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만신창이 보금자리.(1)
쿵!
굵은 소리와 함께 심문실의 문이 닫혔다.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하루 동안의 연금.
먼저 칼을 뽑은 아놀드의 과실과 제국군 부대의 상징을 모욕한 클라우스 가문 자제들의 과실.
그에 따른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처벌은 없었으나, 황제의 연회에서 기사를 살해한 불경죄가 적용되어 내려진 처사였다.
“아무리 정당방위라곤 하지만, 하루라니! 이런 솜방망이 처벌이 어디 있단 말이오!”
“황제 폐하의 결정이십니다. 불복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목소리를 높인 클라우스 남작의 항변은 근위병의 한 마디에 눈 녹듯 녹아 사라져버렸다.
불복은 반역.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케인이 사냥개를 들인 줄 알았더니, 고삐 풀린 미친 개였구나.”
심문실 한편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얀이 고개를 들었다.
파티에서 입는 정복 차림이 아닌, 가벼운 외출복 차림의 카르디어스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
“예법은 되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어 굳이 자리를 만든 것이니.”
제국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목숨을 태우는 군주. 고개를 숙인 얀이었지만, 마음 속 한 군데에 깔린 불쾌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내 생각한 것 보다 많이 죽였더구나. 하이람 그 자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주어진 임무를 했을 뿐입니다.”
“하하, 그래. 그렇다고 치자꾸나.”
인자하게 웃어 보인 카르디어스 황제가 품속에서 안경을 꺼내 얼굴에 꼈다.
군주의 모습에서 학자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꾼 황제. 그 기묘한 변화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따분한 연회에 소소한 재미도 주고, 피도 보여줬으니, 사실 벌이 아니라 상을 주는 게 내 성미에 맞다만, 부득이하게 이런 곳에서 이야기하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기사를 살해하는 것이 재미라.
눈앞에 있는 이 황제 역시, 알리에노르와 같았다.
‘제 정신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얀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인 황제가 입을 열었다.
“케인과 함께 중앙 전선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들었다. 철옹성과도 같은 요새였을진대, 단 백 명의 기사로 이를 돌파한 것은 나 또한 많이 놀랐다.”
“단장님의 지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한 것이 아니란 말이냐?”
글레이프니르의 성능을 앞세워 기사들을 상대한 것이 아니냐. 황제는 얀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케인 단장님에 대해선 정보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얀은 대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와 제 부대는 교란 임무를 맡았을 뿐, 전투의 주역은 로렌츠 기사단이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정보가 맞았구나. 케인 로렌츠가 오러 블레이드를 터득했군.”
역시. 이미 알고있었군.
자신을 이곳에 부른 것은 단지 확인을 위해.
“검의 시대. 그 영광의 시대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때,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 제국의 공작이라…. 허허, 일이 아주 재미있게 흘러가는구나.”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카르디어스 황제가 용건이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확인하고 싶은 것은 모두 알았으니, 너 또한 언제든 떠나도 좋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고개를 숙인 얀을 바라본 카르디어스 황제. 그는 이윽고 생각났다는 듯이 얀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부대와 기체가 많이 상했다고 들었다. 어찌 복구할 셈이냐?”
“기체는 수도 정비창에서, 그리고 부대는…. 제 영지에서 충당할 생각입니다.”
얀의 대답을 들은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참에, 내 일을 하나 맡기려는데. 들어 주겠느냐?”
“하명하십시오. 폐하.”
그렇게 말하자 입가를 비튼 황제가 얀에게 종이 하나를 건넸다.
“이건…?”
“익숙한 모양이지. 그렇지 않느냐?”
그곳에 그려진 것은 콜로서스. 정보원이 급하게 그린 모습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른 콜로서스에 비해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와, 비대한 상체.
“식민지에 델타 콜로서스가 출현한 겁니까?”
“심지어 하나가 아니더구나. 덕분에 식민지에 있는 제국군 거점이 하나하나 함락당하는 실정이지.”
그렇게 말한 황제가 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사, 얀 베르쿠트에게 명하노니,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라.”
“기사 얀 베르쿠트.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무릎을 꿇은 얀이 그렇게 말하자 황제는 미소와 함께 얀을 향해 말했다.
“디아나 영지에 틀어박힌 브락이라는 드워프를 주마. 도움이 될게다.”
그 말과 함께 황제는 웃는 낮으로 심문실을 빠져나갔다.
황제의 명에 따라 연금이 해제된 얀은 심문실을 빠져나오자마자 근위병이 건넨 편지를 받아들고, 그것을 꺼내 열어보았다.
발신인은 비쿠트 영지의 관리인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건 또 뭐야.”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얀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되는 일이 하나 없는 날이었다.
***
“루브라 해방군이라니, 국경지대에 퍼진 반군들 아닙니까?”
