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11화 (111/186)

111. 편지.(1)

“이건 뭡니까?”

비쿠스 영지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에 한창인 87 독립중대원들을 바라보던 클라우스 황자는 손에 들고 있는 붉은 봉투를 보며 그렇게 묻는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친서일세. 날 루브라-바일사르의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공증도 함께 들어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얀이 표정을 구겼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자네를 보낸 게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의 집무실 책상에는 황제의 친필 서명이 적힌 명령서가 널브러져 있었다.

황제의 친서를 대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불경한 태도였지만, 이 집무실에서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황자님이 황가를 대하는 태도를 모르실 분이 아닐 텐데도, 이런 자리를 선뜻 내주셨다니….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벨커스의 수중에 식민지가 좌지우지 될 바에는, 말 안듣는 자식이 먹는 게 낫다는 뜻이겠지.”

쯧, 하고 거칠게 혀를 차는 클라우스를 바라보며 얀은 황제의 친서가 든 편지봉투를 뜯어 그곳에 담긴 내용을 읽었다.

‘식민지의 혼란을 잠재우고, 훌륭한 전과를 올린 기사 얀 베르쿠트를 황제, 카르디어스 반 바일사르의 이름으로 치하한다. 귀관의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을 기대한다.’

“제국군 사령부 표준 표창이군.”

“수상자가 황제 폐하 본인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죠.”

표창의 내용까지는 알아볼 수 없으나, 황제의 인장이 찍힌 친서가 얀에게 배달되었다는 것, 그리고 얀 자신의 계급이 두 계급 올라간 사실은 전해졌다.

“본국에 돌아가면 또 우체통이 미어터지겠어.”

“좀 작작 했으면 좋겠습니다. 괴롭히는 건지 뭔지.”

황제의 표창과 전사자에 버금가는 특진을 받은 얀은 그렇게 시큰둥한 말투로 황제의 친서를 내려놓았다.

아무런 이름도 가지지 못한 천출, 그 중에서도 형벌부대 출신의 위험분자를 계속해서 치켜세우는 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래도 퍽 재미있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클라우스 황자의 질문에 얀이 되묻자 얕은 비웃음을 띈 채 황제가 말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천출 기사에게 온갖 귀족들이 아양을 떠는 꼴일세. 자네 입장에서는 퍽 재미있을 것 같네만.”

베릭트 황자의 죽음 뒤로 부쩍 냉소가 늘어난 클라우스 황자를 보며 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리 기뻐할만한 가치도, 재미도 없습니다.”

“어째서지?”

“베릭트 황자님의 목숨을 이용하여 얻어낸 지위니까요.”

그 한마디에 잠시 말이 없어진 클라우스 황자였지만, 얀은 그 침묵도, 자신을 바라보는 클라우스의 시선 또한 피하지 않았다.

“…늘 생각하지만, 자넨 참 불손한 친구일세. 얀.”

“그런 황자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비로우시군요.”

어머니의 원수. 10년의 원한을 내비치는 얀과 의형의 죽음을 곱씹는 클라우스 황자였지만, 둘은 화를 내지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얀은 베릭트 황자를 죽이되, 그의 명예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클라우스 또한 얀의 복수를 인정했다.

이 사실이 식민지가 낳은 서로간의 감정의 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아직까지 동료로서 유지시키고 있었다.

“관두지. 황족이 일개 기사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야. 싸운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젓는 클라우스를 바라보던 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 생각보다 싸움 잘 못합니다.”

“…지금까지 자네가 한 농담 중 가장 재미없는 농담이었네. 얀 소령.”

그렇게 서로 악담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이내 피식 웃어보였다.

“그래서, 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사가 된 소감. 어떤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클라우스의 표저에는 늘 보던 짙은 장난기가 서려있었다.

“…그냥 귀찮을 뿐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얀은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아, 베르쿠트 경!”

밖으로 나오자 루브라의 맑은 하늘이 얀을 반겼다.

총독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위병이 얀이 나오는 것을 보자 황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뭡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본 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제랄드 반 바일사르…. 베릭트 황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렇게 말한 뒤 옆으로 비켜선 위병의 등 뒤에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듯한 젊은이가 서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들었습니다. 얀 베르쿠트 경.”

황자의 아들.

황족의 일원이라면 얀을 하대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청년은 그러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그렇습니다.”

자신이 죽인 자의 아들을 그렇게 평하면서도 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남을 보는 듯한, 무감정한 눈빛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것입니까?”

그렇지만 제랄드의 그 한 마디 들은 얀이 표정을 굳혔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되묻자 흠칫 한 제랄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얀을 향해 물었다.

“10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께서는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셨습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제랄드는 계속해서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매일같이 누군지도 모를 이들을 향해 사죄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홀로 식민지 곳곳을 다니셨습니다. 이건 마치 스스로 목숨을…!”

“제랄드 공.”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른 얀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베릭트 황자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기사답게, 명예롭게 싸우셨습니다.”

“…!”

얀의 한 마디에 눈을 크게 뜬 제랄드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이름을 걸고 보증합니다.”

그 한마디에 제랄드의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 으흑! 아버지…!”

그러자 제랄드 주변에 있던 시종들이 황급히 다가와 그를 챙겼다.

