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06화 (106/186)

106. 적의 적은 나의 친구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얀의 이야기를 들은 클라우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출신부터 살아온 인생까지, 모든 것이 자신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흙탕이었다.

“복수니 뭐니 무게 잡는 것 치고는 흔한 사연입니다. 저 같은 인간이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니.”

시체더미에서 무기를 주워 팔아 겨우 연명하던 두 사람을 기다린 것은 인체실험과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끔찍한 누명이었다.

차분한 얼굴로 자신의 사연을 풀어내는 얀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듯 담담했다.

감정이 마모된 것인지, 감정을 이입하면 주체할 수 없기에 일종의 벽을 쌓아둔 것인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얀 자신마저도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저 녀석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 나름 행운이라고도 생각하고요.”

방 한구석에 앉아있는 렌을 바라본 얀이 그렇게 말했다.

벨커스의 실험에 희생된 사람이 얀 뿐만은 아니듯, 반 세기동안 이어진 전쟁 속에서 얀과 비슷한 사연의 어린아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발에 채는 것이 고아이고, 시체는 그보다도 더 흔한 것이 작금의 바일사르였다.

아니,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얀과 같은 기구한 사연과 시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황족인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자네 마음을 돌릴 수는 없겠군.”

“….”

대답은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표정을 굳힌 얀의 모습을 바라보며 클라우스 황자는 주먹을 쥐었다.

10년.

단 하루도 살아남기 힘든 지옥 같은 전선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 오랜 세월을 버텨낸 것인지, 그로써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클라우스는 자신의 형을 죽이겠다는 얀의 결심조차도 막아서지 못했다.

혈육의 정으로 막기에는 베릭트의 죄가, 얀과 같은 이들을 만들어낸 제국의, 황제의, 그의 혈육으로써 호가호위를 누려온 자신의 죄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황제 폐하께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형님에게까지 전모가 알려졌을 정도라면 이미 전말을 파악하고 계시겠지.”

“같은 생각입니다. 전쟁을 위해 묵인, 혹은 방조.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개입했을 수도 있겠죠.”

거기까지 말한 얀은 천천히 고개를 저은 뒤 몸을 일으켰다.

“어디로 갈 생각인가? 베릭트 형님을 죽이려고 한다 해도, 지금으로써는….”

“해방군을 막아내는 것과 제 목표.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말한 얀이 뒤를 돌아 클라우스 황자를 바라보았다.

“한 달 동안 풀어둔 정보원이 재미있는 정보를 들고 왔거든요.”

***

루네스의 밤거리. 제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중앙 주택지역을 지나, 남쪽으로 향한 얀이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가 맨 처음 루네스에 도착했을 때 왔던 빈민가.

지금은 죽어 없어진 마렉이 내동댕이쳐진 자리에는 아직까지도 무너진 벽이 수리되지 못한 채 남아있었다.

“어이.”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얀이 뒤를 돌아보았다.

얀의 복장은 검은 색 형벌부대 제복.

식민지인들이 사는 곳, 그것도 빈민가에 군복 차림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제국군이 여기엔 무슨 볼 일이냐.”

“볼 일이야 많지. 해방군 총수가 델타 콜로서스 덕분에 반쯤 죽어있다던가.”

듄켈.

해방군 총수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당황한 듯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황급히 품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했다.

휘릭?!

권총을 꺼내려던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얀이 곧바로 그의 지척에 다다랐다.

품 안의 권총에 손이 닿았을 때에는 이미 얀의 권총이 그의 턱 아래에 닿아있었다.

“거기까지.”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골목 사이사이에서 해방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벤 광산에서 87독립중대와 싸웠던 이들. 아직 피로감이 채 가시지 않은 것인지, 그들의 표정은 그리 편치 못했다.

“경거망동 할 생각 마라. 동지를 죽인다면 네 목숨도….”

“내 목숨? 그걸 걱정할 대가 아닐 텐데?”

얀이 입가를 비틀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튀어나온 해방군들의 미간에 붉은 점이 나타나자 해방군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고지대를….”

“너희 덕분에 이런 시가전엔 이골이 나서 말이야.”

87 독립중대 저격반이 사용하는 소음 라이플.

야간에 수많은 동료의 목숨을 앗아간 총이었다.

“어떻게 여길 알아 낸 거지?.”

“식민지 출신이라면 개나소나 받아들였잖아.”

“하, 천하의 제국군이 미천한 식민지인을 끄나풀로 쓰나?”

“쓰지. 우리 부대는 따지고 보면 너희보다 미천한 출신이라.”

해방군들의 조롱을 그렇게 넘긴 얀이 그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휴식으로 돌려야 할 인원을 계속 경계로 돌리고 있다라…. 예상 외로 광산 포위전이 타격이 컸나보군.”

해방군의 인적자원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지적하며 얀이 그렇게 말하자, 골목골목에서 중대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수류탄과 기관단총을 든 채 민가의 창문 옆 곳곳에 자리한 중대원들을 보자 곳곳에 숨어 얀을 감시하던 이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전투가 있은 지 하루도 채 안됐는데…!”

“가장 약해졌을 때 치는 건 전술의 기본이다. 민간인들 목숨이 아깝다면, 무기 내려.”

고지대를 점거한 87중대 저격반을 본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이미 마을 전체가 저 자의 부대에 포위된 상황이었다.

시장 한복판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던 얀의 모습을 기억해낸 해방군들은 부들거리면서 총을 쥔 손을 놓았다.

“자 그럼,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놨는데 나오지 않았을 리는 없고.”

