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아, 중대장님 오셨습니까?”
다음 날 이른 아침.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수많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킨 단델이었다.
“…뭐냐?”
“예?”
해가 뜬 지 몇 분 되지 않는 이른 아침에 사무실에 있는 단델을 본 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하하, 신입들 앞에서 허세 좀 부리다가 그만….”
그렇게 말하는 단델의 눈은 피로에 쩔어 초췌해 진 상태였다.
‘무박 훈련은 어제 끝났을 텐데….’
단델을 바라본 얀은 그의 앞에 놓여있는 서류들 몇 장을 꺼내 살피기 시작했다.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와중에도 빈틈없이 처리해놓은 문서를 보며 얀은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이거 처리하느라 잠 못 잤지?”
“괜찮습니다. 두 시간 정도 눈 붙였으니, 다음 일정 검토를….”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단델이 그 자리에서 균형을 잃고 고꾸라질 뻔 했다.
얀이 잡지 않았다면 책상에 쌓인 서류들이 쏟아져 난장판이 될 판이었다.
“괜찮아? 이게?”
“죄, 죄송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애써 자세를 가다듬는 단델이었지만 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셔츠의 단추도 밀렸고, 소매 끝은 언제 갈아입었는지도 모를 만큼 헐어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멀쩡해 보일지도 몰랐지만, 코앞에서 바라본 단델의 모습은 뭔가 이상했다.
“단델.”
“예 중대장님.”
“오침 줄 테니까 가서 자라.”
“아니, 전 진짜 괜찮습니다. 전 괜찮으니까….”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는 달델의 어깨를 흔들어 정신 차리게 한 얀은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 주…. 중대장님.”
“아직도 죽은 녀석들을 담아두고 있지.”
“…!”
억지웃음으로 일관하던 단델의 표정에 금이 갔다. 멈춰선 듯 굳어버린 얼굴은 이윽고 깊은 회한으로 바뀌어버렸다.
“후우….”
이런 면에선 차라리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아낸 아이린이 낫다.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을 그 자리에서 다 쏟아낸 뒤에는 나름대로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다 네 탓인 것 같아?”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은 다르다.
자신이 그들에게 보내는 애도마저, 슬픔마저 죄악이라고 생각한 채 그것을 묻어놓고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렇게 묻어둔 감정이 자신을 좀먹어가는 것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 녀석들이 죽은 게 네 탓인 것 같나? 네가 더 열심히 키웠으면, 좀 더 같이 고민했으면 몇 명은 더 살릴 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대답은 없었다.
정곡을 찔린 표정의 단델은 그저 얼굴을 내리깐 채 꽉 쥔 두 손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중대장 명령이다. 들어가서 자.”
“저, 전…!”
“한 번 더 말하게 하면 총살이다. 닥치고 쳐 자.”
낮게 내리깐 얀의 목소리에 단델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것이 피로감을 버티지 못한 것이든, 죄책감에 무너진 것이든, 어느 쪽이든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이었다.
“잘…. 수가, 없습니다.”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단델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눈을 감을 때 마다, 꿈을 꿀 때마다 그 녀석들이 나옵니다. 즐거웠던 때, 같이 얘기하던 때, 동고동락하던 그 때의 기억이…! 미친 듯이 되풀이된단 말입니다!”
쭈그려 앉은 그의 얼굴에서 굵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처음 임관했을 때도, 처음 전선에 나섰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래! 나 때문에…. 내가 좀 더 잘 했더라면…!”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참다못해 욕지거리를 내뱉은 얀이 단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얀이 자신의 부관에게 이 정도로 화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쿵!
거칠게 벽으로 단델을 밀어 넣은 얀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기로 가득한 얀의 두 눈이 눈물로 얼룩진 단델의 얼굴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주제 넘는 생각 하지 마라. 단델 클라우스.”
“윽…!”
“네가 잘하면 그들이 살 수 있었다고? 네가 거쳐 온 전장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었나? 너와 나, 87독립중대가 거쳐 온 전장이 훈련 몇 번, 테스트 몇 번으로 뚫을 수 있을 만큼 만만했어?”
죽음과 직접 살을 맞대고, 폭력과 야만으로 몸을 두른 채 헤쳐나간 전쟁터.
위험하지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네가 훈련시킨 대원들은 내가 인정한 정예였고, 그렇기에 실전에 투입된 거야. 네 죄책감을 핑계로 그 녀석들의 죽음을 모욕하지 마라.”
얀의 한 마디에 뭔가 더 말하려던 단델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 때문이라고 외치는 와중에도 그 역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훈련 몇 번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전장이라면, 애초에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너 때문?”
단델을 향한 얀의 질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웃기지 마. 네 훈련을 검증한 것도, 그 녀석들을 전장으로 데려간 것도, 형벌부대에 집어넣은 것도 나다. 그 녀석들의 죽음에 후회를 하든 한탄을 하든, 그건 내 몫이지 네 몫이 아니야.”
한 번의 전투에서 사라진 스물여섯 명의 대원.
그가 처음 임관했을 때, 케르단 전선의 모닥불에서 술을 나누던 이들 역시 대부분 죽어 없어졌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남겨진 이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풋내기 장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무너져선 안됐다.
이 죽음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야 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기엔 시간이 부족한 얀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에게서 책임을 빼앗는 것뿐이다.
그가 스스로 짊어진 죽음의 무게를 빼앗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으면 될 일이다.
얀 베르쿠트에게로, 자신에게로.
“그레이하운드 중대원 스물여섯 명을 죽인 건 내 판단이다. 내가 지시했고, 넌 거기에 따랐을 뿐이다.”
“아닙니다. 중대장님! 저, 전…!”
쿵!
집무실의 나무 벽이 다시 한 번 크게 울렸다.
