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동료였고, 친구였으나.(1)
“고생 많았네 중위. 덕분에 기사단 배치가 제 시간에 끝났군.”
“…아닙니다.”
루네스의 기차역.
극동의 바일사르라고 불리는 대도시 루네스의 명성에 걸맞은 거대한 역 안은 이번 전투의 영웅을 맞이하는 제국의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귄 도련님! 무사하셨습니까!”
“베르쿠트 경 덕분일세! 그가 아니었다면….”
해방군에게 인질로 잡혀있다 풀려난 시귄은 수도에서 살고 있는 본가 사람들과 감동의 재회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저희 기사들도 덕분에 무사히 전선기지로 이동할 수 있었어요.”
“저희 가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기사들을 무사히.
전투원이자 방어병력을 마치 신줏단지마냥 싸고도는 식민지 귀족들의 모습을 본 얀은 속으로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해방군이 이곳 기사들을 가지고 노는 이유가 있었군.’
숙련도가 떨어지는 벨커스의 기사라 할지라도, 알프라이아 전선에서 실전을 겪는 기사들은 최소한 실전에 나가 활약할 정도로 실력을 검증받은 이들이다.
그런 이들에 비해, 식민지 내부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인 식민지 기사들의 훈련 상태는 엉망이었다.
‘징발은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 유화책을 쓸 의지도 없고, 민심을 억누를 병력조차 이 꼴인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귀족들의 찬사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얀은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반기는 베릭트 황자를 바라보았다.
“보고는 전해 들었네. 해방군의 콜로서스 손실이 이렇게 크다면 저들도 몸을 사리겠지.”
“가장 중요한 듄켈을 놓쳤습니다. 언제 다시 병력을 모을지 모르는 일이죠.”
“그, 그런가? 듄켈이….”
중앙청으로 향하는 마차 안.
분명 보고서에 적어둔 내용을 말했음에도 마치 처음 듣는 사실인 양 말하는 베릭트 황자를 바라보던 얀은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듄켈을 놓친 게 안타까우신 겁니까? 아니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 하하….”
얼굴을 찌푸린 얀의 말에 어색한 표정으로 쓰게 웃는 베릭트 황자였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얼버무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자세한 얘기는, 도착해서 하지. 때마침, 내가 초대한 손님도 도착했으니 말일세.”
“손님?”
얀이 그렇게 되묻는 그때,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중앙청 본관에 도착한 얀과 베릭트 황자를 기다리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오, 중위. 일은 좀 할만한가?”
웃는 낮으로 말을 걸어오는 검붉은 머리칼을 보며 얀은 황망한 듯 중얼거렸다.
“…클라우스 황자님?”
***
“식민지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허허, 이 친구 좀 보게. 직속상관이 왔는데 경례도 안하는 건가?”
“허례허식은 싫다고 하시길래 생략했습니다만, 중대원들 데려와서 사열이라도 할까요?”
“관두게. 도저히 이겨먹지를 못하겠군.”
오랜만에 만난 얀과 클라우스가 그렇게 주고받는 것을 바라본 베릭트 황자가 웃음소리를 냈다.
부하와 격의 없이 얘기하는 클라우스가 부러운 듯, 흐뭇한 웃음이었다.
“총독부 기사들이 중위의 반 정도만 건방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참 재미있을 텐데 말이지.”
“함부로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형님. 직접 상대하는 전 매일 복장이 뒤집어집니다.”
“그런 것 치고는 꽤 표정이 밝아졌지 않은가?”
얀이 꺼낸 얘기와는 달리, 중간에 클라우스가 낀 식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굴던 가르드 황자 때와는 달리, 스스럼없이 웃음 지으며 얘기를 주고받는 클라우스와 베릭트를 보며 얀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자, 피식 웃어 보인 클라우스가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신기한 광경이지? 경쟁관계에 있는 황자들이 이렇게 지내는 게.”
