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09화 (109/186)

109. 보라, 결국 파국이다.(2)

“총독부 내부에 해방군이 침투했습니다!”

“관측병은 뭣들 하고있는 거야! 왜 이렇게 빨리…!”

“틀렸습니다! 이미 내성으로 진입했습니다!”

“꺄아아악!”

[총독부 내부 인원, 30% 사살 완료.]

“좋아. 우리도 움직이지.”

총독부의 지형도를 바라보던 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기체를 일으켰다.

“황자님 위치는?”

[중부 정비창에 생체반응 두 개체를 확인.]

“하, 아직까지 설득중이신건가.”

해방군 내부의 벨커스를 알아내는 것이 듄켈의 몫이었다면, 총독부 내부의 벨커스를 알아내는 것은 클라우스의 몫이었다.

그 과정에서 베릭트에게 탈출을 권유한 것만 수십 번이 넘어갔지만, 붉은 망토를 두른 자신의 콜로서스에 몸을 실은 베릭트는 두 눈을 감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형님. 기어코 이 곳에서 죽으실 작정이십니까?”

“아니, 살기 위해 발버둥칠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해방군의 정보를 알아냈다면서 병력을 밖으로 뺀 87독립중대와 동시에 쳐들어온 해방군.

너무나도 쉽게 뚫려버린 내부 성벽과 이상할 정도로 빠른 진격속도.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거나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이 사달을 일으킨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네 덕에 가족들은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구나. 거기에 대해선 내 감사하마.”

“형님도 거기에 타셨다면, 충분히 사실 수 있으셨습니다. 한데 왜….”

얀의 사연을 전해들은 이상, 클라우스는 차마 얀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클라우스는 차라리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도록, 베릭트를 식민지 밖으로 빼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벨커스의 수혜를 받은 총독부 인원들의 명단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베릭트가 숨어있을 은신처를 수배한 클라우스였지만, 베릭트 본인의 의지가 없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쿠르르르르….

“오는군.”

“얀 중위…!”

정비창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는 진동을 느낀 베릭트가 침통한 듯 중얼거렸다.

쿠와앙-!

이윽고 베릭트가 마주보고 있던 벽이 터져나가며, 그곳에서 천천히 진회색 콜로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안광과 장갑판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증기.

한 손에는 제국군 콜로서스의 제식 검이 들려있었다.

쿵-!

검을 잡지 않은 왼 팔을 휘두르자 끔찍한 몰골로 짓이겨진 콜로서스의 상반신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듄켈은, 같이 오지 않은 건가?]

콜로서스의 확성기에 대로 그렇게 말하자 그 자리에 멈춰선 글레이프니르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격자는 한 명도 남기지 않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좀 늦을 겁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존대라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친군데 말이지.]

정중한 존대에 피식 웃어 보인 베릭트가 아직까지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클라우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죽으면, 다음 총독을 부탁하마. 클라우스.”

해방군의 습격과 87 독립중대의 대숙청.

이로 인해 루네스의 벨커스는 완전히 박멸되었다.

지금까지의 암약이 하룻밤 사이의 꿈이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형님….”

“이걸로 날 지지하던 기반세력도, 벨커스의 끄나풀도 사라졌지. 새 총독이 될 너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상황일게다.”

그렇게 말한 뒤 베릭트는 클라우스를 향해 손짓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신호였다.

[황자님. 비켜주십시오.]

차가운 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클라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로…. 이런 방법밖에는 없었는가!‘

얀이 탄 글레이프니르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귀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거대한 검은 거인 앞에 홀로 선 클라우스는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오랫동안 형제로써 알고 지낸 베릭트와의 정이 그의 공포를 걷어내고, 그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직접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걸세! 자네와 같은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일을 하실 수도 있을 걸세! 그러니…!”

[속죄를 하려면 10년 전에 했어야지.]

“…!”

그 자리에서 말문이 막힌 클라우스가 주먹을 쥐었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얀에게 있어 베릭트는 어머니 야니카를 생체실험의 피해자로 만든 근원과도 같은 인물.

클라우스 자신에겐 그를 막을 명분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진정 속죄할 마음이 들었다면,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 칼을 들이대기 전에 용서를 빌었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목소리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철컹-!

글레이프니르의 장갑판이 하나 둘 열리며 그곳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글레이프니르는 천천히 손에 쥔 검을 들어 베릭트가 탄 콜로서스를 겨눴다.

[일어나 검을 뽑으십시오. 베릭트 황자. 지난 10년 동안의 기다림이 제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용서였습니다.]

법관의 선고와도 같은 단호한 목소리가 정비창을 가득 채웠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네.]

얀의 말을 듣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베릭트가 자신의 콜로서스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우우웅-!

맹렬히 회전하는 마력로의 구동음과 함께, 붉은 망토를 두른 콜로서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로렌츠 가문에서 공수한 에퀴테스를 베릭트 전용으로 개조한 콜로서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등장한 검은 색의 몸체 곳곳에는 바일사르의 황족임을 상징하는 금빛 장식이, 가슴팍에는 그의 위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사자의 머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속죄의 자격마저도 남아있지 않으니, 용서를 구하지는 않겠네. 얀 중위.]

쿠구구구구…!

기체 옆에 거치되어있던 거대한 검을 꺼내든 베릭트의 콜로서스가 얀의 글레이프니르와 마주섰다.

