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97화 (97/186)

97화. 독종.

“그, 그게….”

백지처럼 새하얘진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이어진 얀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진 마렉이었지만, 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뭘 말했지? 어디까지 알아냈지? 널 보낸 이는 누구냐. 어떻게 연락하고 있어?”

점차 가까워지는 얀의 시커먼 동공.

그리고 무감정한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뒷걸음친 마렉이었지만, 이내 죽을힘을 다해 제 정신을 차렸다.

‘경호원이 없다 하더라도 저 녀석을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마렉이 눈을 돌린 것은 렌이었다.

“치잇!”

곧바로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린 마렉이 순식간에 렌의 몸을 낚아챘다.

그의 왼손에는 권총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한 발짝만 움직이면…!”

“움직이면?”

그렇게 말한 것은 얀이 아닌 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렌의 몸을 낚아챈 마렉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

순간,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집어던졌다고? 날?

저 조그만 여자가?

쿠쾅-!

“꺄아악?!”

“뭐야, 뭔일이야?!”

“갑자기 사람이…!”

단순히 날아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렉의 몸을 받아낸 흙벽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려 그의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맸다.

“커억?!”

등줄기로 타고 흐르는 격통은 오랜 훈련을 견뎌낸 그로써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콜로서스의 주먹에 통째로 얻어맞는 듯 했다.

“렌을 인질로 잡으려 하다니, 정보가 한참 모자란데?”

“외형으로부터 얻는 정보와 실제의 괴리. 예전에 정비반원들도 종종 이랬어.”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했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의 아이린을 바라본 얀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은 마렉이 몸을 비척거리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이 녀석을 데려온 줄 알았나?”

흙벽의 잔해에 파묻힌 와중에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마렉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끄아아악-!”

한밤중의 87독립중대 주둔지.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소리에 주둔군 출신의 경비병이 흠칫하며 안을 엿보려 했다.

“히, 히익?!”

그렇지만 그런 그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민 형벌부대원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죄송합니다. 좀 시끄럽죠?”

“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웃음 속에서 느껴지는 뜻 모를 공포감에 몸을 움츠린 경비병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눈앞으로 시선을 보냈다.

“너무 시끄러운데, 다음엔 재갈이라도 물릴까요?”

“그럼 말을 못하잖아.”

“어차피 안하잖아요? 한 세 번쯤 더 한 뒤에 풀어주죠 뭐.”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한 부대원은 허름한 나무탁자에 앉은 채 군용 대검으로 손톱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거로 다듬으면 손톱이 남아나겠냐?”

“시끄러. 이거라도 해줘야 한다고.”

그렇게 남자 대원들과 잡담이 오가는 가운데에 피투성이가 된 채 의자에 묶여있는 마렉이 쿨럭! 기침을 쏟아냈다.

“이 지경이 되도 말을 안한다니, 보통 놈은 아니네요.”

“우리 부대에 숨어들어온 놈이라면 어차피 버리는 패일 텐데 말이죠.”

고문을 전담하는 두 명의 형벌부대원들이 입맛을 다시며 그렇게 말하자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가락은 세 개 빼고 죄다 뭉갰고, 불로 지지는 것도 열 번은 더 했는데 말이지. 놀라운 정신력이야.”

그렇게 말하는 얀을 향해 부대원 한 명이 다가와 서류를 건넸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단델이 작성한 마렉의 신상정보, 그리고 최신 보고사항이 적힌 서류였다.

“예상대로군. 하이람 이 개자식….”

얀이 서류의 내용을 읽으며 그렇게 씹어뱉는 사이, 고문을 담당한 부대원이 고개를 저으며 얀에게 물었다.

“틀렸습니다. 이건 안불어요. 사살하는 게….”

“아니. 이제 불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한 얀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렉에게 다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렉 스탈링. 벨커스가 네게 뭘 약속했지?”

“벨…. 커스가 뭔지…. 난 모르는…. 쿨럭!”

후우.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마렉을 보며 얀이 한숨 쉬었다.

