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루네스의 사자.(1)
“주, 중대장…. 님?”
듄켈의 기체에 온 몸이 묶인 상태에서 어떻게든 마력을 쥐어짜내던 아이린은 결국 과부하를 이기지 못한 채 콜로서스 안에서 탈진했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콜로서스를 인양한 두 기사에게 인사를 건넨 얀이었지만, 그들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중앙청으로 향했다.
“정신이 들어?”
아이린에게 말을 건넨 단델이 그녀의 손을 잡고 기체 밖으로 그녀를 꺼냈다.
콜로서스를 조종한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얼마간 휘청이던 아이린은 겨우 균형을 잡고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첫 기동에 전투까지 치뤘으니, 몸이 많이 상했을 걸세. 콜로서스에 들어가는 마력은 상상 이상이니.”
그렇게 말한 베릭트 황자가 아이린에게 다가가려는 것을 얀이 다가와 막았다.
마치 적을 보는 것 같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해방군의 듄켈이라는 자가 황자님을 ‘배신자’ 라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런 것 보다는 자네 종자를 신경 쓰게. 첫 기동이 기사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그렇게 얼버무리실 수 없다는 거, 황자님께서 가장 잘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얀의 대답에 베릭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얀과 시선을 마주하던 베릭트는 뭔가 말 하려는 듯 입을 열려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적의 세 치 혀에 현혹되지 말게.”
“허세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 치고는….”
“얀 중위.”
더 추궁하려던 얀의 말이 베릭트의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자신이 베릭트를 바라보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목소리였다.
“자네도 대원들도, 갑작스러운 실전에 지치지 않았나. 이 틀 정도 휴가를 줄 터이니, 그동안 몸을 추스르게.”
그 말을 들은 얀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무언의 압박.
눈앞에 있는 이가 제국의 황자인 이상, 일개 기사인 자신이 이 이상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령에 따라, 복귀하겠습니다.”
한숨 섞인 경례를 올린 얀은 이내 몸을 돌려 아직도 휘청이고 있는 아이린에게로 다가갔다.
“아, 중대장…. 님….”
“덕분에 살았어. 근데 콜로서스는 어떻게 움직인 거야?”
“듄켈 이라는 사람이, 중대장님께 총을 겨눠서…. 그걸 보니까 갑자기….”
그렇게 말을 더 이으려던 아이린은 이내 정신을 잃고 단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기절한 것뿐입니다. 몸에는 지장 없어요.”
“그럼 됐고. 방으로 옮겨 놔.”
“알겠습니다.”
희미한 웃음과 함께 단델이 손짓하자 그의 신호를 받고 나온 중대원들이 아이린을 숙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 일정을….”
“부중대장.”
“예?”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을 직급으로 부른 적이 없던 얀이 대뜸 그렇게 말하자 단델이 움찔 하며 얀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번 전투, 네 배치 구상안 덕에 사상자 없이 끝났다.”
“…!”
최소한의 검거 인원만을 대동하려 했던 얀의 계획을 수정하여 전 부대원을 배치한 것이 단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단델이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의 전투도 마찬가지야. 너 때문에 절반이 죽은 게 아니라, 네 덕에 절반이 살아남은 거야.”
“그건 아닙니다. 전…!”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텨. 안그러면 네가 무너진다.”
87 독립중대원으로 활동함에 있어서 감정에 너무 솔직한 것이 아이린의 흠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너무 숨기는 것이 단델의 흠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계속 생각하는 단델을 보던 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맨 처음 이 부대를 만들 때, 네가 말했지. 싸우는 것 밖에 모르는 내 빈 자리를 채우는 게 네 역할이라고.”
케르단 변방전선, 허름한 창고 속에서 이뤄진 박한 사열식을 떠올린 단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었죠.”
이제야 좀 본래 표정이 나오는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얀은 단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렇게 말했다면 네 역할을 해. 이런 데서 고꾸라지면 내가 직접 죽여 버릴 테니까.”
등골이 시릴 정도로 살벌한 위협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단델은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뭘, 새기기까지야.”
단델의 표정을 확인한 얀은 그렇게 말하며 단델을 향해 손짓했다. 복귀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
“추가 정보가 없다고?”
다음날 아침. 87독립중대 전용 숙소.
일반적인 부대 막사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대 주둔지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얀은 루네스에 잠입시켜놓은 부대원들의 보고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 전투에서 콜로서스를 격퇴한 일이 알려진 모양입니다. 해방군으로 의심하던 인원의 절반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아요.”