최상층에 위치한 방이었기에 그것을 눈치 챈 이는 없을 것이다.
굳이 있다면 렌 뿐이겠지.
“복창해. 그레이하운드 중대원 스물여섯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중대장 얀 베르쿠트다.”
“중대….”
“복창해 이 새끼야-!”
얀의 고함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방의 모든 문을 닫아놓지 않았더라면 성 전체에 울릴 정도로 커다란 고함소리였다.
“얀.”
나지막이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렌이 있었다.
“아래층. 술렁이고 있어.”
그 한마디에 얀이 혀를 찼다.
소리친 자신도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였으니, 다른 이들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령은 변함없다. 오늘 네 일정이 뭐든지 전부 취소하고, 개인실에 처박혀서 자. 꿈이든 뭐든 다 집어치우고.”
“알겠…. 습니다.”
“개인실에서 기어 나오면 진짜로 죽여 버린다. 어서 가.”
그 말을 끝으로 단델의 멱살을 놓자, 엉망이 된 얼굴을 훔친 단델이 경례한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후우.”
그것을 바라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푸욱 한숨 쉰 얀이 자신의 책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방해했어?”
“아니, 잘 했어. 그 이상 가면 나도 제정신이 아닐 뻔 했으니.”
“이미 정상은 아냐.”
부하들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라며 강요하는 얀의 모습을 본 렌은 그렇게 평했다.
“나나 저 녀석이나, 알맹이는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헛웃음지은 얀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서, 여기 온 용건은?”
“정비창 상황보고. 두 기 모두 기체 정비는 종료. 레일 캐논 탄환도 추가분이 나왔어.”
새로운 설비의 가동에서도 별 다른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한겨울이라 철골의 수축이 우려된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드워프의 작품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 했다.
“이쪽도 인원 선별은 대충 마쳤으니, 대충 구색은 갖췄군.”
그렇게 말한 뒤 얀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요령 좋게 한 장을 뽑아내 들여다보았다.
식민지 출신 중대원 다섯 명과 자신으로 이루어진 정탐조.
그리고 스무 명의 대원으로 이루어진 지원조의 명단을 확인한 얀은 이윽고 끄트머리에 채워진 한 사람의 이름과, 그곳에 별첨된 메모를 바라보았다.
“…호오.”
단델에게 이전에 부탁한 신입 대원들의 신원조사 결과가 적힌 서류들을 바라보며 얀이 입가를 비틀었다.
“좋아. 이 녀석은 좀 캐봐야겠는데.”
그 중 맨 앞 페이지에 있는 마렉의 얼굴과, 그곳에 쓰인, 주의 표시를 본 얀이 그렇게 말했다.
베릭트 황자의 출발일은 이틀 후.
북부 켈트 지역에서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
“하나만 있어도 수월한데, 둘이니 훨씬 낫군 그래! 으하하하!”
“그러십니까.”
출발 예정일 아침.
루브라 바일사르로 향하는 길을 서둘러야 했지만, 베릭트 황자는 비쿠스 영지의 눈을 치우고 가자며 얀을 불렀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는 제설작업을 시작한 지 두 시간.
글레이프니르와 베릭트 황자의 에퀴테스의 합작으로 말끔하게 치운 후에야 얀과 87독립중대는 식민지로 가는 열차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지친 건 아니겠지? 베르쿠트 경!”
“총독부에 도착할 때 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얀은 콜로서스와 함께 짐칸에 실린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이동을 철도로 하는 바일사르와 다르게, 루브라-바일사르는 차량을 이용한 도로 교통이 주가 된다.
곳곳에 거미줄처럼 노선이 퍼져있는 본국과 달리, 루브라-바일사르의 노선은 제국에서 뻗어 나온 두 줄기가 전부이기 때문이었다.
“자, 슬슬 보이겠군.”
창밖을 보며 그렇게 말한 베릭트 황자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보이다니, 뭐가 말입니까?”
“창밖을 보게.”
베릭트 황자가 그렇게 말하자 얀은 의아한 표정으로 열차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에 보인 것은….
“…허.”
“굉장하지 않나?”
밀밭.
지평선 끝까지 뻗어있는 밀밭이었다.
시야에 닿는 모든 부분이 한 군데도 빠짐없이 황금빛 밀로 이루어진 땅.
국토의 80%가 평야로 이루어진 대륙 최대의 곡창지대, 루브라 바일사르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놀랍군요. 산 하나를 넘어가면 한겨울이었는데.”
“내가 자네 영지에서 눈을 보고 신난 이유가 이해가 가지? 이곳은 눈이 오지 않는단 말일세.”
그렇게 말하며 흐뭇한 눈빛으로 저 끝까지 뻗어있는 밀밭을 바라보는 베릭트 황자.
밀밭 곳곳에서는 골격뿐인 콜로서스가 거대한 농기구로 밀을 수확하고 있었다.
“제국군의 보급이 마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군요.”
“식민지에서 수탈하는 자원의 양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지. 뭐, 덕분에 현지인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지지만 말이야.”
‘수탈.’ 베릭트 황자의 입에서는 식민지 전체를 감독하는 총독의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징발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 황제 폐하 말씀이시지?”
카르디어스 황제를 떠올리며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도, 가르드도,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베릭트도.
그 누구도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아니, 아바마마라고도 부르지 않고 있었다.
“용어를 바꾼다고 해서, 덮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바일사르 제국은 루브라를….”
“황자님.”
무심코 흘러나오는 베릭트의 말을 얀이 가로막았다.
이 이상은 정말로, 제국의 황자로써는 해선 안 될 말이었다.
“…그래. 그랬지.”
고개를 주억거린 베릭트 황자가 얀을 보며 쓴웃음 지었다.
식민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호탕한 거한의 덩치가 순식간에 쪼그라든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