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위선의 태양.
“어, 어느 새…?”
“내가 한 건 아니고, 이 녀석한테 물어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이 얀에게 묻자 얀은 어깨를 으쓱하며 옆에 있는 마렉을 가리켰다.
“이런 거 훔치려면 표정 관리는 좀 하고 다녀라. 저 멀리서 다 보이던데.”
“큭…!”
침음성을 흘린 소년은 끊임없이 눈을 굴리며 얀과 마렉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마렉은 얀을 흘깃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 이상 시간 낭비할 수도 없지. 그러니….”
그렇게 말하며 소년의 지갑을 열어본 얀의 움직임이 도중에 멈췄다.
“뭐, 뭐야?”
“아니. 별 거 아니야.”
자신의 지갑을 열자 불안한 듯 그렇게 되묻는 소년.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보고 있던 얀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지갑을 덮어 소년에게 던졌다.
“어어!”
날아든 지갑을 받은 소년은 황급히 그것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 가져갔다.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흥, 그걸 어떻게 믿어?!”
마렉의 볼멘소리에 그렇게 답하며 지갑을 이리저리 살피는 소년은 이내 안심한 듯 한숨을 쉬며 지갑을 품속에 넣었다.
“아, 그리고 뭐 하나만 묻지.”
“엉? 뭐, 뭔데?”
마렉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소년이었지만, 그 뒤에 선 얀의 질문에는 무심코 말을 더듬었다.
분위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반말이네.’
소년이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얀은 소년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너, 이름이 뭐냐?”
“이름?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게!”
다짜고짜 이름을 묻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년을 보며 얀은 어깨를 으쓱이자 그것을 본 마렉이 얀의 말을 받았다.
“아니, 형편이 어려워 보이길래. 혹시 필요하지 않은가 해서.”
그렇게 말하며 마렉이 품에서 꺼내든 것은 은화였다.
루브라-바일사르에서 통용되는 화폐.
그것을 본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 벤! 벤 커민!”
“아, 그래?”
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마렉이 동전을 튕겨 소년에게 은화를 건넸다.
“지, 진짜 주는 거지?!”
“빨리 가. 마음 바뀌기 전에.”
마렉이 그렇게 말하자 두 손으로 은화를 감싸 쥔 소년은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처음 도망칠 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뜻밖의 도움을 받는군.”
“아, 아뇨. 이런 곳에는 익숙하니까요.”
“그래?”
그렇게 되물으며 얀은 마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대의 독기는 온데간데없이, 지금에 와서는 부대에 잘 녹아든 신입 대원.
그렇지만 그런 마렉을 바라보는 얀의 얼굴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마렉이 얀을 향해 그렇게 묻자 얀은 잠시 더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그 애. 성이 커민이라고 했지?”
“예, 예…. 근데, 굳이 이름을 알아내신 이유가 뭡니까?”
은화 한 닢이면 4인 가족의 하루 생활비다.
제국에 비해 물가가 싼 루브라라고 하더라도, 아이가 갖기에는 단위가 큰 금액이었기에 마렉은 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갑 안에 군번줄이 있더군. 버크 커민이라고 새겨진.”
“그렇다면….”
“해방군의 가족, 형제…. 적어도 끄나풀쯤은 되겠지.”
고저 없이 이어지는 얀의 말에 마렉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아니. 곧바로 추적하면 들켜.”
그렇게 말하는 얀의 왼쪽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듯 보였다.
“위치는 내가 알아낼 수 있으니, 거리를 두지. 가자.”
“알겠습니다.”
얀의 한 마디에 그렇게 답한 뒤 마렉은 그와 함께 골목을 빠져나왔다.
“중대장님.”
“늦어.”
아이린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던 렌이 그렇게 말했다.
“나름 수확은 있었어. 다른 인원들은?”
“각자 흩어졌습니다. 숙소도 따로 잡는다고….”
“하긴, 다들 식민지 출신일 테니. 나보단 났겠군.”
아이린의 대답에 그렇게 중얼거린 얀은 자신이 있는 루네스의 거리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도시 북부에 위치한 시장거리.
기차역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사람으로 가득 들어찬 시장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했다.
“마렉이라고 했지?”
“아, 예. 그렇습니다.”
“이곳 출신이면 지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나?”
얀의 질문에 마렉은 고개를 내저었다.
“혈통은 식민지이지만, 나고 자란 곳은 제국입니다. 이곳에 대해서는 잘….”
“흠.”
마렉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얀이 몸을 돌렸다. 지리를 알 방법도 없고, 이 인원으로는 현지인과 접촉하는 것도 위험하다.
“방금 만난 그 녀석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군.”
그렇게 생각을 마친 얀은 일행을 이끌고 시장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상점가를 벗어나자마자 튀어나온 것은 거지와 부랑자로 가득 찬 빈민촌이었다.
제국식으로 나무를 쌓아올린 건축물이 아닌, 흙벽으로 된 집과 그곳에서 풍겨오는 악취.
그리고 길거리에 나앉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얀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바일사르의 빈민가보다도 더해요….”
“유일한 독립 경제권이라고 해봐야, 실상은 이 모양이군.”
식민지인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도시, 루네스.
그렇지만 루브라의 땅은 너무나도 방대했고, 루네스는 몰려드는 수많은 식민지인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협소했다.
“으, 으으….”
“거기 신사분! 제발 동화 한 닢만이라도…!”
“사흘 째 아무것도 먹지 못 했습니다…!”
불어터질 정도로 모여든 사람들은 점차 길거리로 나앉게 되고, 빈민촌은 이미 슬럼화가 진행된 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 제국의 건물은 저 높이까지 뻗어있군.”
루네스의 중앙에 세워진 제국 총독부.