“듄켈이라는 자가 대장님을 죽이지 못한 게 꽤 충격이었나 봐요. 시민들 중에서도 동요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해방군의 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루네스에서 일어난 전투. 얀과 듄켈의 싸움이 전해졌는지, 해방군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해방군과 선이 닿은 인원은 없나?”
“없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일반 시민들과의 접촉도 최소화하는 모양이에요.”
“하긴, 배신자 하나 때문에 이 사달이 났으니 조심스러워질 법도 하군.”
저크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던 순간을 떠올린 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성급한 판단입니다. 아직 철도망도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콜로서스를 전진배치한다면….”
“보급선 중앙에 구멍이 생겨. 해방군에게 있어선 좋은 먹잇감.”
현장에서의 전투나 전술에 관해서라면 몰라도, 이러한 전략적인 안목은 없었기에, 얀은 단델과 렌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백을 메꾸는 게 향후 우리 중대의 주요 임무가 될 거란 얘기군.”
그렇게 말한 얀이 식당 의자 중 하나에 털썩 걸터앉자 중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를 마친 뒤에야 겨우 눈앞에 있는 식사와 체스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식사 중 업무얘기. 후진적 조직문화.”
“맞아요. 심지어 휴가 중인데.”
“시끄러워.”
렌의 지적에서 이어진 대원들의 볼멘소리에 그렇게 답한 얀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는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해방군의 움직임은 주둔군이 정탐 후 통보, 우린 휴가랍시고 이 막사에 묶여있는 꼴이라.”
베릭트 황자와 대화하기 위해 두어 번 찾아갔으나, 돌아온 것은 부재중이라는 말과 축객령 뿐이었다.
노골적인 대화 거부와 함께 중대 전체가 발이 묶인 상황이 답답한 얀이었지만, 중대원들의 전투피로가 극에 달한 것 또한 사실이기에 별 수 없이 명령을 받아들어 식당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체크메이트.”
얀을 잠시 바라본 렌이 회의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눈앞에 놓인 다섯 개의 체스판에 놓인 말들을 옮기며 그렇게 말하자, 단델의 황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비반장님, 이걸로 25연승입니다.”
“와~! 미치겠네?! 어떻게 한 번을 안 져?”
“심지어 다섯 명이랑 동시에 하는 거잖아?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사람이 아니니까.’
얀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부대원들의 주머니에서 은화를 털어가는 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털어간 은화가 벌써 스물다섯.
다른 부대원들의 한 달 치 봉급이었다.
“작전 회의 하는 중에 한 달 치 월급을 타가는군.”
“오늘 하루 휴가자금으로 쓸 거야.”
“아, 그러셔.”
‘생각해보니 파티장이든 숙소에서든 입에 뭐 하나씩은 꼭 물고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식사를 마친 부대원들은 저마다의 휴식을 위해 흩어졌고,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얀의 눈앞에 렌의 손이 내밀어졌다.
“뭔데?”
“휴가. 에스코트.”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렌을 잠시 바라본 얀은 황망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 그 핑계면 적어도 루네스 시내는 돌아볼 수 있겠군.”
***
고된 노동을 끝낸 뒤, 해는 이미 저물었지만 식민지 최후의 보루인 루네스의 밤거리는 마치 대낮인 듯 밝았다.
“그래서 내가 그 농장주 새끼 얼굴에 쇠똥을!”
“하하하! 구라치고 있네! 니 성격에 잘도 그러겠다!”
“이 도둑놈들! 거기 서-!”
“여기, 맥주 좀 더 갖다 줘!”
마치 노예처럼 탄압받는 식민지인이지만, 그들에게도 일상이 있고, 생활이 있다.
식민지에서 일하는 제국인에 비하면 한 줌 모래에 불과할 정도로 적은 소득임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열린 야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제국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낮의 시장과는 다르게, 5일에 한 번 열리는 루브라의 야시장을 차지한 것은 대부분이 식민지인 노동자들이었다.
“생산되는 물자의 대부분이 제국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식민지인들의 요리는 대체로 그 부산물을 사용해.”
내장, 후두, 천엽, 비장, 심지어는 고환….
도시 중앙에 위치한 제국인 거주구에서 관광이랍시고 야시장을 찾은 이들 대부분은 이 생소한 식재료에 기겁하여 발길을 돌리곤 한다.
