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연회(2)
뻑!
“끄윽!”
갈색 머리의 청년이 수 미터를 날아가 연무장 바닥에 처박혔다.
제복 차림의 기사는 코웃음을 치며 먼지가 묻은 옷을 툭툭 털었고, 그의 뒤에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헹! 꼴좋다! 천박한 녀석!”
“감히 우리 얼굴에 이 따위 흠집을 내?!”
그렇게 외치는 이들의 얼굴에는 얻어맞은 듯한 멍이 가득했다.
“도련님들. 이쯤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놀드 경! 저 천한 것이 우리한테 한 짓을 보시라구요!”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팔을 분질러야 할 것입니다!”
후우.
방금 전, 달려든 단델과의 일합을 떠올린 아놀드는 한숨과 함께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건은 한 시간 전, 연무장에서 단델과 저들이 만남으로써 시작되었다.
“어? 뭐야, 단델 아니야?”
흠칫, 놀란 듯 어깨를 떤 단델이 고개를 돌아보자 그곳에 있는 것은 경박한 웃음을 지은 갈색 머리의 남자들이었다.
“형벌부대에 들어갔다더니, 신수가 폈네? 이번에 훈장까지 받는다지?”
“웃기지도 않는구만. 등신같이 참호 구덩이에 몸이나 묻고 떨고 있었겠지. ‘살려주세요~’ 이렇게 말이야.”
“하하하하하!”
이죽거리는 형제들의 비아냥이 이어졌지만 단델은 한숨을 내쉴 뿐, 딱히 대응학지 않으려 했다.
‘섣불리 대응해봤자, 부대의 명성에 흠집이 날 뿐이야.’
이전에 자신에게 찾아온 남자들의 말로를 떠올린 단델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눌러 담았다.
뒷골목에서 동생들과 함께 살던 시절, 그를 괴롭혔던 잡배들은 자신의 상관에 의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다.
그와 함께 얀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탓인지, 단델은 서있는 자리에서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허, 이 새끼 봐라?”
“형님들이 얘기하는데,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어?”
그러나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온 형제들이 단델의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 잘 봐 이 천박한 새끼야. 형님이 왔잖아~ 인사해야지?”
위협하듯 얼굴을 내밀며 이죽거리는 형제들의 모습. 예전 같았으면 무서워 떨 법도 했건만, 지금에 와서는 불쾌감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온갖 일을 다 겪다보니, 나도 무뎌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형제들은 한 명은 단델의 어깨에, 한 명은 단델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하늘같은 형님이 왔는데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이 새끼 군대 가더니 많이 컸다?”
“왜, 전쟁터에서 몇 달 굴러보니까 우리가 우스워 보여? 어?”
그렇게 말한 형제 중 한 명. 레온 클라우스가 단델의 머리채를 움켜쥔 캐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말 해봐 이 새끼야~”
이렇게까지 하자 단델의 인내심에도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놔 주세요. 레온 형님. 오닐 형님.”
굳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놔주세요? 놔주세요오~? 니가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계급이냐?”
“뒷골목 창녀 다리에서 태어난 새끼가, 뭐 잘났다고 장교에 훈장에 씨발!”
욕설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모욕까지 흘러나오자 단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내가 폭발해봤자, 중대장님께, 그리고 동료들에게 좋을 게 하나 없어…!’
그렇게 애써 눌러 참으며 그들을 밀어내려는 순간.
“이건 또 뭐야. 사냥개? 꼴에 이딴 것도 붙이고 다니냐?”
찌익.
옷감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단델의 어깨에 박음질된 그레이하운드 중대의 부대마크가 떨어져나갔다.
“이야, 힘 좋습니다? 레온 형님?”
“나도 몇 년 뒤면 기사다 이 말이야. 이까짓 옷감 정도…!”
그렇게 말하며 뜯어낸 87독립중대의 부대마크를 이리저리 흔드는 레온의 모습을 본 순간, 애써 잡고 있던 단델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그 부대마크를 군복에 박아 준 에드가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묻어준 것이 단델이었다.
