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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99화 (99/186)

99화. 위장잠입(2)

“아이린, 너…!”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 아이린의 일격에 놀란 것은 얀 뿐만이 아니었다.

- 부대원 중에 기사를 숨겨놓은 것인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듄켈의 기체가 뒤늦게 기관총을 쏘아댔지만, 아이린이 조종하는 콜로서스의 손이 그것을 막아냈다.

- 으윽…!

- 아니, 아니군. 아직 마력을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어.

이게 막 각성한 기사가 곧바로 콜로서스를 다룬다니. 말도 안되는 재능이었다.

그렇지만 듄켈은 거기에 감탄할 새도 없이, 역으로 아이린의 콜로서스에 달려들어 출력으로 그것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 아악?!

- 기세 좋게 등장한 것 까진 좋다만, 기체의 운용능력과 경험은 아직 햇병아리 수준이군!

그렇게 말하는 사이, 눈을 빛낸 얀과 그의 옆에 도착한 렌이 듄켈의 콜로서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렌!”

“알고 있어. 해치를 뜯어낼 테니, 그대로 파일럿을…!”

두 사람이 그렇게 수신호를 주고받는 사이, 얀과 렌의 의도를 파악한 듄켈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 맨몸이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확성기를 향해 들려온 듄켈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기체가 아이린의 조종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무, 무슨?!

손바닥으로 아이린의 조종석 입구를 막아버린 듄켈이 해치를 열고 조종석에서 나왔다.

콜로서스의 관절부를 서로 옭아매 움직임을 봉쇄한 상태였다.

“콜로서스를 버리고, 직접 나온다고?”

예상외의 대응에 눈살을 찌푸린 사이, 사뿐하게 땅에 착지한 듄켈이 목을 좌우로 흔들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백병전은 오랜만인데, 오랜만에 몸이나 풀어보지.”

그렇게 말하는 듄켈을 향해 렌이 먼저 쇄도해 들어갔다.

파앙-!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내밀어진 렌의 주먹.

그렇지만 듄켈이 그것을 어렵지 않게 피해내자, 렌의 얼굴이 이채를 띄었다.

“움직임이…!”

“놀라운 힘이군.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절명할 뻔 했어.”

고글과 두건 너머로 웃으며 그렇게 말한 듄켈은 곧바로 렌의 주먹을 잡아 우측으로 휘둘러 렌의 몸을 던져버렸다.

“이건!”

“신체능력은 가공할 만 하지만, 그에 비해 체중이 너무 가벼워!”

부웅-!

던져진 렌의 몸이 멀찍이 날아간 사이, 곧바로 얀을 향해 짓쳐 들어간 듄켈이 얀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공격 패턴 산출 개시. 도착까지…!]

“아니, 늦어!”

후웅!

닐의 연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짓쳐들어오는 공격을 순전히 감에만 의지해 피해낸 얀이 식은땀을 흘렸다.

‘씨발, 닐의 예측보다 한 박자는 더 빠르다.’

“호오, 이제 보니, 격투에도 조예가 있었군 그래? 점점 더 마음에 드는 친구야.”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듄켈의 발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곧바로 얀의 팔을 휘감으려 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해낸 얀의 왼손이 곧바로 홀스터를 향해 움직였다.

“어딜!”

그러나 솟구쳐 오른 듄켈의 다리가 얀의 명치를 노리자, 황급히 몸을 뺀 얀을 향해 듄켈이 권총을 겨눴다.

개척지대에서 흔히 사용하는 리볼버였다.

[탄도 예측. 관성 제어. 자동회피.]

탕! 탕-!

신체의 전기신호와 나노머신을 조작해 두 발의 사격을 억지로 피해낸 얀이었지만 급격한 가동으로 인한 부하가 곧바로 그의 몸을 덮쳤다.

“크윽?!”

“마력이 없는 몸으로 이걸 피했단 말인가? 놀랍군!”

압도적인 반사신경과 신체 능력으로 얀과 렌을 동시에 압도하는 듄켈.

