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열차강도.
“베릭트 황자 전하. 기관장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
사심이 가득 섞인 편지를 들고 온 아이린이 객차 안의 냉랭한 분위기에 하던 말을 멈췄다.
덜컹- 덜컹-
얀이 베릭트의 말을 제지한 이후, 열차에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무슨 일인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아이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덜컹거리는 기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얀은 말없이 생각에 잠긴 베릭트 황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의 풍경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빛 밀밭으로 가득 찼던 창밖의 풍경은 어느 새 푸르른 초원으로 변해있었다.
“…응?”
땅이 남아돈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얀이 표정을 구겼다.
두두두두-!
초원에 다다랐을 때부터 점차 커지는 소리였다. 무언가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소리.
호송차량의 엔진이나 콜로서스의 마력로와는 다른, 수많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창밖을 바라본 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찾았다! 제 6황자야!”
“속도를 올려라! 이번엔 반드시 잡는다!”
수많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리는 열차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수십 마리의 말. 그리고 그 위에 탄….
“황자님.”
“나도 확인했네. 저건…. 루브라 해방군이야!”
창문을 깨고 총알이 빗발친 것은 베릭트의 그 말이 끝난 이후였다.
파창-!
“이런 제길!”
“적습! 적습이다!”
보초명의 외침에 열차에 동승한 중대원들이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챙겼다.
그러는 사이 열차 안으로 빗발치는 수백발의 총알세례가 이어졌고,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원들은 의자 밑으로 몸을 피했다.
“기관총입니다! 이대로는 대응할 수 없어요!”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 앞으로 다가온 기수 한 명이 엄폐하고 있는 베릭트 황자를 향해 총을 겨눴다.
“바일사르에게 죽음을! 루브라에 영광 있으라!”
“아이린! 소총! 어서!”
“예!”
얀의 일갈에 곧바로 날아온 소총이 쥐어지고, 얀이 곧바로 몸을 내밀어 창밖을 겨눴다.
“닐!”
[탄도 예측 완료. 조준 보정.]
타앙-!
영점도, 조준선 정렬도 이어지지 않은 채 이뤄진 한 발의 사격. 그렇지만 그 총탄은 말에 탄 기수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어 그를 말안장에서 떨어트렸다.
“크악!?”
“이, 이런 미친?!”
“그 짧은 순간에 맞췄다고?!”
왼쪽 눈에 이식된 음성감지모듈에서 해방군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때를 놓치지 않고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연속 사격각 계산. 조준 완료.]
머릿속에서 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로 든 얀의 권총이 연달아 네 발의 총탄을 뿜어냈다.
투타타탕-!
연사에 가까운 속도.
자세도 잡히지 않은 난사였지만, 글레이프니르의 조준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 얀의 권총탄은 또 다시 네 명의 미간을 꿰뚫었다.
“선두가 쓰러진다!”
“이런 젠장, 뭐하는 놈이야!”
그렇게 얀이 시간을 번 찰나의 순간, 각자의 엄폐 위치를 확보한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 또한 창밖을 향해 소총을 난사했다.
“이 개새끼들!”
“말을 노려! 낙마시킨다!”
투두두두두-!
투두두두두-!
얀이 받아든 단발식 소총과는 다르게 한 정 한 정이 기관총과 같은 연사력을 자랑하는 그레이하운드 중대의 소총.
드워프의 기술로 만들어진 검은 총신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자, 열차 한편에서 말을 달리던 해방군들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열차 뒤칸에 올라탔습니다!”
“아이린! 기관실로 가서 기관장 호위해!”
“예!”
잠시 동안 생겨난 틈. 그 사이를 놓치지 않은 아이린이 곧바로 앞칸으로 달려 나갔다.
현재 열차에 탄 대원들은 총 스물.
끊임없이 열차를 향해 몰려드는 해방군들은 양 옆의 적들을 상대하는 사이 열차에 올라타 그들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탄환은?”
“예비는 전부 뒤칸에 있습니다. 잔탄은 얼마 없어요!”
“그럼 황자님 경호해. 길은 내가 뚫는다.”
그 말과 함께 얀은 문 밖을 향해 권총탄을 퍼부었다.
미리 열차의 구조를 스캔한 닐의 조준보정에 의해 벽 너머로 다가오는 두 명을 추가로 쓰러트리자 해방군들도 위협을 느꼈는지, 각자 엄폐하는 것이 보였다.
“황자님. 무사하십니까?”
