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05화 (105/186)

105화. 야니카 베르쿠트.

십여 년 전 루브라를 정벌하는 데에 성공하며 대륙 동부를 완전히 장악한 바일사르 제국은 인간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대륙 서부를 지배하는 이종족들의 연합 왕국, 알프라이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서로의 멸종을 목표로 한 끝없는 종족전쟁에 의해 양 국가의 사상자는 이미 수백만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국민을 끝나지 않는 전장으로, 참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부스럭! 절그럭!

이 전선 또한 그런 수많은 전쟁터 중 하나였다. 이제는 이름조차 사라진 작은 전투. 시신을 거두는 이 조차 없이 버려진 수천 명의 시체더미 중 한 구석이 울찔움찔 요동치기 시작했다.

“푸하아-!”

마치 물속에서 참았던 숨을 내뱉듯, 썩은 살점과 검게 죽은 피 속에서 얼굴을 내민 그녀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히히, 오늘은 많이 주웠다!”

참호 구덩이에 버려진 총과 탄피, 야삽과 같은 장구류를 한아름 들고 나온 그녀는 이제 막 20대 중반에 들어선 묘령의 여인이었다.

“얀~!”

그렇지만 전쟁터의 한 구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 또래의 아가씨들과 비교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 보였다.

고작해야 일곱 살은 되어 보일까 싶은 행동거지를 보며 한숨을 쉰 소년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외쳤다.

“머리에 묻은 건 좀 떼고 다녀, 야니카.”

양 손에 든 주머니에 시신들의 품속에서 나온 물건들을 갈무리하던 여덟 살 소년의 이름은 얀 베르쿠트.

이 참호 속과 비슷한 시체더미 속에 버려져, 눈앞에 있는 야니카에 의해 거둬진 소년이었다.

“히히, 이것 봐! 나 많이 주웠지!”

그렇게 말하며 양 손 가득 들고 있는 쇠붙이를 들어 보이는 야니카를 바라보던 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같이 쓰레기들이잖아. 요즘은 고철도 잘 안 받는다고.”

그렇게 말하며 얀이 내민 것은 금붙이와 같은 귀중품들이었다.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품에 넣은 약혼녀의 반지, 장교의 품에 들어있는 가족들의 사진이 담긴 펜던트, 인장, 훈장….

소년의 보따리 안에는 하나같이 사연이 가득 들어찬 물건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차있었다.

“그럼 이거로 우리 맛있는 거 먹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너도 이런 걸….”

“맛난 거! 신난다! 와아!”

내가 말을 말지.

말이 통하지 않는 자신의 양어머니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한 얀은 이윽고 그녀의 손을 잡아 마을로 이끌고 갔다.

갓난아기였던 얀을 거둔 것은 야니카였지만, 시간이 흐르고 얀이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둘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어있었다.

전쟁터를 떠돌면서 성장하는 얀과는 달리, 자신의 어머니인 야니카의 정신은 처음 그를 주웠을 때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

이 곳의 골목길을 요령껏 나아간 얀의 눈앞에는 비교적 멀쩡한 모양의 수레가 세워져있었다.

“여기요. 오늘 모아온 거.”

“허, 이번에도 그 참호를 뒤적거리다 온 거냐?”

“일자리가 없어요. 이렇게라도 모아와야죠.”

그렇게 말하며 보따리에 가득 들어찬 잡동사니를 와르르 쏟아낸 얀을 보며 제국군 보급장교는 피식 웃음 지었다.

“거 많이도 모아놨네. 몇 개는 전사자 신원파악에 쓰일 테고, 나머지를 따지면…. 이 정도구만.”

그렇게 말한 보급장교가 수레에서 전투식량 두 개를 꺼내 건네자 얀이 볼멘소리를 냈다.

“이걸론 일주일도….”

“아는데, 우리도 코가 석 자라서 말이지.”

보급장교는 그렇게 말한 뒤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팔다리가 날아간 채 들것에 들려 이송되는 부상병들과 술과 약에 절어있는 병사들의 면면을 본 얀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저 시궁쥐새끼 또 왔어?!”

“잡동사니보다 데리고 다니는 저 년이나 한 번씩 돌리라니까? 두당 10만은 줄게!”

“크하하하하!”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야니카의 앞을 막아선 얀이 외쳤다.

“꿈도 꾸지 마요!”

그렇게 말한 얀이 몸을 돌려 자신들의 텐트로 돌아갔다.

이것이 전장을 떠도는 여덟 살 얀 베르쿠트의 일상. 눈앞에 있는 야니카에게 거두어져,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난민들 중 한 명이었다.

“히히, 얀도 이거 먹어봐! 맛있어!”

“이미 배 터지도록 먹었어.”

한밤중 모닥불에 걸터앉아 통조림을 까먹는 야니카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근처 강가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어 피딱지와 살점을 걷어내자 드러난 금빛 머리칼.

누더기를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릴 수 없는 청아한 외모 덕분에 야니카는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이대로 가면 굶어죽을 거야. 역시 이 곳에 들어가는 것 밖에는….”

모닥불을 바라보던 얀은 어두운 표정으로 품속에 들어있는 인장을 만지작거렸다.

얀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벨커스 백작가문의 인장.

난민들을 저택의 사용인으로 고용하는 일종의 구제사업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얀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하필 우리에게만 이 인장을 건넨 거지? 거기에 왜 하필 야니카를…?’

얀이 가지고 있는 인장은 벨커스의 집사장이라는 자가 야니카에게 건넨 물건이었다.

뭔지도 모른 채 이쁘다며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야니카를 막아선 뒤 자리를 피한 것은 얀의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집사장이라는 인간은 수시로 난민촌을 오가며 자신들을 권유했고, 전쟁터에서 부산물을 주워 파는 생활도 점점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자! 얀도 이거 먹어!”