“중부 전선의 양아치만큼은 아니지만, 좀 딱딱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풋, 하하하! 가르드 녀석 말이지?!”
벨커스의 지원을 받는 제국 2황자를 두고 이어진 얀의 불경한 한마디에 베릭트 황자가 즐겁다는 듯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형님의 어머니이신 제 6황후님과 내 어머니이신 8황후께서 서로 자매지간이라서 말일세. 어려서부터 이렇게 지냈다네.”
“코흘리개 때부터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지낸 사이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베릭트 황자를 바라보고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전선의 상황은 어떤가? 로렌츠의 대승 이후로는 파죽지세라고는 들었네만, 이 나라 신문을 믿느니 차라리 엘프의 말을 믿겠어.”
베릭트가 그렇게 화제를 돌리자 피식 웃어 보인 클라우스가 거기에 응해 제국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로렌츠 가문이 중앙 전선을 뒤집어놓은 뒤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이람의 기사들이 중부전선에 배치되어 뒤늦게 전진하고 있지만….”
“폐하의 중앙군이 움직인 이상, 이 이상 활약을 독식할 수도 없겠지.”
클라우스가 가져온 제국의 소식에 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부 요새를 돌파한 로렌츠 기사단의 손실은 심각했기에, 케인은 기사들을 추스르고 가문의 재원들을 로렌 영지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로렌츠가 전선에서 빠진 동안 전과를 올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벨커스 가문이었지만, 직후 전선에 도착한 황제 직속의 중앙군이 알프라이아 전선을 담당하게 되면서 그 또한 쉽지 않아졌다.
“중도파 귀족과 황제파 원로원들 중 다수도 로렌츠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한 로렌츠의 선전 이후 중앙군이 직접 움직인다라…. 마치 로렌츠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는 듯이 행동하시는군.”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케인을 파견한 것이겠죠.”
카르디어스의 노림수를 파악한 클라우스와 베릭트가 입가를 비틀었다.
중앙 요새를 무너트림으로써 고공행진하던 벨커스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경쟁구도인 케인을 부각시키는 것과 동시에 승기가 기울어진 중앙전선의 인력을 빠르게 자신의 중앙군으로 대체.
“이로써 폐하 당신께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오셨군.”
“그동안 전쟁은 관심 없다는 듯이 행동하시더니, 단 2주일 만에 제국의 세력 판도를 뒤바꿨습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에요.”
로렌츠의 승리가 계획된 것이 아닌, 케인의 각성에 의해 일어난 예상외의 상황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빠른 판단과 추진력이었다.
‘황제는 케인의 각성을 눈치 채고 있었지. 설마 처음부터 그걸 염두 해놓고…?’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예감이었지만 얀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정확한 타이밍에 오러 유저의 각성을 예측한다니. 어불성설이다.
가능할 리가 없다.
“이곳에 중위가 파견된 것도 마찬가지라고 봐야겠지.”
“절 이곳에 파견한 것이 황제폐하시니까요.”
자신에게 델타 콜로서스의 그림을 보여주며 식민지를 진압하라 명한 카르디어스.
그러나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의 이면에는 해방군을 지원하는 벨커스의 영향력을 제거하라는 황제의 의도 또한 담겨있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닌데.’
전선의 대부분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운 제국 최대의 기사가문 벨커스.
그렇지만 그런 벨커스 백작가의 수장인 하이람조차도 몸을 사리게 만드는 카르디어스 황제의 정치력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기회가 생기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상황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고공행진하던 벨커스의 질주를 막아냈다. 지금까지의 하이람의 노력이 가소롭다는 듯이, 너무나도 손쉽게.’
전쟁 주도권이 제국으로 넘어간 이 타이밍에 식민지에서의 영향력마저 잃게 된다면 벨커스, 나아가 그가 이끄는 신흥귀족 파벌의 입지는 단번에 쪼그라든다.