“내 걱정은 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열차일세! 저들은 뒷차량을 떼어내 콜로서스와 차량을 가져갈 속셈이야!”
‘엄폐한 이유는 시간벌이인가?’
생각을 마친 얀은 권총에 탄창을 갈아 낀 뒤 엄폐한 적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왼쪽 세 번째에 둘. 오른쪽 여섯 번째에 하나. 오른쪽 열두 번째에 둘. 사격 준비해.”
철컥!
얀의 지시에 세 명의 중대원이 문의 양 옆에 위치를 잡은 뒤 밖을 향해 라이플을 겨눴다.
손가락으로 신호한 얀이 곧바로 문 아래를 차올려 사격각을 확보하는 순간.
“이거나 먹어라 바일사르 개새끼…!”
투타타탕-!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해방군 병사들의 미간에 대원들의 소총이 명중했다.
“얀 자네, 매복한 적의 위치를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건가?”
“감입니다. 대충 그렇게 알아두십시오.”
문 밖의 적을 정확히 쏴 맞추고, 엄폐한 적의 위치를 미리 알아내는 얀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 베릭트의 의문이 이어졌지만, 얀은 그렇게 둘러대며 열차 뒤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열화상 전환. 적 병력 다수. 일부 인원은 작업중.]
왼쪽 눈의 시야가 반전되며 형형색색의 사람 그림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위치를 확인한 얀은 손을 내밀어 라이플을 받아들었다.
일반적인 소총보다 두 배는 큰 대두경 라이플이었다.
퉁-!
한 발의 사격에 나무벽과 의자 세 개가 동시에 뚫리며 두 명의 해방군을 잡아먹었다.
“이런 미친?!”
“여기까지 뚫고 왔다고? 너무 빠르잖아!”
그렇게 말하며 열차 차량을 분리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해방군들.
그렇지만 여기까지 다가온 이상,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는 것은 무리였다.
[파일럿 근접. 원격 인증 완료. 글레이프니르, 시스템 가동.]
쿠르르릉-!
얀의 신호에 반응한 글레이프니르가 달리는 열차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뭐, 뭐야! 기사가 타고 있었어?!”
“콜로서스가 일어난다! 모두 도망쳐!”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몸을 일으키는 글레이프니르를 보자 해방군들이 하던 작업을 중지하고 열차 밖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
“올라타서 안에 탄 기사놈만 죽이면…!”
퉁-!
몸을 일으키려는 글레이프니르에 올라타려 한 해방군의 머리에 얀의 대구경 소총탄이 날아왔다.
순식간에 머리를 꿰뚫려 쓰러진 해방군의 시체를 뒤로 하고, 얀은 계속해서 왼쪽 눈에 이식된 닐의 인공모듈에 신호를 보냈다.
“닐. 밖에 있는 놈들 분석해.”
[분석 중. 복장 데이터 대조 결과, 개척시대의 ‘카우보이’의 복장과 유사점 확인. 관련 영상자료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딴 거 말고, 적 병력규모와 무장!”
하여튼, 제대로 말을 안 하면 알아먹지를 못하는 깡통이었다.
[분석 완료. 열차 뒤편에서 이동 중인 적성 생명체 70개체를 추가 확인. 레버액션 소총, 리볼버 등으로 무장 중.]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말한 얀이 열차 뒤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다행히도 대원들은 현재 이 칸에 모두 모여 있으며, 저들에게 근접한 칸에 들어있는 것은 예비로 가져온 총알과 포탄들 뿐.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걸 봐선, 이 놈들도 더 이상의 병력지원은 없다는 말이지.”
그렇게 생각한 얀이 짐칸에 실려 있는 글레이프니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관포탄 장전. 열차 연결 해제하고, 저 새끼들이랑 다 같이 갈아버려.”
얀의 짧은 명령이 이어지자 그것을 받아든 글레이프니르의 한쪽 팔이 그들을 향했다.
팅-!
열차의 객차를 연결하는 대못이 튕겨나가며 탈선한 차량이 순식간에 뒤따라오던 해방군을 덮쳤다.
“으아악?!”
“이 미친놈이 열차를!”
그리고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조준 완료.]
“전원! 귀 막아!”
얀의 고함소리와 함께 탈선한 기차를 향해 글레이프니르의 한쪽 팔에 달린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부와아아앙-!
굉음과 함께 열차가 요동치듯 흔들리고, 이어서 탄착지점에 널브러진 탄약들이 점화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퍼엉-!