로렌을 거쳐 제국 식민지 루브라-바일사르로 향하는 열차 안.
객실에 모여앉은 얀과 단델, 아이린과 렌은 탁자에 놓인 편지를 바라보며 의논중이었다.
“비쿠트 영지의 영주에게 알린다. 이 영지는 루브라 해방군이 점령하여, 자랑스러운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쓰일 것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거기까지 읽은 아이린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얀 또한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착잡한 마음으로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설마 영지가 점거되다니….”
“근처 국경지대는 분명, 벨커스에서 감독하는 게 아니었나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황망하게 중얼거리자 렌이 입을 열었다.
“해방군은 루브라 침공전 당시, 방어선에 집중배치 되어있던 정규군이 군벌로 변화한 집단. 콜로서스 전력은 없지만, 보병 편제와 지휘계통은 제국군과 동등.”
“중부전선에 기사들이 집중배치 된 틈에 방어선을 뚫고 영지까지 쳐들어왔단 말이군.”
중부 전선기지에 몰려든 벨커스 기사들을 떠올린 얀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아무리 중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한다 해도, 기초 방어군까지 빠지지는 않았을 터.
“쳐들어오는 걸 일부러 방조했어.”
얀의 땅인 비쿠스 영지는 벨커스 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지역. 그곳이 뚫렸다면 다른 영지에서도 비보가 날아들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비쿠스 영지 근처의 그 어떤 영지도 이와 같은 침입을 당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아무리 상대 진영이라지만, 같은 제국인데 이렇게까지 하다니….”
“비쿠스 영지는 그래도 되니까.”
단델의 푸념 섞인 말에 대답한 것은 렌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린 역시 궁금했는지 렌을 향해 물었다.
“비쿠스는 알프라이아와 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제국의 반정부 인사나 범죄자들을 가둬놓은 유배지. 그렇기에 방어하지 않아도 죽는 것은 죄인들 뿐.”
“잠깐만요, 그건 마치….”
“형벌부대와 비슷한 처지지.”
형벌부대 출신의 기사에게 주어진 영지는, 같은 죄수들의 땅이라는 건가.
“영주는 허울뿐인 지위. 사실상 그곳으로 흘러들어오는 범죄자들을 단속하는 게 주 임무야.”
“간수나 다를 바 없는 직책이군요.”
그나마 계속해서 흘러들어오는 범죄자들 덕분에 노동력은 충분하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다른 영주들이었다면 이들을 통제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겠지만,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10년간의 전선 생활을 흉악범들과 함께 살아온 얀 베르쿠트.
그에게 딱 맞는 영지가 아닐 수 없었다.
“관리인의 서명으로 이 편지가 왔다는 건…. 영지민들도 반군들에게 잡혀있단 뜻이죠?”
“인질이지. 제국어를 아는 이가 없을 테니 영지 관리인을 시켜 받아쓰게 한 것일 테고.”
단델의 추측을 들으며 지나가는 풍경을 황망하게 바라보는 사이, 편지를 집어든 렌이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암호 있어.”
“뭐?”
“암호요?”
단델과 아이린이 되묻자 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 줄의 첫 글자를 나열하면, 지명이 나와. 초보적인 암호문.”
“아, 진짜네?”
“못알아챘어요….”
렌이 말하자마자 보이기 시작한 암호를 보며 단델과 아이린이 중얼거렸다.
“다들 머리가 굳었어.”
눈을 내리깐 채 말하는 렌의 한 마디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피를 마시며 딴청을 피우는 얀을 포함해서.
쿵- 쿵-
비쿠트 영지로 향하는 길은 굽이친 산길이었다.
케르단 대삼림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급경사에 부대원들 몇몇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부대 기동에 크게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중대장님! 여기가 표시된 지역입니다!”
단델이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손을 흔들자 글레이프니르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앞에 있는 것은 폐허에 가까운 마을…. 아니, 마을이었던 잔해더미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아보였다.
[주변 지역에 생명반응 감지. 수는 약 2000.]
“위치 띄워.”
[지시 확인.]
닐의 목소리와 함께 건물 곳곳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콜로서스에 겁을 집어먹은 듯 숨어있었지만, 몇몇 인원들은 무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 전원 정지. 먼저 진입한다.
그렇게 말한 글레이프니르가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산 중턱의 공터에 위치한 작은 마을 곳곳에서 사람들이 얼굴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 이 곳의 책임자, 있습니까?
마을 한가운데에 울려 퍼지는 얀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는 콜로서스, 총 몇 자루로 사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 제가 마을의 촌장인 앨버트입니다. 기사님께서 이 누추한 마을엔 어쩐 일로….”
‘범죄자들 소굴이라더니, 생각 외로 얌전한데?’
총격전을 예상하고 먼저 진입한 것이었는데, 글레이프니르가 오자마자 무기를 버리는 이들을 보며 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 기사님…?”