진회색 괴물과 마주선 검은 거인은 그 주인이 이전에 그러했듯, 굳건한 모습으로 검을 치켜세우며 자신의 위용을 만 천하에 드러냈다.

[바일사르 제국 제 6황자, 베릭트 반 바일사르. 기사 얀 베르쿠트에게 정식으로 도전하는 바일세.]

[기사 얀 베르쿠트. 황자님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비창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결투.

검을 들고 마주선 두 콜로서스 사이에서는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은빛 검을 치켜세운 베릭트 황자의 에퀴테스가 순식간에 얀이 있는 곳으로 짓쳐 들어갔다.

카앙-!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마주선 두 거인.

거대한 충돌음이 온 정비창을 뒤흔드는 것과 동시에, 마력을 가득 머금은 베릭트의 에퀴테스가 얀의 글레이프니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동조율 고정 해제. 출력 상승.]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제는 얀의 생각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알게 된 닐이 기체의 동조율을 최대로 끌어올리자, 잠시 백중세를 보이던 두 기체 사이의 힘의 균형이 순식간에 글레이프니르에게로 옮겨갔다.

[끄으으…!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성능이군!]

[많이 듣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베릭트의 출력을 압도하는 글레이프니르는 곧바로 검을 아래로 내려 무게중심을 흩트려 놓았다.

[정겨운 기술이군. 케인이 사사했나보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나지막한 대답과 함께 곧바로 손을 뻗은 글레이프니르가 주먹으로 베릭트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쿠콰앙-!

[크윽?!]

혼신의 힘을 담은 충격에 기체가 크게 요동쳤지만, 내부의 파일럿이 기절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베릭트에게 있어서는 불운일지도 몰랐다.

우드득!

동조율이 올라감에 따라 반응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글레이프니르가 본래의 싸움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슴팍의 사자 두상을 잡아 우그러트리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잡아당겨 조종석을 외부로 노출시키려 하고 있었다.

[끄아아아-!]

그러나 그에 맞서는 베릭트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적 기체, 출력 상승.]

가슴팍을 뜯어내려는 글레이프니르의 한 판을 양손으로 잡은 에퀴테스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떼어낸 것이었다.

끼기기기긱-!

날카로운 글레이프니르의 손톱이 가슴팍의 장갑을 찢어발기며 두어 걸음 떨어져나갔다.

다시 보인 사자의 머리는 얼굴 오른 쪽이 뜯겨나가 처참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델타 콜로서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 글레이프니르의 출력이었다.

아무리 개조가 되어있다 하더라도, 한 개의 마력로를 탑재한 일반적인 콜로서스로는 글레이프니르의 팔을 뿌리치는 것조차도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했다.

[더 없습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는 베릭트와는 다르게, 얀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하, 하하하…. 이래놓고 한때 제국 최고의 기사였다며 자만했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아뇨. 운용은 훌륭했습니다.]

마력배분, 운영방법, 기체 활용.

오든 것이 현직 기사를 상회하는 베테랑의 솜씨였다.

단지 상대가 고대인의 병기였을 뿐.

쿵-!

베릭트 황자가 지친 때를 놓치지 않은 얀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우득! 뿌드득!

손톱을 세운 채 장갑을 우그러트린 글레이프니르가, 이내 주먹으로 조종석을 사정없이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한번, 두 번, 세 번….

위풍당당한 갈기를 자랑하던 사자의 머리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고, 계속된 충격을 견디지 못한 파일럿 또한 마른 숨을 몰아쉴 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6호 콜로서스 다섯을 압도하는 것이 글레이프니르.

그 열화복제판에 가까운 에퀴테스로 이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으지직!

장갑이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베릭트의 몸이 드러났을 대, 할 일을 모두 마친 듄켈의 델타 콜로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끝났나.]

[아니, 아직이다. 이제 끝낼 생각이고.]

짧은 대화와 함께 나타난 듄켈의 콜로서스에는 죽은 기사들의 피가 찐득하게 묻어있었다.

[해방군은 모두 철수했다. 너희 중대도 마찬가지야.]

[남은 건 베릭트 황자 뿐이군.]

그렇게 말하며 베릭트의 기체를 돌아보자 열린 가슴팍 사이로 베릭트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 만이군. 듄켈.”

[….]

글레이프니르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마력을 다 소진한 베릭트 황자는 마른기침과 함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안…. 하네….”

짧은 한 마디.

그러나 그 한 마디를 내뱉은 베릭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한 마디조차도 할 자격이 없지만…. 그럼에도 말 하지 않을 수 없었네.”

그 말을 들은 듄켈은 이를 악문 채 등을 돌렸다.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동정도, 애도도. 30만 명의 인간을 죽인 당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테죠.]

“….”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는 듄켈이었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얀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였던 그 때에는, 즐거웠습니다. 베릭트 황자.]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듄켈은 정비창을 떠났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베릭트에게로 다가간 얀은 천천히 글레이프니르의 주먹을 들어올렸다.

“중위.”

[듣고 있습니다.]

나지막이 얀을 부른 베릭트가 눈앞의 글레이프니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벨커스는…. 자네의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가문일세. 그럼에도 계속, 저들과 싸울 생각인가?”

짧은 물음. 그 말에 입가를 비튼 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이람은 최후에, 당신을 부러워하게 될 겁니다. 베릭트 황자님.”

그렇게 말한 뒤, 얀은 망설임 없이 베릭트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겁니다.”

으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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