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07화 (107/186)

107.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일이라고?”

“어.”

“제국군 군인이 식민지의 반군에게 동업을 제안한 것처럼 들렸는데,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가?”

“아니, 그쪽이 들은 게 맞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 듄켈이 되물었지만, 얀의 표정은 평온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말해봐.”

“자네 제정신인가?”

해방군을 진압하고 식민지의 혼란을 잠재우러 온 부대가, 해방군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베릭트 황자만 하더라도 벨커스의 은폐와 황자라는 직위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웬만한 직위의 인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을 면치 못할 중범죄였다.

“제정신이었으면 어깨에 이런 완장을 차고 다니겠어?”

그렇게 말하며 얀은 한쪽 어깨를 들어보였다.

사람의 팔뼈를 물고 있는 사냥개의 형상.

그 아래에 새겨진 형벌부대의 낙인을 본 듄켈은 헛웃음소리를 내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라면, 어떤 일을 말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듄켈이 자세를 고쳐 잡자 얀 또한 그에 맞춰 표정을 굳혔다.

듄켈의 질문에 얀이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거의 한 달 동안 너희와 치고 박으면서 알았지. 해방군 총수니 루브라의 희망이니 하며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것 치고는, 병력 상황이 열악해.”

단 50명의 병력만으로 루벤 광산을 포위한 87독립중대였지만,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50명으로 120명의 인원을 포위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차치하더라도, 불규칙적인 기동전을 특기로 삼는 해방군의 특성상, 지원 병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외부에서 포위망을 돌파해낼 수 있었으니까.

“외부의 공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진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동안 너희를 지원하기 위해 찾아온 해방군은 단 한명도 없었지.”

당시 해방군의 병력 배치 또한, 외부의 지원을 기대한 진형이 아니었다.

“식민지 전체에 퍼져있는 해방군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분열되어 있어. 내 말이 틀린가?”

얀이 그렇게 말하자 듄켈은 얼굴을 굳힌 채 얀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이라 해도, 그 사고방식이나 의견마저 같을 수는 없네.”

누군가는 루브라 왕족을 내세운 왕정으로의 회귀.

누군가는 봉건 계급 전체를 부정하는 공화정.

누군가는 교국의 비호를 받는 창조주 교단 중심의 신정.

심지어는 지배 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까지….

해방군이라는 깃발 아래 뭉쳐있다 하더라도 사상, 민족, 종교에 따라 수많은 계파로 나뉜 해방군의 실상을 말하는 듄켈의 표정에는 짙은 피로감이 묻어났다.

“해방군의 총수라는 감투를 구성하는 것은 비스크 학살로 인한 여론의 집중도와 벨커스의 자본으로 만든 물질적 우위. 그리고 마력.”

그렇게 뇌까린 얀은 이내 듄켈을 바라보며 짧게 내뱉었다.

“당신은, 벨커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해방군의 상징이군.”

“….”

“다른 해방군 계파들은 이를 어렴풋이 짐작했기에, 세력이 결집하지도, 너희를 지원하지도 않는 것이고.”

뿌드득!

얀의 말을 듣고 있던 듄켈이 이를 갈았다.

그렇게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황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듄켈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벨커스의 힘에 기대 목숨을 유지하는 베릭트 황자도, 그들의 돈에 기대 군대를 부리는 당신도…. 결국 똑 같은 하이람의 꼭두각시야.”

우당탕!

그 말에 듄켈이 몸을 일으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상이 엎어지자 밖에서 대기하던 부대원들 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총수, 무슨 일입니까?!”

“역시 저희도 안으로…!”

“아니,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의 걱정 어린 말을 제지한 것은 듄켈 본인이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하는군.”

벨커스의 돈으로 움직이는 작금의 해방군은 그저 하이람의 도구로 쓰여질 뿐, 진짜 독립은 이뤄낼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얀의 말에 듄켈이 입을 열어 답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그들을 쫓았어. 조금이라도 그들의 입지를 줄이고,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자네의 부대와 만난 것도…!”

“그렇지만 실패했지. 언제나 그렇듯이.”

얀은 굳어있는 표정 그대로 입을 열어 듄켈의 항변에 답했다.

“자, 그런 상황에서. 너희 해방군에게…. 아니, 듄켈, 당신에게 제안하지.”

그렇게 말하며 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난 루네스에 뿌려진 벨커스의 수족을 남김없이 죽여 버릴 생각이야.”

“…!”

벨커스.

그 이름이 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듄켈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동기는?”

“복수.”

“대상은?”

“벨커스에 협조하는 자 전부.”

비스크 학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즉, 베릭트 황자 또한 그 대상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중앙청에 숨어있는 벨커스 측 인사들의 명단과 베릭트 황자의 거처로 향하는 최단 진입 루트를 제공하지.”

어처구니가 없는 얀의 제안에 듄켈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 해방군은, 그쪽 조직 내부에 숨어든 벨커스 인사들의 명단과 위치를 제공하면 돼.”

그렇게 말하는 얀을 잠시 바라본 듄켈은 잠시 입가에 손을 댄 채 생각에 잠겼다.

“그래, 나와 내 부대는 해방군 내부의 벨커스를 축출해낼 수 없고….”

“내 부대는 베릭트와 총독부의 벨커스를 축출할 수 없지.”

같은 아군을 살해하는 것은 그 동기가 명확하지 않고 의문스럽다면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다.

그것이 같은 해방군 동지가 되었건, 식민지에 남아있는 귀족들과 기사들이 되었건.

“해방군은 총독부에 침투해서 벨커스의 인사들을…. 그리고 87독립중대는 해방군 내부에 침투하여 벨커스의 인사들을 축출할 테니, 양 측은 그것을 서로 묵인하자는 거군.”