침음성을 흘린 얀은 떨리는 몸을 애써 바로잡으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데다가, 경험도 기술도 상상 이상이다.’

마력을 지닌 기사를 상대로 얀이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보병이 백병전을 담당하는 전투 체계에서, 콜로서스전을 주력으로 하는 제국이나 알프라이아의 기사는 백병전을 연마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결투나 수련을 위한 검술이 전부.

듄켈과 같이 백병전을 전문으로 훈련한 마력 보유자는, 얀으로써도 처음 만나는 상대였다.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건 아이린이 유일한데, 콜로서스에 갇혀있으니….’

애초에 이럴 계획으로 아이린을 압박해 기체에 묶어놨다는 소리였다.

“질문 하나 하지.”

“질문?”

고글과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듄켈이 얀에게 말을 걸었다.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그 말을 받자 듄켈이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실탄으로 민간인을 위협했다면 해방군의 명성에 흠집을 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공포탄을 쓴 이유가 뭔가?”

그렇게 말하자 얀이 표정을 구겼다.

“그 상황에서 실탄이 나가는 건 오히려 네가 원하는 일이었잖아. 안그래?”

이미 제국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민심은 바닥을 기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제국이 식민지인을 무차별 사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여파는 불 보듯 뻔했다.

“그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고려했단 말인가?”

“원래는 목표를 이송하는 중에 위협용으로 쓸 생각이었어. 너희 덕분에 다 망쳤지만.”

그렇게 말한 얀은 항구 구석에 널브러진 저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이전까지 식민지를 거쳐간 제국군과는 다르군 그래?”

그렇게 말한 듄켈이 얀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었을 때였다.

- 베르쿠트 경! 살아있나?!

“베릭트 황자. 지원이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에 듄켈의 발걸음이 멈췄다.

“더러운 배신자가 방해를…!”

“배신자?”

배신자라니, 베릭트 황자가?

듄켈의 한 마디에 얀이 되묻는 사이, 길가에서 나타난 세 대의 콜로서스가 남쪽 항구를 완전히 둘러쌌다.

- 거기까지다 반란군 놈들!

- 얌전히 투항하라!

베릭트를 호위하는 식민지 기사들의 일갈과 함께 베릭트 황자의 에퀴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베르쿠트 경! 무사해서 다행일세. 부대원들은 모두 안전히…!

그렇게 말하던 베릭트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얀과 대치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챈 까닭이었다.

- 듄켈…?

“하, 이 목소리.”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는 듯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복면을 넘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요. 6황자.”

마치 싸움을 즐기는 듯 친근한 목소리를 내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 네 이놈!

- 어느 안전이라고 제국의 황자님을…!

- 아니, 아니다! 공격중지! 그는…!

황자에게 이어진 퉁명스러운 반말에 분노한 기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베릭트 황자가 만류했다.

- 화, 황자님…?

- 저 자는 해방군입니다. 헌데 공격을 중지하라니요?

마치 해방군 지도자를 감싸는 듯한 행동에 표정을 구긴 것은 호위기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어처구이 없다는 듯이 얀이 듄켈과 베릭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죽이게 두시지, 왜 막는 겁니까!”

그런 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듄켈은 보란 듯이 베릭트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루브라를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이 이제 와서 자비를 베푸십니까?!”

- 아, 아닐세 듄켈! 난…!

“당신이 불러낸 벨커스의 씨앗이 이 나라 전체에 뿌리를 내렸는데, 당신은 그 잘난 성에 처박혀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고 있지 않습니까!”

벨커스.

그 이름이 나오자 얀의 눈이 깊어졌다.

식민지에서 반란을 조장하는 벨커스의 인원들. 그리고 듄켈의 추궁에 안절부절 못하는 베릭트 황자.

‘베릭트 황자 또한, 벨커스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인가?’

- 반란군 나부랭이가 감히 제국의 황자님을…!

- 내 오늘 네놈의 뼈를 갈아서…!