“이야아아아-!”
“꼴좋다! 개새끼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에서 순식간에 이뤄진 전투.
그리고 승전보와 함께 이어지는 대폭발이 대원들을 미친 듯이 고무시켰다.
“허, 허허! 흐하하하하!”
이어지는 베릭트 황자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은 얀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철도 복구하려면 보좌관이 머리 좀 쓰겠구만! 하하하하하!”
그렇게 말하며 대원들과 함께 웃어대는 베릭트 황자였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얀의 눈은 점점 깊어져갔다.
‘해방군이 말했지. 이번에야말로 죽인다고. 그렇다는 건 이런 식으로 위협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란 소리인데….’
도시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황자가, 호위도 없이 수행원들만을 데리고 자신의 영지까지 왔다고?
이 광활한 초원을 넘어?
‘뭔가 있어.’
껄껄 웃는 베릭트 황자를 바라보던 얀은 이윽고 지평선 너머 모습을 드러낸 건물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중대장님! 목적지가 보여요! 루네스입니다!”
열차 위에서 벌어진 총격전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기관장을 대신해, 그를 보호하던 아이린이 머리를 내밀며 자신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초원 한가운데에 세워진 루브라의 대도시, 루네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베, 베릭트 총독님!”
“다치신 곳은 없으신 거죠?! 정말로!”
단델이 지휘하는 스무 명의 대원들은 베릭트 황자와 함께 기차역에서 내리고, 얀을 포함한 여섯 명의 인원들, 그리고 렌은 위장을 마친 뒤 다음 역에서 정차할 예정이었다.
“얀. 준비 끝났어.”
“그래. 우리도 가지.”
얀의 한 마디와 함께 열차에서 내린 여덟 명의 정탐조는 식민지의 거리를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이야, 이건….”
“규모로 따지면 바일사르 이상 아닙니까?”
제국 수도 바일사르와 비슷한 규모의 대도시, 루네스.
역을 빼곡하게 채운 사람들을 바라보는 정탐조 인원들은 그 자리에서 눈이 핑 돌 것만 같았다.
“도시 규모는 비슷하지만, 인구 밀도는 세 배 이상.”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을 바라보며 렌의 설명이 이어졌다.
얀의 팔을 잡은 렌의 머리색은 얀의 그것과 같이 검게 물들어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머리색을 바꾸는 장면에 대원들이 기겁하던 것을 떠올린 얀이 쓴웃음을 지었다.
“놀랍네요. 방금 전까지는 온통 밀밭이었는데….”
“개척지대가 적은만큼, 소수의 도시에 인구가 집중. 그 중에서도 루네스는 제국의 손이 뻗치지 않는 유일한 도시.”
“식민지인이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란 뜻이지.”
아이린의 질문에 렌과 얀이 번갈아 답했다.
제국의 수탈에 시달리는 식민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도시에서 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위안거리가 된다는 것이지.
“도시 구조가 특이한데.”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과 그 너머로 펼쳐진 도시.
그리고 그 대도시 전체를 두른 성벽을 바라보며 얀은 미간을 좁혔다.
“식민지인 최후의 보루…. 도시보단 요새에 가깝군. 병력 배치는….”
켈트 교국에서 본 듯한 익숙한 도시구조에 이채를 띄며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툭-
“아, 죄송합니다~”
자신의 허리에 어깨를 부딪힌 작은 체구의 소년.
얼굴 전체를 가린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야야! 거기 너!”
그것을 본 대원 중 한 명이 그를 부르는 순간.
후다닥!
순식간에 인파 사이로 사라진 소년을 보며 얀이 고개를 갸웃했다.
“쟨 뭐냐?”
얀이 그렇게 말하자 한숨을 내쉬는 대원 하나가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부대에 들어온 마렉이었다.
“중대장님 방금 지갑 털리신 겁니다.”
그렇게 말하자 얼굴을 찡그린 얀이었지만, 이내 마렉이 꺼내듯 것을 본 뒤에는 맥이 풀린 듯 헛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그 시각, 얀의 목소리에 부리나케 도망쳐 온 소년은 킥킥거리면서 자신의 수확물을 확인하기 위해 품 안에 손을 넣었지만, 이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없었다. 분명히 품속으로 넣었을 터인 얀의 지갑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내, 내 지갑!”
“이거 찾나?”
소년의 등 뒤에 나타나 낡은 지갑을 흔들며 그렇게 말한 것은 얀이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