자신의 계획을 알아챈 듄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얀을 바라보며 듄켈이 다음 질문을 건넸다.

“식민지의 다른 조직을 수배하지 않고, 우리에게 접선한 다른 이유가 있나?”

“한 달간 서로 치고 박았잖아. 피차 편제에 전술에 훈련방식까지 꿰고 있으니, 연계하기엔 가장 적합하지.”

대원들의 숙련도와 장비를 이용한 은밀한 기동과 침투, 장거리 저격과 암습에 특화된 얀의 87독립중대.

그리고 압도적인 신체능력과 현지 지형에 대한 적응도를 통해 단기 돌파와 기동전에 특화된 듄켈의 해방군.

‘만일 하나로 합친다고 가정한다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기동군이 완성되는군.’

두 부대의 연합에 대해 잠시 생각는 듄켈을 바라보며, 얀은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이 성공적으로 잘 끝난다면, 벨커스로부터의 자유와 식민지의 총독인 베릭트 황자를 살해했다는 전과 또한 얻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얀의 얼굴을 바라본 듄켈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얼핏 공정한 거래같지만, 현재 칼자루를 쥔 것은 자네이지.”

“….”

얀이 알아낸 정보를 해방군 내부에 퍼트리는 것만으로도, 듄켈의 계파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만일 얀이 그와 관련된 증거를 확보한 상태라면, 그 위험성은 더욱 컸으니까.

그것을 알아챈 듄켈은 평온한 표정의 얀을 바라보았다.

“동업의 대가로써, 자네는 뭘 원하는 건가?”

그 질문에 대한 얀의 대답은 간단했다.

“일이 전부 끝난 후 반년동안, 해방군은 그 어떤 활동도 없이 대기할 것.”

“…반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한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당장 광산 포위작전을 준비하는 데만 2달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듄켈에게 있어 반년이라는 기간은 그리 큰 손해가 아니었다.

얀이 계획하고 있는 일을 끝낸 직후라면, 반 년이라는 시간은 오히려 해방군과 듄켈에게 있어 회복을 위한 휴식이 될 수도 있었다.

“그 기간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

“그 기간 동안 너희들이 침묵한다면, 그게 우리 부대의 성과가 되거든.”

얀의 말을 들은 듄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87독립중대와 듄켈은 각자의 명목으로 거병하여 타겟을 암살할 테니, 양측은 이를 방조하라.

식민지에서 벨커스의 세력을 축출한다는 소기의 목적 외에, 해방군에게는 총독부 최심부까지 침입했다는 상징과 이로 인한 장기적 원동력을 통해 훗날을 도모하고, 87독립중대는 해방군의 중추를 습격하여 작금의 반란을 막아냈다는 성과를 인정받은 뒤 식민지에서 철수한다.

“전공을 얻는 대가로, 제국이 통제하던 해방군을 식민지에 풀어버리겠다?”

“그렇지.”

“그렇다면 그 다음은?”

벨커스 측 인사들이 식민지 곳곳에 숨어들어 각 계파의 강경파를 자극하여 일어난 것이 작금의 동시다발적 반란이었다.

이런 산발적인 테러가 아닌, 진짜 혁명을 주장한 듄켈이었지만, 활동자금을 대는 이들의 입김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벨커스의 감시가 사라진다면, 난 곧바로 다른 계파를 흡수할걸세. 그곳에 숨어든 벨커스의 개들을 전부 짓밟으며.”

“당연하지. 그러라고 풀어주는 건데.”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얀을 보며 듄켈이 되물었다.

“자네는, 눈앞의 이익과 감투를 위해, 제국을 구렁텅이에 몰아넣겠다는 건가?”

듄켈과의 거래는 당장 얀과 87독립중대의 이익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식민지의 혁명을 방조한다는 것은 제국의 수명을 줄이는 꼴이었다.

“해방군인 내 입장에서는 기회겠지만, 제국군인 자네의 입장에서 이건 조국을 등진 이적행위일세.”

이해타산과는 다른 순수한 의문이 듄켈의 입을 타고 얀에게 전해졌다.

식민지의 해방군, 적과 아무렇지도 않게 거래하는 얀의 행동은 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쳐온 듄켈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네의 이 행위덕분에 제국은…!”

“언젠가는 망하겠지. 근데 뭐 어쩌라고?”

그렇게 말하는 얀의 한 마디에 듄켈은 순간, 표정을 잃을 뻔 했다.

“그게, 무슨…?”

얀의 말을 들은 듄켈의 시선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한 평생 그를 따라다닌 형벌부대의 낙인.

“벨커스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제국이 어찌되든 황제가 어찌되든, 내 알바 아니잖아?”

그렇게 뇌까리는 얀의 눈에 담겨있는 것은 분노. 그리고 수많은 세월동안 그가 겪어온 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뿌리 깊은 권태였다.

“할 말은 다 끝났고, 대답을 듣지.”

그렇게 말하며 얀은 방 한구석에 벗어둔 코트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용건이 다 끝났다는 듯 나갈 채비를 하는 얀을 바라보던 듄켈은, 생각을 마친 듯 얀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강경파에서 계속해서 건의되던 전술안이 있지. 그걸 반영하겠네.”

“좋아.”

듄켈의 승낙에 고개를 끄덕인 얀이 창밖의 대원들을 향해 손짓하자 서로 수신호를 교환한 87중대원들이 하나 둘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정보 공유는 정기적으로 대원을 보내지. 작전 개시는 보름 뒤. 그때까지 준비해둬.”

그 말을 끝으로 건물 밖으로 사라지는 얀을 바라보며, 듄켈은 천천히 입가를 비틀었다.

“역시…. 야시장에서 본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

그와 그의 부대원들의 어깨에 새겨진 낙인을 떠올린 듄켈은 천천히 밖으로 나와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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