이면 될 걸 왜 나한테 난리야?”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비웃는 트로이얀을 보며 얀은 이를 악물었다.
“그 개자식 하나만 죽여서는 분이 풀리질 않으니까. 그 녀석이 가진 것, 쌓아올린 것. 전부 무너트리고 고통 속에 죽어가도록 할거다.”
“허허? 아주 독종이구만 그래? 하긴, 이래야 계승자 키우는 맛이 나지.”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어 보인 트로이얀은 이윽고 얀의 옆에 선 렌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가를 비틀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1번.”
“….”
대답이 없는 렌을 잠시 바라보던 트로이얀은 이윽고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난 이미 하이람 그 새끼 손절쳤거든? 복수할거면 딴 데 알아봐라.”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그렇게 말하자 다시 한 번 얀의 총이 불을 뿜었다.
캉! 카캉!
“네놈이 하이람에게 건넨 기술 때문에 내 어머니가 살해당했다. 근데 단순히 손을 뗐으니 살려달라? 제정신이냐?”
“…하, 나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트로이얀이 못 이기겠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못 죽이는거, 피차 힘 빼지 말고 얘기나 하지? 여기까지 쫒아온 상으로, 재밌는 얘기 해줄 테니까. 응?”
“정말로 내가 널 못 죽일 거라고…!”
“벨커스의 과거. 그리고 그 힘의 근원.”
얀의 일갈을 끊고 이어진 트로이얀의 한마디에 얀의 말이 중간에 멈췄다.
“이제 좀 구미가 당기나?”
그렇게 말하며 이죽거리는 트로이얀을 보며 얀은 거칠게 혀를 찼다.
“뭐, 들어봐. 하이람을 죽일 생각이라면, 아마 너한테도 꽤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한 트로이얀의 입이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
자!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하이람의 출신이 식민지라고? 그건 조사를 잘못 한 거야. 그 녀석은 제국 출신이거든.
뭐야, 못 믿어? 그럼 믿지 마.
뭐 어쨌든, 내가 그 녀석이랑 만난 것도 식민지 무인지대에서였지.
난 지금 대륙에 퍼진 생명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신체를 연구하는 것을 사명으로 지닌 생체단말이였어.
그렇지만…. 모종의 사건이 있어서 말이야.
상반신 제외하고는 전부 아작나버렸어.
뭐, 이건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넘기자고. 응?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날 살려주는 대가로, 그 녀석은 내가 만들어낸 혈청과 용도, 그리고 제조법을 배웠어.
내 수발을 드는 대신에, 내 기술을 줬다는 거지. 기브 앤 테이크. 맞잖아?
뭐, 어쨌든, 그 혈청 안에 들어있는 것은 검의 시대에 전설적인 활약을 한 루브라의 영웅, 하이람의 마력과 기술정보였어. 한번 주사하기만 하면, 곧바로 너와 같이 싸우던 그 금발 같은 괴물이…! 아 쫌, 총 치우라고!
자. 그렇게 얻어낸 압도적인 힘으로, 그 녀석은 전대 벨커스 가문의 가주를 결투로 살해했어.
그리고 반대하는 가문의 일원들을 모두 유폐하며 벨커스를 장악해 15살의 어린 나이에 가주의 자리를 차지했지.
그리고 그가 22살이 되는 날까지, 그는 나와 함께 옛 인류의 기술을 독자적으로 수집하고 실험했어.
실험체? 가문 사람들을 유폐했다고 했잖아? 그게 다 어디에 쓰였을 것 같아?
뭐, 내 실험은 실패였지만, 그 녀석은 자신이 원하던 대로 '벨커스의 피'의 원형을 완성했지.
그렇지만 그래봤자 결국은 되다 만 인간. 인류의 기술을 재현하는 건 둘째고,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 벨커스의 피라는 물건이 서서히 부작용을 나타내기 시작했지.
만들어내기 시작한 기사들은 반발작용 때문에 죽어나가고, 내가 준 혈청도 약빨이 다 돼서 말이야.
하이람 그 새끼, 이제는 평기사 한 명 정도면 잡을 수 있을걸?
그러면 그 새끼 목적이 뭐겠어?
제 2의 트로이얀이지!
선조의 기술을 알고, 그것을 전수할 수 있는 나같은 생체단말들!
그리고 자기 힘을 완전히 되찾게 해 줄 영원불멸한 피!
근데, 이 대륙에서 그런 피를 가진 게 누굴까?
내가 보기엔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데?
***
“…그래서, 그 하이람을 손절친 이유는 뭔데?”
트로이얀의 이야기를 듣던 얀은 얼굴을 찌푸린 채 그에게 물었다.
“굳이 따지자면 반대야. 그 새끼가 날 손절 쳤지. 내게서 빼 갈 기술이 없다고 판단해서, 날 알프라이아에 팔아넘기려 했어.”
“하!”
기가 찬다는 듯이 얀이 코웃음 쳤다.
“그렇지?! 야, 웃기지 않냐?! 내가 지한테 해준 게 얼만데! 옷도 못 사입던 거지새끼 어르고 달래며 키워놨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 씨발!”
고대인이 만들어낸 인조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한 언행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 그때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안그래도 안움직이는 다리 때문에 열불 나는데 새 다리랍시고 몸에 이 지랄들을 해놓질 않나, 다음 후보로 키워놓은 반쪽짜리는 하이람 새끼랑 만나더니 갑자기 잠적하지를 않나.”
푸념삼아 늘어놓는 트로이얀의 잡담이 들려오자, 순간 얀은 표정을 잃어버릴 뻔 했다.
“…라엘?”
나지막이 떠오르는 이름을 되뇌자.
“어? 뭐야, 너 걔 알아? 요즘 뭐하고 지낸다니?”
‘열두 살 때 정보국장을 만났습니다.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그래. 너였구나.
넌 하이람에 이어, 라엘까지 만들어내 그걸 내 앞에 들이밀었구나.
“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 동업 하나 안할래?”
“….”
대답 한 마디 없이 얀이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손을 휘저은 트로이얀이 얀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하이람 벨커스, 그 새끼가 용서가 안돼! 너도 그렇잖아!”
“….”
말이 없는 얀을 향해 트로이얀의 일갈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살해당했다며! 그건 따지고 보면 내 탓이 아니라, 그 기술을 네 어미한테 쓴 하이람 그 새끼 잘못이잖아! 안그래?”
꿈틀.
쥐어진 얀의 주먹에서 실핏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칼로 사람을 죽였다면 칼을 쥐어준 칼장수를 죽이냐? 칼든 놈을 죽여야지! 안그래?”
얀은 그의 열변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뭐라 대답 좀 해 봐. 야, 이 새끼야! 뭔 송장이랑 대화하는 겄도 아니…!”
“야.”
낮은 목소리.
조용히 트로이얀을 부른 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너 이새끼…?”
만들어진 인조인간이 인간의 살기를 느낄 수 있을까?
이전에 그런 생각을 해본 기억을 떠올린 렌은 트로이얀의 표정.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얀을 보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아가리 한번만 더 움직여 봐. 그대로 쌍판을 갈아 마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