이미 자신이 벨커스의 흔적을 잡아낸 이상, 자신을 식민지에 보낸 황제의 의도 또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듄켈의 파벌이 해방군 내부에서 벨커스의 끄나풀을 숙청하는 시기에 날 위시한 황제의 세력 또한 움직이고 있으니, 식민지의 벨커스 세력도 몸을 사릴 터.’
해방군을 지원하는 벨커스에게 있어서 듄켈은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인지도와 명성 때문에 섣불리 제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거나 회유할 수도 없으니.
“뭐 잡담은 이쯤 하도록 하고, 슬슬 본론을 꺼내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형님.”
황제와 듄켈에 대해 생각하던 얀의 상념을 깨운 것은 클라우스의 한 마디였다.
그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어린 시절의 추억담을 나누던 두 황자였지만, 클라우스가 그렇게 운을 떼자 베릭트의 표정 또한 어두워졌다.
“…듄켈이 말하더군요. 황자님이 비스크의 영주셨다고.”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은 얀이었다.
비스크.
과거 식민지의 행정 수도 역할을 하던 도시였으며, 제국 기사에 의해 30만 명의 시민이 학살당한 도시의 이름이었다.
총독부의 모든 인간들이 입 밖에 내기를 꺼려하는 그 도시의 이름이 나오자, 얀의 맞은편에 앉은 두 황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네….”
“그것도 적의 헛소리입니까? 그렇게 넘기면 되겠습니까?”
이전에 자신의 질문을 회피할 때 그가 했던 말을 꺼낸 얀은 굳어있는 베릭트와 눈을 맞췄다.
“…아니, 맞네. 12년 전. 난 비스크의 영주로써 식민지에 발을 들였으니까.”
“형님!”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비스크의 학살은….”
클라우스의 만류를 뿌리친 얀이 그렇게 말하자 베릭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서슬 퍼런 시선이 얀을 훑었지만 그것을 받아내는 얀의 눈빛 또한 거기에 뒤지지 않았다.
“별로 유쾌한 얘기는 아닐세. 중위. 전투원인 자네가 알 필요는….”
“식민지 내부에 반란을 진압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나지막이 흘러나온 두 번째 경고였지만, 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받아넘겼다.
벌써 식민지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가는 상황. 더 이상 지지부진 식민지에 묶여있을 생각은 없었다.
“반란 진압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상, 관련된 정보는 전부 들어야겠습니다. 그것이 황자님의 치부라고 할지라도.”
베릭트를 향하는 얀의 추궁을 들은 클라우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개 기사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만한 발언.
다른 황족이라면 당장에 노발대발했겠지만, 이미 해방군을 몰아낸 전과가 있는 얀의 발언이었기에 쉽사리 무시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베릭트를 추궁하는 얀의 태도는 자신의 영지인 비쿠스부터 함께해온 베릭트의 성격을 믿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이 이상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지.”
베릭트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입을 다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듄켈이 한 말은…. 아마 대부분 사실일걸세. 난 비스크의 영주로써, 해방군과 뜻을 같이 한 적이 있어.”
“….”
베릭트 황자가 담담히 시인하자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제국 황자가 반군에 가담했었다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수탈이니 뭐니, 제국 황자께서 그런 말투를 쓰신 이유가 이거였군요.”
“….”
열차에서 이뤄진 베릭트와의 대화를 떠올린 얀이 나지막이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아낸 것이 벨커스. 비스크 영지의 영지민은 입막음을 위해 희생된 겁니까?”
“형님 설마 정말로?!”
“아니, 아니야!”
추궁에 가까운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렇게 외친 베릭트였지만, 이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날 따르는 이들, 나와 함께 식민지에 건너온 가족들…. 그리고 내 친구인 듄켈을 위해서였네.”
마치 고해하듯 흘러나온 베릭트의 한 마디는 신음과도 같았다.
죄책감에 처참히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더 이상 얀이 알고 있는 호탕한 황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죄인의 얼굴.
떨리는 그의 두 손이 그가 그동안 겪었던 고통의 무게를 말해주는 듯 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