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진실이 잠든 곳(3)
“케르단 전선에서 클라우스 황자님께서 말씀하셨죠.”
잠시 기억을 더듬던 얀이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타우르 사건 때도,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고대인의 유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글레이프니르에 처음 탔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자신의 피 때문인지.
짜증섞인 한숨을 내뱉자 부대원들 사이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렌 또한 눈을 내리깔았다.
“30년 전 발굴되어, 밀란드를 통째로 날려버린 고대인의 유물.”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지는 못한 듯, 얀의 말을 받은 케인이 그렇게 말하자 바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의 폭발로 도시를 날려버릴 수 있는 거대한 폭탄. 그것이 선조의 위광이며…. 저희 교국이 가지고 있는 비장의 무기입니다.”
그 말을 들은 케인이 주먹을 쥐었다.
“20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물입니다. 교국은 그것을 발굴해서, 운용까지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전쟁을 하지 않는 국가. 종교국가라는 방패막이 뒤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무기를 축적하고 있었다니.
교국이 자체적으로 콜로서스를 보유했을 때도 외교적인 잡음이 끊이지 않았을 정도인데, 이 사안은….
“저희가 왜 제국과 알프라이아 왕국에, 하물며 잔스카르에게조차 도움을 구할 수 없는지. 이젠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국에 대한 침공 같은 문제가 아니다.
존재가 알려지는 순간 교국은 창조주의 유물을 가진 위험분자가 되어, 양 국가의 공적이 된다.
그것을 짐작한 케인이 헛웃음소리를 냈다.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저희들도 섣불리 발을 뺄 수는 없다는 뜻이군요.”
오러 유저가 된 이후,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게 될 수 있게 된 케인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력 보유자.
무장을 갖춘 엘프들 수십 명이 자신들이 위치한 회의장을 샅샅이 감시하고 있었다.
‘얀.’
‘알고 있습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얀과 케인을 알아챈 것은 바얀이었다.
“교황 성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아무쪼록 양해를.”
그렇게 말하며 먼저 고개를 숙이는 바얀을 보며 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좋습니다. 저희도 반드시 수정도시에 진입해야 하니, 그 협조를 위한 거래라고 해 두죠.”
다른 제국의 인사가 이런 취급을 당했다면 당장에 칼부터 뽑아들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케인은 켈트 2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교황성하의 뜻은 선조의 위광…. 창조주의 유물을 저 기계들에게 사용하겠다는 겁니까?”
“정확하시네요. 맞습니다.”
창조주의 유물을 사용해 창조주의 유산을 파괴하겠다.
고대인을 섬기는 창조주 교단의 수장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불경한 말이었다.
“성하의 의지는 둘째고, 추기경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렇게 말한 것은 케인의 옆에 앉아있는 얀이었다.
교황이라는 직책이 어떤 것인지,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얀의 한 마디에 잠시 입을 다문 교황이었지만, 이내 그는 옅게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추기경들의 동의는….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말은…?”
교황의 말에 케인이 놀란 듯 운을 떼자 고개를 끄덕인 켈트 2세가 말을 이어갔다.
“교황의 직책에 있다고는 하나, 창조주의 유물을 멋대로 반출하여 그것으로 창조주님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행위는…. 이단이죠.”
이단. 지나가듯이 내뱉은 교황의 그 말에 옆에 기립한 바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일이 모두 끝난다면 전 종교 재판을 받고…. 화형 될 겁니다.”
“화, 화형이라니!”
깜짝 놀란 케인이 그렇게 외쳤지만 켈트 2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교황은 태어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면 기회가 있을 때 제거하는 게 효율적이지.’
자신들이 교국에 도착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교황의 단독행동에 추기경들이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추기경들은 교황의 행보를 방치한 뒤, 새 교황은 만들어낼 예정이군.’
교국의 위협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은 선조의 위광이라는 유물을 사용하는 것 뿐. 그렇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이단에 해당하는 행위이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가.”
그렇게 중얼거린 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사람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교황에게 독이 든 성배를 마시게 한다면, 교국의 위협과 교황 본인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
“이딴 모략을 꾸미는 게 성직자라니, 저들이 신이랍시고 받들어 모시는 고대인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려나?”