이 정도로 심지가 굵은 자를 복종시키고, 수족으로 부릴 수단이 무엇인가 하면…. 열에 아홉은 정해져 있다.

“마를렌 스탈링. 바일사르 22번 주택가에 거주. 네 여동생 맞지?”

“뭣?!”

그동안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던 마렉이 그 이름을 듣자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를 묶어놓은 의자가 힘을 못 이겨 덜컹거릴 정도였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아니, 그보다도…! 내 여동생에게 수작부릴 생각이라면…!”

“이미 죽었다.”

그 한마디에, 마렉의 말이 멈췄다.

마치 시간을 멈춘 듯,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세 달 전에 얼굴을….”

“사망 추정일은 1월 19일. 우리 측 정보원이 알아낸 정보야.”

“바, 바로 다음날에?”

마렉은 헛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얀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문으로 정신이 혼미한 틈에 심리전을 거는 거다. 거짓말로 자신을 혼란시키려는 속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렉은 자신을 바라보는 얀의 얼굴을 보며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거, 거짓말! 그, 그놈들이 약속했단 말이야! 마를렌의 병을…!”

“마나 코어 미발달로 인한 마력중독. 치료제는 없다. 넌 속은 거야.”

애써 부정하며 소리치는 마렉을 향해 그렇게 말한 얀이 그의 눈앞에 작은 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손 묶은 거 풀어.”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풀려난 마렉이었지만, 그는 별 다른 저항 없이 떨리는 손으로 얀이 내민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그의 것과 같은 연갈색의 머리카락.

세 달 동안 보지 못한, 그의 여동생의 것이었다.

“마, 마를렌의 머리칼….”

“바일사르 빈민가 하수구에 버려져있던 걸 수습했다. 장례는 치뤘다더군.”

그렇게 말한 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마렉에게 건넸다.

로렌츠의 인장이 찍혀있는 문서에 적힌 내용,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 그리고 그와 함께 그려진 여동생의 얼굴을 본 마렉이 힘없이 손을 떨어트렸다.

“다시 묻지. 너와 접선하기로 한 벨커스 측의 정보통. 그녀석과의 접선 위치는….”

더 말을 이으려 했던 얀은 얼굴을 찡그렸다.

두 손으로 머리칼을 집어든 마렉은 고문을 견디던 결의도, 의지도 사라진 채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아, 안돼애애애….”

가슴에 여동생의 머리칼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마렉은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주, 중대장님….”

“틀렸군. 망가졌어.”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나 애정이 클수록,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함은 더욱 커지는 법.

실성한 사람처럼 하염없이 울고 있는 마렉을 보며 형벌부대원들 역시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얀은,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주, 중대장님! 벨커스한테 속아 넘어간 사람인데, 죽이는 건…!”

“아니. 죽여줘.”

종자로써 고문실에 함께 들어온 아이린이 다급하게 외치는 것을 힘없는 목소리가 막아섰다.

“그렇게 해 주면…. 다 말할 테니.”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마렉의 목소리였다.

“벨커스와의 연이 끊긴 지금의 상황이라면, 널 정보원으로써 이용할 의향이 있다. 합류해서 복수할 생각은 없나?”

마지막으로 건넨 얀의 질문에 마렉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 마를렌이 없는 세상에서 뭘 한들…. 의미가 없어.”

얀의 질문에 마렉이 아무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 말을 들은 아이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얀이 건넨 선택지를 고른 자신과 달리,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마음이 꺾여 삶을 포기해버린 마렉은 더 이상 이 부대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유감이군.”

그렇게 말한 얀이 권총을 들어 그의 이마에 겨눴다.

“…루네스 남부 3번 부두. 그곳이 접선장소다.”

“정보통은?”

“저크. 해방군 소속의 중년 남성. 금발. 왼쪽 눈에 칼자국이 있다.”

“해방군 소속?”

뜻밖의 신분에 의문을 표한 얀을 향해 마렉의 입이 계속해서 열렸다.

“정확히는, 해방군을 후원하는 제국인 무역상이지. 해방군에게 탄약과 금속 원자재를 공급하고 있다.”