베릭트 황자의 행동을 보며 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듄켈의 이죽거림에 격분한 기사들이 씩씩거리며 콜로서스를 움직이려 할 때였다.

“루브라의 동포들이여! 비스크의 학살자, 베릭트가 이 도시에 나타났소!”

온 도시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듄켈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온 항구를 뒤덮은 이후 벌어진 상황에, 분노하며 나선 두 기의 콜로서스는 더 이상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우르르르르!

수십, 수백, 수천 명의 발소리.

탁 트인 항구를 원형으로 둘러싼 거주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도시의 시민들이 갑자기 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던 얀이 한탄하듯 내뱉었다.

“글렀군. 저건 못 잡아.”

어느 새 한 덩어리가 되어 모인 식민지인들은 두 기사의 콜로서스, 그리고 듄켈이 말한 베릭트의 콜로서스를 둘러싼 채 그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당장 꺼져라!”

“여긴 루브라의 자치령이다! 당장 물러가라!”

“학살자 베릭트 황자는 당장 이 도시를 떠나라!”

전진하던 콜로서스들의 앞길을 막기 시작한 사람들의 물결은 이윽고 항구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학살자? 베릭트 황자가?”

식민지인들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의 중심에는 베릭트 황자가 있었다.

바일사르의 학살자. 그를 향해 그렇게 외치는 식민지인들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식민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벨커스의 기사들이라 들었는데, 어째서 베릭트 황자를 학살자라고 부르는 거지?”

“식민지 진압전쟁에 벨커스 가문을 참여시킨 것이 베릭트 황자.”

이어지는 렌의 설명을 들은 얀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모처럼 말이 통하는 상관을 만났나 싶었더니, 지뢰도 이런 지뢰가 따로 없었다.

- 이, 이건 무슨…!

- 네 이놈들! 네놈들이 하고 있는 것은 반역이다! 당장 물러서지 못할까!

기사들이 그렇게 일갈하는데도 불구하고, 콜로서스를 막아선 식민지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야유는 멈추지 않았다.

“반역은 니미, 네놈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잊어버린 거야?!”

철퍽!

계속되는 야유에 당혹스러워하는 기사들을 향해 군중들 중 누군가가 오물을 던졌다.

정확히는 오래되어 썩어 문드러진 달걀이었다.

“바일사르의 학살자를 몰아내라!”

“꺼져! 꺼지라고!”

이윽고 콜로서스를 향해 온갖 잡동사니들이 날아들며 기사들의 콜로서스를 더럽히기 시작했다.

“비스크를 기억하라!”

“네놈들이 죽인 루브라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인 줄 아느냐!”

“꺼져라! 바일사르는 당장 이 도시에서 나가라!”

순식간에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에 파묻힌 얀과 렌은 그들을 헤치며 듄켈의 모습을 쫒으려 했다.

“이 자식도 제국군이야!”

“당장 꺼져! 꺼지란 말이야!”

그러나 성난 군중들의 야유가 이어지며 끊임없이 자신의 앞길을 막기 시작하자, 얀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씨발, 여기다가 기관포를 난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얀의 왼쪽 눈에 이식된 닐의 인공지능이 듄켈의 모습을 잡아냈다.

그는 이미 아이린의 콜로서스를 압박하던 자신의 기체로 돌아간 상태였다.

- 기체는 넘겨주지. 이름 모를 지휘관. 기회가 되면 또 만나세.

그렇게 말한 듄켈은 충격에서 이제 막 깨어난 부하의 콜로서스를 잡은 뒤, 항구 밑 바닷속으로 사라져갔다.

- 놈이 도망칩니다!

- 젠장, 이렇게 되면 강제로라도…!

눈앞에서 해방군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참지 못한 기사들이 콜로서스의 발을 들어 올리려 했다.

- 아니! 이 이상 추격한다면 민간인 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온다.

그런 기사들을 만류한 베릭트 황자가 기사들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외쳤다.

- 루브라-바일사르의 총독, 베릭트 반 바일사르가 명한다. 전 부대, 중앙청으로 복귀하라!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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