그렇게 운을 뗀 얀이 어둠이 짙게 깔린 빈민촌을 둘러보았다.

“얌전히 나오던가, 아니면 기어코 피를 보던가. 선택은 당신 몫이야 듄켈.”

허공을 향해 그렇게 외치자 판자집 한 구석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듄켈! 나가면 안됩니다! 그게 저자가 노리는 거라구요!”

“몸도 성치 않은데 왜 자꾸 움직이시는…! 어어어?!”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온 듄켈이 얀과 마주보고 섰다.

마력이 풍부한 엘프들조차도 의도적으로 마력량을 증폭, 폭주시켜야 사용할 수 있는 델타 콜로서스.

그것을 다룬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인지, 처음 만났을 대와는 다르게 듄켈의 얼굴은 매우 초췌했다.

“송장이 다 되었군. 한 달 동안 그 몸으로 우리랑 싸워온 건가?”

빈민가 한 구석에서 튀어나온 여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듄켈의 몸을 받아들었다.

야시장에서 식당을 하던 여종업원이었다.

“팔다리가 다 날아간다고 해도 싸워야지. 내 동포들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얀의 이죽거림에 그렇게 답한 듄켈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얀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듄켈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스크 대학살의 전모를 들었다.”

“…!”

비스크.

그 이름이 나오자 억눌려있던 해방군의 투지에 다시 불이 붙은 듯 곳곳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릭트 황자와의 공조, 벨커스 기사단의 개입까지. 전부 다.”

“베릭트 황자로군. 외부인에게 그 사실을 불어서 뭘 어쩌자는것인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듄켈이 으르렁거리듯이 얀을 향해 쏘아붙였다.

그와 동시에 차가워진 공기를 느끼며 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이상 자극하면 빈민가에 있는 인원 전체가 튀어나오겠군.’

드워프의 기술로 만들어낸 최신식 장비, 훈련, 닐의 정보 공유 시스템.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곳에 깔린 수천 명의 인간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야시장에서의 첫 만남과는 다른 완전한 백중세.

그것을 확인한 얀은 듄켈을 마주본 채 해방군 대원의 턱에 겨누던 권총을 내렸다.

“전원 발포금지. 교전은 허가하지 않는다.”

대원들의 몸을 돌아다니던 붉은 점들이 사라지고, 골목에 있던 대원들 또한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먼저 무기를 내리다니, 평소와는 다르게 겸손하군.”

“쏠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번잡스러운 짓은 할 필요도 없어. 진작에 쐈지.”

언제든지 빈민가를 급습할 수 있다는 얀의 말에 격분한 대원들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듄켈이 눈짓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섰다.

“용건을 말하게. 얀 베르쿠트.”

“말 해야지. 근데 여긴 보는 눈이 좀 많아서.”

듄켈의 말에 그렇게 답한 얀의 얼굴이 미소 지었다.

“배고픈데, 밥이나 좀 먹지?”

***

쿵!

잘 만들어진 요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식탁에 내리꽂혔다.

“다 튀는데.”

“제국군이 우리 집에 눌러앉은 것도 짜증나는데 튀든 말든!”

그렇게 쏘아붙인 여인은 홱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갔다.

방에 있는 건은 얀과 듄켈 뿐.

나머지 양측 인원들은 건물 밖에서 무기를 거둔 채 대치중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나와 독대할 자리를 만들어낸 이유가 뭔가?”

방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듄켈을 잠시 바라보던 얀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해방군이 지금 받고 있는 무기, 장구류, 그리고 콜로서스. 누가 제공하고 있는 거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듄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뭐하자는 건가? 그걸 내가 자네에게 말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대답 안해도 상관은 없어. 이미 파악 했으니까. 단지, 우리가 알아낸 정보가 맞는 건지, 아니면 헛다리짚은 건지. 최종 확인일 뿐이야.”

잠시 입을 다문 듄켈이 피식 헛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노획한 물자를 보면 알아챘을 텐데? 대부분 잔스카르에서 들여오는 거지. 델타 콜로서스 제작기술도 본래는….”

“벨커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자 듄켈의 말이 중간에 멈췄다.

해방군이 보급 받는 무기들의 출처를 알고 있는 것은 해방군 내부에서도 극소수.

잔스카르 내부의 동지들이 물건을 보내준다고 속인 채 벨커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베릭트, 그 자가 말한 것인가?”

한동안 말이 없던 듄켈을 기다리던 얀은 황자의 이름이 나오자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 사람들의 목숨줄이 걸린 일이야. 발설할 리 없지.”

“그렇다면 어떻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얀의 일축에 듄켈이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건 내가 정보를 알아낸 방법이 아니야. 너희 루브라 해방군이 사실은 비스크를 멸망시킨 벨커스 백작가의 2중대였다는 사실이지.”

“그걸 퍼트려서 해방군을 공중분해시키겠다?”

“나쁘지 않지. 그렇게 할까?”

평온하게 얘기하는 한마디에 듄켈이 주먹을 쥐었지만, 얀은 관심 없다는 듯이 식탁에 놓인 요리를 집어먹으며 눈을 찡그렸다.

“역시 여기 음식은 나랑 안맞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얀의 모습에 부아가 치민 듄켈이었지만, 이내 얀이 자신과 독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일을 치르고도 남을 자다. 그럼에도 이곳에 굳이 찾아왔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한 듄켈이 얀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원하는 게 뭔가. 얀 베르쿠트.”

그렇게 말하자 얀의 입이 곡선을 그렸다.

억지로 만들어진 조각상 같은 무기질적인 미소를 보이며 얀이 듄켈의 물음에 답했다.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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