“제랄드 공자님…!”

“베르쿠트 경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명예로운 죽음이셨다고….”

“눈물을 보여선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종들의 눈가 또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생전의 베릭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이들 입장에서 악당은 내 쪽이니 말이지.’

울고 있는 이들을 보며 얀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어느 정도 진정된 제랄드는 퉁퉁 부은 눈으로 얀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아버지의 유서입니다. 반란군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작성하신 겁니다.”

“그걸 왜 저에게?”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건네라 부탁하셨습니다.”

얀이 내밀어진 유서를 받아들자 고개를 숙여 보인 제랄드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유서를 전해 받은 그 자신조차도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것인지, 편지를 봉인한 밀랍은 굳어있는 그대로였다.

“마지막 순간에 유언을 남길 대상이, 나 밖에 없었던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속에 베릭트의 유서를 갈무리한 얀은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중대장님.”

“중대 전 병력, 이동 준비 완료했습니다.”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린과 단델을 한 번씩 바라본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중대 전원. 비스크 영지로 귀환한다.”

바일사르 국경지대로 향하는 열차 앞, 모든 준비를 마친 채 도열한 중대원들 사이를 스쳐지나간 얀은 천천히 열차에 몸을 실었다.

객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렌의 모습을 보았을 무렵, 경적소리와 함께 출발한 열차는 루브라의 밀밭을 거쳐 바일사르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적혀있어?”

객실 안.

베릭트가 남긴 유서를 지켜본 얀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그것을 알아챈 렌이 그렇게 물었다.

“닐. 기체 상태는?”

렌의 말에 답할 새도 없이 그렇게 묻는 얀의 머릿속에, 닐의 기계음이 울렸다.

[파손률 32%. 정비를 요망….]

“싸울 수 있나 없나. 그걸 묻는 거야.”

계속해서 정비가 필요하다 아우성치는 닐이었지만, 얀의 목소리를 듣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챈 듯, 곧바로 응답했다.

[전투 기동에는 문제없음.]

“렌. 한 가지 묻지.”

“?”

와락!

들고 있는 유서를 구긴 얀이 뿌득,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14번 생체단말은 지금 어디에 있지?”

***

얀.

자네가 이것을 읽고 있다면 난 자네들이 계획한 대로, 또한 내가 바랬던 대로.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 생각하네.

이제 와서 이 서신을 통해 자네에게 용서를 구할 수도,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그렇지만 이 식민지에서 학살자로써 살아온 10년.

벨커스 가문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식민지를 이용하는 동안, 난 루브라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정보를 모았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숱한 죽은 고비를 넘겼지만, 다행히도 루브라 극동부의 사막지대에 사는 부족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네.

그들이 말해준 벨커스에 대한 정보를 자네에게 전하고자 하네.

알아낸 것은 두 가지.

첫째는 그의 이름. 하이람의 근원일세.

하이람이라는 것은 본래 이름이 아닌, 루브라 왕국에서 왕을 직접 경호하는 기사에게 주어지는 칭호와도 같은 것일세. 지금은 잊혀진 칭호이기에 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루브라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지.

검의 시대에 존재했던, 왕국 최고의 기사에게 주어지는 칭호였지.

제국의 백작이 식민지의 영웅을 일컫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나?

하이람. 그 자는 식민지 출신의 인물이야.

그리고 두 번째는 하이람이 사용하는 기술에 대해서일세.

자네는 생체단말이라는 이들을 알고 있나?

부족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창조주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었을 때 그들을 보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들이라고 하네.

내가 찾아간 부족들은 14번 생체단말인 ‘트로이얀’ 이라는 자를 숭배하고 있었지.

그 생체단말은 당시 사막에 쓰러져있던 어린 하이람을 거둬, 그를 키워냈다는 사실을 들었다네.

그리고 그 생체단말이 하이람이라는 이름의 소년과 함께 제국으로 건너간 뒤 수십 년…. 벨커스 백작가가 태어났지.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명확하네.

하이람 벨커스는, 그리고 벨커스 백작가는 창조주의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집단이고, 그 중추에는 고대인의 심복인 생체단말이 연루되어 있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할 법도 하네. 창조주의 유산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믿기 힘들어하지.

그렇지만 자네라면, 내가 이 정보를 자네에게 전하는 이유 또한 짐작하리라 생각하네.

자네를 따르던 디아나 렌이라는 여인.

제국의 황족이라면, 건국 초기부터 존재해 온 유령과도 같은 가문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있지.

그녀 역시 트로이얀과 같은 생체단말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같은 창조주의 기술을 사용하는 자네라면 이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정보를 전하는 것이네.

이 정보가 미약하게나마 자네의 복수에 도움이 되길 바라네.

얀.

자네가 날 죽이게 될 것도, 그것으로 자네의 분노가 다 풀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능히 짐작할 수 있네.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벨커스의 힘에 기대어 가족들의 목숨을 살린 내 죄는 이 보잘 것 없는 목숨 하나로는 다 갚을 수 없겠지.

그럼에도 난 자네에게, 비쿠스 영지에서 식민지까지 함께하며 알고 지낸 자네에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네.

이 죄인의 고통을 끝내주어서. 그리고 오갈 데 없는 내 말상대가 되어 주어서…. 고마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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