“벨커스 측의 인물이 아니었나? 그가 어째서 적군인 해방군을 지원하는 거지?”

“그것까지는 몰라.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해방군을 후원하는 돈의 출처가 하이람 벨커스란 거다.”

하이람은 뒤에서 해방군을 지원하고 있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든, 다른 목적을 위해서든.

‘일개 정보통. 심지어 형벌부대 소속인 마렉의 증언은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할 테니, 그에게 숨길 필요는 없다는 건가?’

마렉이 건넨 정보는 정치적으로는 하이람을 압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하이람이 식민지의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얀에게 전해졌다.

“벨커스 가문 입장에선 쓰다 버릴 쓰레기가 하나 사라진 격이니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가족을 빌미로 정보원을 침투시킨 뒤, 빌미로 잡은 가족은 진작에 죽여 버렸다.

앞에서는 정의로운 귀족, 고명한 귀족인 척 하는 벨커스의 민낯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해주지. 마렉 스탈링.”

천천히 고개를 든 마렉을 향해 얀이 말했다.

“네가 준 정보 때문에, 이 식민지에 잠입한 벨커스의 끄나풀은 전부 죽을 거다.”

“…!”

얀의 한 마디에 마렉의 눈이 크게 띠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천 명은 되는 규모야. 50명도 채 안 되는 너희 부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마렉을 향해 얀이 웃어보였다.

“믿어. 식민지에 뿌려진 벨커스는, 너 때문에 파멸할 테니.”

그렇게 말한 얀이 단번에 방아쇠를 당겼다.

유언도, 마지막 말도 필요 없었다.

타앙-!

총성 한 번에 그의 몸이 허물어졌다.

숨이 끊어진 마렉의 얼굴은, 희미한 웃음을 띤 채였다.

“시신 처리는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형벌부대원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씁쓸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아이린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본 뒤 방을 나서는 얀의 뒤를 따라갔다.

치익-!

담뱃불에 불을 붙인 얀이 푸우, 하고 폐부를 거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올라가는 연기를 따라가자, 커다란 달이 맑게 갠 루브라의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납득 못 한 얼굴이네. 낮에 본 것처럼.”

“….”

“납득 안 해도 돼.”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하늘을 바라본 얀이 아이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지.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네.”

그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인 아이린을 향해 얀이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방식에 무조건 동의하란 뜻은 아니야. 이런 방식 밖에 모르는 나 같은 전쟁꾼한테 동조해봤자, 네가 얻을만한 건 없어.”

“하지만, 중대장님은 항상 결과를 내고 있잖아요. 이번에 얻은 정보도….”

벨커스와 해방군 사이의 연결을 찾아내고, 잠입 루트까지 확보했다.

단숨에 해방군의 핵심을 찌를 수 있는 경로를 얻어낸 것이었다.

“항상 최악의 방법으로 성과를 내지. 그게 내 한계고.”

그렇게 말한 얀이 픽 하고 웃어보였다.

여동생의 존재만으로 고통을 견디는 자의 눈앞에 여동생의 죽음을 내밀어 그의 정신을 무너트렸다.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하찮은 동정이 아닌, 고문 뒤에 이루어진 계획적인 술수.

정보를 위해 마렉의 정신을 무너트린 것은 다름 아닌 얀 자신이었다.

“나나 날 따르는 녀석들은 전부 악당이야. 그렇지만 너와 단델은 다르지.”

“….”

고문, 암살, 납치, 학살.

전장에서 온갖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해온 케르단 전선 출신의 대원들과, 흉악범죄자를 고르고 골라 뽑아낸 신병들.

그런 이들 사이에서 단델과 아이린은 다소 이질적인 존재였다.

“나나 저 녀석들은 뒤가 없지만, 너흰 아니잖아. 그러니 잘 생각해.”

그렇게 말한 뒤 얀은 아이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중대장, 님….”

나지막이 얀을 부르는 아이린이었지만, 그녀는 멀어지는 얀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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