벌벌 떨면서 그렇게 묻는 촌장의 한 마디에 글레이프니르의 해치가 열리고, 그 곳에서 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거 봐! 제국군이야!”
“젠장.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래도 콜로서스가 왔는데, 어떻게 되지 않겠어?”
영지민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땅에 발을 딛은 얀이 손짓하자 그레이하운드 중대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계의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영지민들은, 그들의 옷이 제국군의 군복이라는 데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들의 어깨에 찍힌 형벌부대의 낙인을 보자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혀, 형벌…!”
“조용히 해! 산채로 잡아먹힌다고!”
“해방군이 밀고 들어오더니 이번엔 형벌부대라니…!”
절망이 가득한 영지민들의 분위기를 보며 한숨 쉰 얀은 촌장을 불러 세운 뒤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이 영지를 관리하게 된 영주, 얀 베르쿠트입니다. 다른 영지민들은 억류되어 있는 겁니까?”
그렇게 묻자 촌장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주님이요?”
“예.”
“그, 약탈이나 살인 같은 건….”
“안합니다.”
“그럼 이 형벌부대원들은…?”
“제가 지휘하는 부대원들입니다.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길.”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촌장은 그 사이 십 년은 더 늙은 듯이 보였다.
“이, 이보게…. 영, 영주님일세…. 차라도, 한, 한잔….”
그 말과 함께 촌장은 쓰러졌고, 얀과 일행들을 안내하는 것은 무장한 인원들의 우두머리 격인 청년의 몫이었다.
“해방군에 가담했다구요!?”
촌장의 집 안.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란 단델의 고함소리가 집을 가득 울렸다.
“예, 예…. 예전부터 이 영지는 영주가 아닌, 두목이라 부르는 자가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범죄자 소굴에 황제 직할령. 사실상 영지의 탈을 쓴 변방 교도소나 다름없는 공간에서 어떤 생태계가 펼쳐졌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 자가 영지에 주둔한 제국군들 몰래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더니…. 어느 날 주둔군을 전부 죽이고 해방군과 결탁해버렸지 뭡니까. 범죄자로 죽을 바에야 제국에게 한 방 먹이고 죽겠다고….”
“하하….”
영지에 얽힌 사연을 들은 얀이 헛웃음을 흘렸다. 영지민, 아니, 수감자 목록에 적힌 두목이라는 자, 운트의 죄목을 살펴본 뒤에 나온 헛웃음이었다.
“살인 32회, 강간 84회에 강도는…. 뭐 볼 것도 없네.”
어째서 진작에 사형시키지 않았는지 묻고 싶을 정도의 죄목이었다.
“이곳에 남아있는 분들은?”
얀이 그렇게 묻자 촌장 앤드류가 입을 열었다.
“저흰 원래부터 대대로 이곳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입니다. 해방군을 피해 빠져나온 영지민들을 이끌며, 이 마을에서 근근이 생활하고 있지요.”
그렇게 말하는 촌장의 집, 갈라지고 구멍이 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들의 집을 둘러본 얀은 생각을 마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우린 해방군을 제압하고 영지를 되찾는다.”
“배치는 어떻게 하십니까?”
“단독으로 돌입한다. 중대 전원은 마을에 대기. 영지민들 보호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단델이 생각났다는 듯 얀에게 물었다.
“해방군에 가담한 영지민들은 약 오백 명 정도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렇게 묻자 얀은 단델의 얼굴을 바라본 뒤 빙긋 미소 지었다.
갓 찍어낸 가면에 새겨진, 너무나도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
“이봐 저기!”
“콜로서스라니! 씨발, 이런 건 못 들었다고!”
“두목!”
비쿠스 영지의 내성은 갑작스레 나타난 침입자로 인해 비상이 걸렸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콜로서스. 심지어 로렌츠 가문의 인장을 새긴 콜로서스였다.
‘하, 성이라니.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영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듯, 옛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비쿠스 성을 바라보며 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아, 아. 들리나?
콜로서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성 안에 앉아있던 두목 운트가 황급히 성 발코니로 나왔다.
- 해방군. 및 그에 가담한 영지민들에게 알린다.
“흥! 항복권유인가? 웃기지 말라 그래! 네놈들에게 항복할 바에는…!”
그렇게 말하며 부하들을 다독이려는 운트의 말이, 이어지는 얀의 한 마디에 의해 멈췄다.
- 절대 투항하지 마라. 네놈들은 오늘 성 안에서 전원 사살한다.
…잠깐, 뭐라고?
콜로서스의 확성기를 통해 들려온 어처구니없는 한 마디에, 운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쿵-!
그 말이 들린 뒤 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이미 성 내부로 들이닥친 글레이프니르가 양 팔에 달린 기관포를 장전하고 있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