나지막한 말소리에 회의실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얀에게로 모였다.
“얀 소령. 교황 성하의 안전일세. 우리끼리라 하더라도 그런 언행은….”
“아, 아닙니다. 베르쿠트 경은…. 아마 대륙에서 유일하게 그렇게 말씀하실 자격이 있을 테니까요.”
“…예?”
‘아, 그러고 보니 설명을 제때 안했었지.’
이제와서 더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얀은 옆에 앉은 케인의 귓가에 라엘과 타우르 사건 당시의 내막을 알려주었다.
“피? 그럼 자네가 글레이프니르를 움직일 수 있던 것도?”
“정비반장 말로는 그것 뿐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는 셈이죠.”
내막을 알고서야 케인은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국에서의 얀은 일개 제국 기사가 아닌, 창조주의 시련을 통과중인 손님이며, 창조주의 후손이 될 가능성을 지닌 후보자.
추기경들에게 있어서, 얀은 적어도 고대인의 기술로 만들어낸 교황보다는 높은 서열에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볼멘소리 하나 없군. 하여튼 착해빠져서.’
오랫동안 홀로 간직한 비밀을 뒤늦게 털어놓았음에도 케인의 눈에서는 책망이나 허탈함 같은 감정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전선은 지금도 침공이 계속되는 겁니까?”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얀의 물음에 교황이 고개를 저었다.
“한 대에서 두 대 정도가 장벽 내부로 침입할 뿐입니다. 다만 그 기계들이 마을을 습격해서….”
그렇게 말하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교황을 보며 얀이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틀어막은 교황 대신 성기사 바얀이 입을 열었다.
“마을 주민들을 잡아서…. 피를 뽑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엘프들만 골라서요.”
바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얀과 케인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엘프의 피…? 방금 얀 소령이 설명대로라면 이건…?”
“하, 이런 씨발.”
반 년이 넘는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은 이곳이었다.
창조주의 유물, 엘프, 그리고 피.
지금도 무너진 고대시설에 묻혀있을 붉은 머리의 꼬마를 떠올린 얀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두 분은 제국에서…. 어쩌면 현재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이실 겁니다.”
“….”
케인은 굳이 거기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러 유저. 검의 시대에 활약했던 기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가 케인 로렌츠였다.
“그러니 교황으로써, 한 나라를 책임지는 이로써….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교황 켈트 2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부디 켈트 교국을…. 이 나라의 국민들을 도와주십시오.”
창조주 교단의 1인자인 교황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례 없는 광경에 바얀이 당황할 틈도, 놀란 케인이 교황의 몸을 일으키려 할 틈도 없이, 곧바로 얀의 반문이 들려왔다.
“성하께서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 자체가 추기경들의 의도대로라는 것. 본인께서 가장 잘 아시겠죠.”
그 말에 켈트 2세는 반박하지 않았다.
“추기경들의 목적은 교국에 닥친 위협과 동시에, 당신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하께서 저희와 접촉하실 수 있었을 테죠.”
그 말에 몸을 일으킨 켈트 2세가 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비슷한 질문을 그에게 건넸을 때, 웃는 얼굴로 그가 답한 한 마디.
그때와 닮은 표정과 말이, 어린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
장벽으로 향하는 열차는 대부분 물자 수송을 위해 차출되었기에, 얀과 케인은 어쩔 수 없이 콜로서스를 통해 대장벽으로 이동해야 했다.
“전 대원 탑승 확인!”
“성기사단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중대 출발!”
잘 정비된 철도와는 달리 북반구에 위치한 켈트의 육로는 만년설에 뒤덮여 일반적인 군용 차량으로는 지나갈 수 없었다.
바퀴 대신 무한궤도를 달고, 전면부에는 굴착기를 설치한 켈트 교국의 수송차량 세 대가 앞서나간 케인의 6호 콜로서스를 따라 북쪽으로 출발했다.
[파일럿 탑승 확인. 글레이프니르, 시스템 기동.]
우우웅-!
