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동료였고, 친구였으나.(2)
“처음 제 영지에 오셨을 때, 황자님께서는 호위를 대동하지 않으셨죠.”
베릭트 황자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운을 띄운 뒤 베릭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방군의 손에 죽을 생각이셨습니까?”
그 말에 클라우스가 눈을 크게 떴지만, 질문의 당사자인 베릭트는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너무 많은 피를 묻혔어. 돌이킬 방법조차도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된 이상, 내 목숨으로라도…!”
“웃기는 소리.”
고통스러운 베릭트의 자책을 중간에 끊은 것은 얀의 목소리였다.
“친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영지민 3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거가 그 잘난 황족의 목숨 하나로 지워질 만큼 우스워보였습니까?”
“중위!”
사정없이 베릭트의 가슴을 찌르는 얀의 추궁에 클라우스가 목소리를 높여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 이상의 행위는 할 수 없었다.
황족에 대한 불경을 따지기 이전에, 눈앞에 있는 베릭트 황자의 죄는 자신이 변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인생 참 편하게 사는군.”
담담하게 이어지는 얀의 말에 고개를 떨군 베릭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만, 한번 시작한 말을 도중에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벨커스의 기사들이 비스크에 진입하는 순간, 듄켈이 탄 콜로서스를 붙잡아 그를 빼돌리는 데 성공했지.”
그렇게 말한 뒤 베릭트는 얀을 바라보며 물었다.
“콜로서스를 탄 듄켈이 자주 사용하는 전술. 알고 있겠지?”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로서스의 관절을 서로 얽어 고정시키는 듄켈의 전술을 떠올린 얀이 이를 악물었다.
“그 방법으로 기체를 묶어서, 영지 밖으로 내보내셨군요.”
“맞네. 함께 활동하던 시절, 내가 알려준 기술이지.”
지도자는 영주에 의해 영지 밖으로 옮겨지고, 영주는 자신들을 버리고 루브라로 향했다.
수십 기의 콜로서스 앞에 남겨진 갈 곳을 잃은 시민들.
그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친구로써의 정 뿐만이 아니야. 훗날 루브라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네! 난 그래서…!”
해방군의 지휘자로써 루브라를 종횡무진하는 듄켈을 떠올린 얀은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란 듯이 가식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식민지인 30만 명을 제물로, 해방군의 총수를 살린다라. 효율적인 안목이시군요.”
부정이나 비난보다도 더욱 깊게 가슴을 파고드는 얀의 한 마디.
“정말이지, 제국의 황자다운 판단입니다.”
이어지는 그 말에, 베릭트 황자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해방군과의 공조를 묵인하는 대신, 식민지의 반란 제압에 협조하라는 것이 하이람의 제안이었지.”
해방군과이 공조가 알려지는 순간, 베릭트와 그 일파는 반역의 죄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거기에 당시 높아지던 독립의 기운을 조절하는 것 역시 무리였겠지.
베릭트가 해방군에 가담했다는 사실과,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무력.
이 모두를 가진 것은….
“반란을 억누르기 위해선 기사가 필요했고,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벨커스 뿐이었네. 기사 수백을 단숨에 만들어낼 수 있는 하이람 의외에는…!”
우당탕!
비스크 영지에 찾아온 수백 명의 벨커스 기사들에 대해 말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킨 얀에 의해 의자가 부서질 듯 크게 요동쳤다.
“중위?”
갑작스러운 상황에 클라우스가 의문을 표했지만, 눈을 부릅뜬 얀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기사를 ‘만든다’고 하셨습니까.”
얀의 그 한마디에 베릭트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떨리는 눈빛과 표정은, 말해선 안 되는 것을 말해버린 자의 그것이었다.
“알고 계시는군요. 벨커스가 기사를 수급하는 방법.”
“…피를 받았다. 그렇게 말했네.”
피.
그 말을 들은 얀이 주먹을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비스크의 학살이 있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맞습니까?”
그렇게 묻는 얀의 목소리에 미미한 떨림이 보였다.
“…그래. 10년 전 겨울이었지. 비스크 뿐만이 아닌, 식민지 전체에 벨커스의 기사들이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했네. 난 그걸…!”
베릭트가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얀의 주먹이 베릭트의 안면에 꽂혔다.
뻐억!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고, 힘이 풀린 베릭트 황자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중위!”
깜짝 놀라 호통 치는 클라우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얀은 쓰러진 베릭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벨커스가 기사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서도, 그들에게 기사를 지원해달라고 하셨습니까.”
“….”
“그들이 기사를 만들기 위해 뽑아내는 그 피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무리 자네라도 황족을…!”
“그만, 가만히 두게!”
황족을 때린 것도 모자라 붙잡아 심문이라니, 평소의 차분한 얀으로써는 하지 않을 극단적인 행동에 놀란 클라우스가 황급히 그를 말렸지만, 그것을 제지한 것은 베릭트였다.
“전쟁일세. 얀 중위. 몇 명의 희생으로 전선을 보강할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이 개새끼가!”
빠악-!
다시 한 번 베릭트의 안면을 후려친 얀이었지만,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던 클라우스가 달려들려던 그를 막아섰다.
“그만! 이 이상은 안돼!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자네는 군법회의야!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크으…!”
머리를 가득 채운 핏기가 빠져나가고 머리가 식은 것인지, 얀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막는 클라우스의 손을 놓았다.