“그마저도 이 정도 규모의 시장이 열려야만 맛 볼 수 있다는 거군.”
야시장 한구석에 놓인 포장마차에 자리 잡은 얀은 렌의 추천에 따라 이것저것을 주문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한 복장, 일을 막 끝낸 이들의 먼지 쌓인 웃음소리와 그에 섞여 들어가는 음식 냄새.
떠들썩한 야시장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활기가 자신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주둔지에 있던 때보다 편해 보여.”
“그렇게 보이나?”
“응. 무도회장에 있었을 때보다도 더.”
“어딜 가도 거기보단 편할 텐데.”
얀은 그렇게 말하며 종업원이 가져다 준 음식을 받아들었다.
“그, 그…. 마, 맛있….”
“예?”
“히, 히익?!”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던 종업원은 얀에게 음식을 건네는 것과 동시에 부리나케 도망쳐버렸다.
“왜 저래?”
“항만지구에서 일어난 전투. 전부 소문났어.”
“뭐라고 소문이 났길래?”
“해방군의 공범이라며 시민들을 다 쏴 죽이려 했던 제국군의 미친 개.”
렌의 한 마디를 들은 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식민지인으로 가득 찬 이 야시장의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얀의 복장은 87독립중대의 검은 제복이었다.
“제, 제국군? 도대체 여긴 뭐 하러…!”
“저 제복! 항만지구에서 봤어!”
“쉿! 눈 마주치지 마!”
닐의 음성감지 기능으로 인해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식민지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민지인들만의 축제에 자신 같은 불청객이 찾아왔다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모처럼의 휴가인데.”
“난 일하러 온 거거든.”
그렇게 말하며 얀은 눈앞에 놓인 내장꼬치를 베어 물었다.
불향과 특수한 향료가 어우러져 좀처럼 먹기 힘든 별미였다.
“네 이놈, 식민지의 야만인들아! 당장 물러서지 못할까~!”
“계란이나 먹고 떨어져라, 죽일 놈의 베릭트 황자!”
“이익~?! 이 놈이~!”
“푸하하하!”
“와하하하!”
얀에게 집중된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게 된 것은 시장 한가운데에 저들이 나타난 뒤였다.
흙을 구워내 만든 가면과 버려진 제국군 제복을 기워 만든 우스꽝스러운 옷.
요란한 의상을 걸친 광대들의 공연이 이어질 때 마다 야시장에 모인 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시민들의 성화에 군대를 물린 베릭트를 희화화한 가면극은 점점 더 수위를 올리고 있었다.
“제국 황자를 자처하면서 저런 공연이라, 중앙청 기사들이 본다면 사형감일 텐데.”
“야시장은 중앙청에서 감시하지 않아. 황자의 명령.”
“알면서도 묵인한단 말이군.”
착한건지, 아니면 호구 잡힌 건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식민지인들을 바라보던 베릭트 황자의 모습을 떠올린 얀은 작게 한숨 쉬었다.
원래는 제국 군인으로써 황족을 모욕하는 행태를 벌해야 하겠지만, 광대들을 바라보는 얀은 전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이. 거기.”
“어. 나?”
얀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먹던 꼬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어두운 얼굴의 남자 두 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군 87 독립중대, 얀 베르쿠트가 너냐?”
“그러는 그쪽은 해방군 끄나풀이신가?”
자신을 향해 묻는 두 남자에게 그렇게 이죽거린 얀을 향해, 두 남자가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지?”
목소리.
항만에서 들었던 듄켈의 목소리를 떠올린 얀이 눈가를 좁히며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엇?! 대, 대장님…!”
“저희는, 그….”
그들로써도 이 자리에 듄켈이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다.
“민간인들이 득시글한 야시장에서 헛짓거리 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돌아가라.”
낮게 깔린 목소리에 표정을 굳힌 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자신의 부하들에게 괜찮다며 다독이는 듄켈이었지만, 그 상황을 바라보는 얀은 듄켈의 시선에 날선 냉기가 감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부분열? 파벌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얀이 앉아있는 좌판까지 걸어온 듄켈은 곧바로 얀의 자리에 걸터앉으며 큰 소리로 종업원을 불러 이것저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뭐하자는 거지?”
나지막이 들어오는 얀의 질문에 피식 웃어 보인 듄켈이 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자는 거지. 얀 베르쿠트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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