캄캄한 글레이프니르의 콘솔이 온갖 색이 들어찬 교국의 모습을 담았다.
이윽고 일정한 속도로 교국의 설원을 가로지르는 사이,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선조의 위광. 어떤 물건인지 알아?”
그 말은 인공지능인 닐이 아닌, 자신의 뒷좌석에 등을 맞대고 앉은 렌을 향한 말이었다.
“인류연방 창설 이전, 대전쟁 시대에 사용했던 전술 핵탄두. 현재 교국이 보유중인 건 한 발.”
“핵…. 탄두? 그게 뭔데?”
얀이 그렇게 되묻자 렌은 조용히 얀의 조종석 화면에 관련된 정보를 표시했다.
“…이런 미친, 고대인들은 전쟁에 이런 걸 날리고 다녔단 말이야?”
“날렸어. 이것의 몇십 배나 거대한 걸로. 수십만 발을.”
홀로그램으로 표시된 것은 글레이프니르의 주먹에 들어갈 만한 포탄. 탄피에서 빠져나간 탄두처럼 뭉툭한 원뿔 형태의 물건이었다.
그것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영상과 폭발범위, 그리고 폭발 시 일어나는 현상들이 기록된 영상들을 본 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정신이 나갔군. 콜로서스고 전함이고, 다 무용지물이야.”
표시된 선조의 위광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직경 수 십 킬로미터를 말 그대로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대한 폭탄.
폭압과 열만으로도 온갖 방어요새와 군사시설을 지워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장비 제원 산출 완료. 거주구 방어유닛, 핏불 테리어와의 교전 데이터 대조. 결과 출력.]
닐의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이전에 싸웠던 핏불 테리어의 모습이 화면 구석에 나타났다.
폭발에 휘말렸을 때 입을 수 있는 손상부위와 그 정도, 기타 여러 가지 정보가 가득 적혀있는 화면을 본 얀은 혀를 내둘렀다.
“이걸로 전쟁을 했단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군. 하나같이 이 폭탄에 대비가 되어있어.”
페이지가 운용하는 장비들로는 흠집도 낼 수 없었던 것이 장벽 건너편에 깔린 핏불 테리어였다.
[입력된 작전에 댄 시뮬레이션 결과, 해당 방법으로 적 군집에 끼칠 수 있는 피해는 약 30%로 추정. 무력화는 불가능 하다 판단됨.]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교국에서 제작한 전용 대포로 탄두를 발사,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얀과 케인은 포대를 방어하는 병력을 지휘, 혹은 선봉에 서서 핏불 테리어들을 상대할 계획이었다.
“이대로는 이걸 써도 막기는커녕, 자극하는 골만 되겠군.”
그렇지만 교국의 기술수준으로 만들어진 대포로는 탄착지점도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압력을 받아 변형이 일어난 탓에 폭발의 위력도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 닐의 계산이었다.
“글레이프니르에 장비된 포로는 솔 수 없나?”
[불가능. 열선포에 핵탄두를 장비할 시, 발사 시점에 유폭할 위험이 있음.]
“미치겠군.”
그렇게 말하며 얀이 혀를 찼다.
교국은 고대인의 기술을 발굴하고 보존할 뿐, 그것을 연구하지는 않는다.
창조주의 기술로 만들어진 기계들이니, 창조주의 기술로 제거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이 서는 것은 당연했고, 애초에 교국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잠깐, 닐. 이 표시는 뭐지?”
콘솔에 표시된 처음 보는 표지에 의아함을 느낀 얀이 그렇게 묻자 곧바로 닐의 대답이 들려왔다.
[해당 표시는 EMP 폭발에 의한 일시적인 기동 정지를 의미함. 해당 개체인 핏불 테리어의 경우, 자율 수리모듈이 기동하는 데까지 3분, 완전히 수리되는데 까지 7분의 시간이 소요됨.]
“기동 정지라…. 그 말인즉, 10분 동안은 폭탄에 맞은 놈들이 굳어버린단 말이지?”
[긍정.]
닐의 대답에 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그래도 이 구도가 마음에 안들었는데…. 이러면 해볼 만 하겠군. 여러모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