그가 진정한 것을 눈치 챈 클라우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쓰러져 있는 베릭트 황자를 바라보던 얀이 입을 열었다.
“벨커스가 기사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면, 제가 주먹을 날린 이유 역시 짐작하실 테죠. 제 말이 틀립니까? 베릭트 황자.”
“…그래. 자네가 형벌부대에 들어오게 된 건, 그런 이유였나.”
그렇게 되묻는 베릭트를 잠시 바라보던 얀은 이내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몸을 돌려 식당을 나가버렸다.
쾅!
얀이 떠난 문을 잠시 바라보던 베릭트 황자는 이번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학살을 방조한 난 더 이상 루브라의 국민들과 함께할 수 없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내 죄는 사라지지 않아.”
그렇게 내뱉은 베릭트는 클라우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널 부른 거다. 클라우스. 네게 부탁하기 위해.”
격식을 차린 귀족으로써의 말투가 아닌, 형제로써 부탁하는 말투였다.
“날 대신해서…. 루브라의 총독이 되어다오.”
“…!”
갑작스럽게 이어진 제안에 클라우스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무거운 표정으로 베릭트 황자를 잠시 바라본 클라우스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입을 열었다.
“어떤 연유로 제게 이런 부탁을 하셨을지, 짐작은 갑니다.”
같은 식민지 출신의 황자이자, 오랫동안 알고 지내 믿을 수 있는 자.
거기에 황위 계승권도 높지 않은 클라우스에게 있어 식민지의 총독이라는 자리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조건이 있어. 날 믿고 따라군 루브라 파견 인사들의 안전. 그것을 확보해준다면, 네게 전권을….”
“형님.”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던 베릭트의 말을 끊은 클라우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털털한 형.
그렇지만 지금, 그를 보는 클라우스의 시선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식민지의 총독 자리, 받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총독부 곳곳에 들어차있는 벨커스의 수족들.”
그 말에 베릭트가 이를 악물었다.
요란스럽게 자신을 부르던 하인장, 경비대장, 행정관….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벨커스의 지원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한, 그 누가 오더라도 루브라를 정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요.”
당장의 반란의 세를 꺾었다 하더라도, 총독부에 심어져있는 벨커스의 수족들은 언제든지 식민지에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해방군 곳곳에 뿌리내린 벨커스의 끄나풀들과 공조하게 된다면 하이람의 필요에 따라 식민지의 반란을 부추기고,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란의 근원을 뿌리 뽑기 위해선, 우선 식민지에 뿌리내린 벨커스를 처리해야 합니다. 총독 자리에 대해선 그 후에 논의하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 황자 역시, 몸을 돌려 식당을 빠져나왔다.
홀로 남겨진 베릭트 황자는 천장에 걸려있는 샹들리에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씨발!”
쾅!
개인실로 들어온 얀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벨커스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일했어. 눈앞에 원수가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할 줄이야…!”
이를 악문 채 그렇게 말하는 얀의 모습을 바라보던 렌은 얕게 한숨 쉬었다.
“어쩔 생각이야?”
나지막이 들려온 그녀의 질문에 후, 하고 심호흡한 얀이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예외는 없다. 야니카의 죽음에 관계된 인물이라면, 전부 죽여 버릴 거야.”
“이미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어. 그대로 놔두면 자멸해.”
“그럼 의미가 없어.”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렌은 체념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중위. 있나?”
방 밖에서 들려온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린 얀이 문을 열었다.
잔뜩 찌푸린 클라우스 황자의 얼굴을 본 얀은 한숨과 함께 그를 방으로 들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벨커스가 무슨 짓을 했길래 자네가 이런 행동을….”
“….”
자신의 추궁에도 입을 다문 얀의 눈빛을 본 클라우스는 짧게 혀를 찬 뒤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베릭트 형님을…. 죽일 생각인가?”
방금 전 자신이 방에서 한 말을 들은 것인지, 그렇게 묻는 클라우스를 향해 얀이 고개를 들었다.
“라엘과 타우르 사건. 기억하십니까.”
자신과 얀이 처음 만났던 그 때의 사건을 입에 담자 클라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네. 고대인의 유적을 작동시키는 엘프들의 피를 모아…. 고대인의 피를 재현해냈지.”
완전히 미쳐버린 타우르에 의해 부품으로 전락한 하프엘프의 말로를 떠올린 클라우스가 그렇게 말하자 얀이 그에 맞춰 입을 열었다.
“그 당시 라엘이 사용했던 장치. 엘프들의 피를 혼합하고, 주입하는 기계장치에…. 벨커스의 인장이 찍혀있었습니다.”
복수를 위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비밀이 흘러나오자 그것을 들은 클라우스 황자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 그렇다면 자네가 방금 말한 벨커스가 기사를 만든 방법이라는 게…!”
“마력 보유자, 혹은 특정 인자를 가진 이의 피를 뽑아낸 뒤, 가공해서 주입하는 것.”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가 눈을 부릅뜬 채 주먹을 쥐었다.
“벨커스가, 인체실험을 통해 기사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예.”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답한 얀이 그를 마주보았다.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던 저번과는 다르게, 분노와 후회로 얼룩진 처참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얻어낸 기사를 만드는 기술의 재료는, 내 어머니의 피였습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