“아니, 그러니까 내 껀 다 먹었다니…!”

“자! 빨리! 아아~!”

막무가내로 자신을 향해 고기조각을 내미는 야니카를 바라본 얀은 어쩔 수 없이 내밀어진 음식을 입 안에 넣었다.

“맛있지! 그치?!”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야니카를 보며 피식 웃은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야니카.”

“응? 왜애?”

고개를 갸웃하는 야니카를 향해 얀이 물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그렇게 말을 흐리는 얀에게 야니카가 얼굴을 기댔다.

“난 얀이랑 같이 가는 거면 어디든 좋아. 얀도 그렇지?”

그렇게 말한 뒤 얼굴을 부비는 야니카를 바라본 얀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흘리면서 먹지 말라니까, 자! 얼굴 내밀어봐.”

“으으으~!”

“싫다고 찡찡대지 말고!”

허름한 텐트, 기워 입은 옷, 굶주림이 가득한 생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에게 있어 그녀와 함께하는 이 삶의 순간은 항상 행복했다.

***

야니카.

이제는 더 이상 부를 수도, 얼굴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어진 그녀.

그녀와 함께 보낸 난민촌에서의 따뜻한 일상을 떠올리자, 그와 동시에 그녀의 죽음 또한 선명하게 얀의 기억을 파고들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난민촌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고, 치안 또한 악화되고 있었다. 어린 나와 야니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귀족을 찾아 권세의 그늘에 들어가는 것 뿐.’

그런 상황에 찾아온 것이 빈민가의 사람들을 자신의 사용인으로 고용하여 지원하는 벨커스의 자선사업이었다.

얀과 야니카를 포함해, 이 사업의 대상자로 선정된 수많은 난민들은 벨커스 가문의 마차에 몸을 실은 채, 베르카 영지를 향해 이송되었다.

“백작님. 이 여인입니다.”

“호오….”

베르카 영지에 위치한 벨커스의 저택. 말끔하게 차려입은 야니카의 모습은 하녀복 차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 영애 못지않은 귀품을 풍기고 있었다.

“좋아. 이 여인으로 하지.”

그 한마디. 하이람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벨커스 백작의 한 마디로 인해 야니카는 벨커스의 개인실로 옮겨졌다.

그렇게 6년.

벨커스 가문의 하인으로 교육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얀이 열네 살이 되던 해.

만나지 못한 야니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몰래 숨어든 그가 보게 된 것은 그녀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주사자국과 퍼렇게 죽어가는 피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는 야니카의 모습이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야니카가…!”

저택 별실에 감금된 채 고통에 헐떡이는 야니카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자책하던 기억이 났다.

이후 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야니카를 몰래 찾아가 그녀를 지켜봤다.

그렇게 알아낸 사실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벨커스 가문이 야니카를 대상으로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

두 번째는 이대로 가면 야니카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날이 야위어가는 야니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열 네 살의 얀은 그녀를 빼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밤을 틈타 야니카를 들쳐 업은 채 벨커스 저택 밖으로 내달렸고, 보초병에 의해 붙잡혔다.

“보초 두 명을 죽였습니다. 지독한 놈이에요.”

“만일에 대비해 달아두었던 마력 추적장치가 돈 값을 했군.”

그렇게 말하는 집사장의 발밑에는 하인들의 발길질에 곤죽이 되어 널브러진 얀의 모습이 있었다.

“아, 안…. 돼…. 야니카….”

“이 미친놈이 아직도!”

뻑!

복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낸 얀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다.

“허, 피붙이도 아닌 양어미가 그리 소중하더냐? 웃기지도 않아서….”

한밤중에 일어난 돌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내뱉은 집사장은 얀의 멱살을 잡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인들의 주먹에 의해 불어터진 얼굴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쯧, 재수가 없으려니….”

그렇게 말한 뒤 내팽개친 얀의 몸을 하인들이 받아내었다.

“야, 얀….”

고통 속에서도 얀을 알아본 야니카가 쥐어짜듯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이 녀석은 감옥에 가둬라. 나중에 따로 써먹을 구석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이 여자는….”

“아, 저것 말이지?”

숨을 헐떡이는 야니카의 모습을 본 집사장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식민지의 반란 때문에 기사들이 필요하시다 하셨지. 피를 뽑아 혈청으로 가공해라.”

그 한마디에 야니카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라 말하는 것과 같은 무감정한 말투.

그렇게 이틀 후.

“야니, 카…?”

감옥에서 탈출한 얀의 발밑에는 간수와 하인들이 쓰러져있었다.

그렇지만 그 역경을 헤치고 저택의 지하실에 도착한 얀이 최종적으로 보게 된 것은, 모든 피를 뽑혀 버려진 야니카의 시신이었다.

“울며 애도할 시간도 없을 거다. 건방진 꼬맹이.”

벨커스 가문의 집사는 절망한 얀을 붙잡아 일으키며 씨익 웃었다.

“네놈을 고발하마. 얀 베르쿠트.”

“…!”

“전쟁터에서 자신을 거둬준 양어머니를 살해하고, 이를 막으려는 본가의 하인들 다섯을 죽인 죄. 네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야.”

벨커스 가문의 집사장인 밀리엄 벨커스는 그 말과 함께 야니카를 살해한 혐의를 얀에게 씌워 고발했다.

벨커스의 이름을 가진 그의 고발장과 하인들의 탄원으로 인하여 제국은 그에게 존속살해의 죄를 물어 종신형을 선고했고.

전쟁수요를 해소하기 위해, 그를 포함한 사형수 2만 3천명을 케르단 변방전선의 형벌부대로 배치됐다.

다음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