베릭트 황자가 거주하는 궁궐과도 같은 건물이 빈민가의 풍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이래놓고 제국에 반감을 가지지 말라니, 웃기는 소리지.”
사석에서 아무리 입바른 소리를 해 봤자, 이런 격차를 눈에 들이댄다면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죄인이라도 된 듯 제국의 식민지 수탈에 대해 말하던 베릭트의 말 역시,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이에겐 위선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곳으로 식민지인들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실정이라면, 다른 도시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야.”
아이린의 말을 받은 얀이 냉소했다.
식민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모두 진압한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야, 이건 또 뭐야. 은화? 이런 걸 어디서 받아온 거냐. 너?”
“도, 돌려줘!”
“돌려줘~ 돌려달라고~ 하하하하!”
빈민가 한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 그때였다.
몸을 낮춘 얀이 바라보자 그 곳에는 방금 전 만났던 벤을 둘러싼 세 명의 청년들이 낄낄거리며 소년의 지갑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뭐야, 너 이 군번줄을 아직도 들고 다녀?”
“해방군은 이제 도적으로 전락했잖아. 이딴 게 뭐가 좋다고?”
소년을 둘러싼 청년들이 그렇게 내뱉으며 이죽거렸다.
“애초에 해방전쟁이니 뭐니, 괜히 제국한테 밉보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시궁창 인생인거…!”
빠악!
청년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벤이 던진 돌멩이에 머리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악?!”
“이 미친 새끼가, 뭐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반응에 흥분한 청년들이 쏘아붙였지만, 그보다도 더 큰 목소리가 빈민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도적 아니야! 해방군이야! 우리 아부지 욕하지 마-!”
울음 섞인 소년의 외침에 청년들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참다못해 내뱉은 소년의 기백에 순간 움찔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 전쟁꾼 새끼가 봐주니까!”
뻐억!
우악스런 발길질을 버티지 못한 벤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우린 씨발 할 말이 없는 줄 알아?! 너희 해방군 놈들이 독립전쟁인지 좆지랄인지 일 벌인다고 마을이란 마을은 다 들쑤셔놨잖아!”
“우리가 왜 멀쩡한 고향을 내버려두고 이 시궁창에 처박혀 사는데! 할아버지는 너희 해방군 놈들을 숨겨주다가 제국군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 알아?!”
빡! 빠악!
고꾸라진 소년을 향해 청년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온 주택가에 쩌렁쩌렁 들릴 정도로 커다란 타격음.
그렇지만 이 빈민가에 사는 이들 중 밖에 나와서 그것을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이건….”
“촌극이 따로 없군.”
상황을 지켜본 얀은 한숨 섞인 쓴웃음을 흘렸다.
“빈곤의 원인인 제국은 뒷전으로 몰린 채 자기들끼리 싸우는 꼴이라니.”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제국의 전략이야. 내부에서 분열시킨다면, 반란의 세는 더욱 약해져.”
얀과 렌이 그렇게 평하는 사이, 소년에 대한 구타는 멈출 줄 모른 채 계속되고 있었다.
“저거 잘못하면 죽겠어요! 말려야…!”
“말려? 우리가 왜?”
보다 못한 아이린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에 답하는 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 이대로 가면….”
“오히려 여기서 저 벤이라는 꼬마가 죽는다면, 해방군과의 연결점을 판명하는데 도움이 되겠지. 저 꼬마의 죽음에 해방군이 반응한다면 그들을 쫒으면 되고, 아니면 다른 곳을 조사하면 돼.”
무표정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얀의 한마디에 아이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그래도 아직 어린애잖아요…! 저걸 내버려두면…!”
“왜. 저 광경을 지켜보니 네가 식민지인이라도 된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아이린이 헛숨을 들이켰다.
“나도 가끔 까먹곤 하는데.”
그렇게 운을 띄운 얀이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낙인찍히고 도구로 이용당한다 한들 우린 제국군이야. 지금 핍박받고 있는 꼬마는 우리들의 잠재적인 적이고.”
“그, 그렇지만 그건!”
“하….”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독종으로 뽑아놨더니.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 쉰 얀은 렌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위치추적은 가능하니, 일단 철수하지.”
“확인.”
얀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인 렌이 몸을 숨겼다.
“주, 중대장님…!”
철수명령이 나온 마당에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얀을 따라 빈민가를 빠져나온 아이린이었지만 얼굴은 밝지 않았다.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솔직히, 그래요.”
‘그나마 단델보다는 낫군. 물으면 대답이라도 해 주니.’
그렇게 생각한 얀은 한 번 혀를 찬 다음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하나 묻자. 말리러 가서 뭐라고 할 건데?”
“…네?”
얀의 질문에 순간 머리가 하얘진 아이린이 그렇게 되물었다.
“방금 전 은화를 준 정체모를 인간들이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서 자기를 구해줘? 무슨 싸구려 영웅소설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저 녀석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 말을 들은 아이린이 이를 악물었다.
“거기에, 식민지인들 간의 갈등을 우리 같은 제국인이 중재하겠다고? 저들에게 있어서 그것보다 더한 굴욕이 있을 것 같나?”
“….”
여기까지 들은 그녀는 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단순히 목숨이 위험한 일만 하는 게 아니야. 우리 중대에서 근무하면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 거다.”
“예….”
“그러니 잘 생각해. 바로 옆에 스파이까지 있는데.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지.”
순간, 너무나도 평온하게 이어진 얀의 말에 무심코 넘어갈 뻔 했다.
그렇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는지, 얀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들은 마렉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중대장님? 그, 그게 무슨….”
“벨커스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지. 모를 줄 알았나?”
그렇게 말한 얀은 웃고 있었다. 양산품과도 같은, 틀에 박힌 미소였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