뻐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두 형제의 얼굴을 곤죽이 될 때까지 두드리고 있었고, 이윽고 난입한 경호기사의 손에 지금껏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만 하십시오 단델 소위. 이미 한계입니다.”
벨커스 가문의 기사, 아놀드는 천덕꾸러기와 같은 클라우스 가문의 자제들과 단델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으으…!”
얼굴 몇 대 얻어맞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저들에 비해, 천출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는 이미 수십 번을 얻어맞았는데도 불구하고 투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마력이 없으니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상상 이상의 강적이다.’
생각을 마친 아놀드는 몸에 마력을 집중했다.
귀족 자제들의 싸움에 끼어든 것부터 맘에 들지 않은 차, 단번에 명치를 후려쳐 기절시킨 뒤 저들을 끌고 갈 심산이었다.
‘당초에 생각이 있는 자들인가? 보조 임무였다고는 하나, 이번 전투의 주역 중 하나인 87 독립중대의 부중대장을, 무도회장에서 자극하다니.’
계속해서 단델을 죽이라는 둥 소리 지르는 클라우스 가문의 적자들을 보며 아놀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클라우스 가문의 요청은 웬만해서는 수행하라는 하이람의 명이 있었지만,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선을 넘었다.
‘우선 재빨리 상황을 끝내고, 중대장인 베르쿠트에게 알려 사태를 수습할 수밖에 없겠어.’
공훈을 세웠다고는 하나 저쪽은 형벌부대 출신의 독립중대고, 이쪽은 제국 최대의 기사단.
나름의 성의를 보이면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단델.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러나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온 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주, 중대장님….”
“묻잖아. 무슨 상황이냐고.”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목소리에 레온과 오닐이 흠칫 몸을 떨었다.
기사인 자신조차도 마른 숨을 삼키게 하는 귀기. 온실 속에서 자라난 도련님들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 제 잘못입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거 말고 니 어깨. 네가 뜯었나?”
단델의 제복 어깨에 박혀 있어야 할 그레이하운드 중대의 부대마크가 뜯겨져 있는 것을 본 얀이 그렇게 묻자 단델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건…!”
“아니면, 누군가 뜯어버린 거지? 우리 중대의 상징을?”
저벅, 저벅.
군홧발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오는 얀의 시선이 공포에 질린 레온에게 닿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부대마크, 그리고 곤죽이 된 단델의 얼굴을 확인한 얀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냐?”
“히, 히익?!”
“가져와.”
얀의 두 마디에 다리를 부들거리며 다가론 레온이 천천히 얀의 손에 부대마크를 넘겼다.
그것을 받아든 얀은 상한 곳이 없는지 그것을 이리저리 살핀 뒤….
우드득!
뒤꿈치로 레온의 무릎 관절을 찍어눌러 역으로 꺾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진 레온이 고통에 거품을 물었다.
관절이 빠지고 뒤틀리는 감각과 함께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 끔찍한 고통이 그를 엄습해왔다.
“혀, 형님! 이게 지금 뭐 하는…!”
으직!
오닐의 경우에는 손가락이었다.
갑작스럽게 이어진 얀의 행동에 삿대질을 하며 다가온 그의 손가락을 잡고, 그대로 뒤로 젖혀버렸다.
“으, 으아아악!?”
이윽고 안면에 정권 한 방.
뻐억!
부러진 앞니 네 개를 토해내며 순식간에 쓰러진 오닐을 잠시 바라본 얀이 두 사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거기까지 하시오. 얀 베르쿠트 경!”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놀드는 이미 검을 뽑은 상태였다.
“클라우스 가문의 자제분들이 실례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손속이 너무 과하지 않소! 이 이상 저들을 해한다면…!”
“야.”
낮게 깔린 얀의 목소리에 아놀드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너 지금 칼 뽑은 거 맞지?”
그 말을 들은 아놀드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으레 다른 잡배들에게 하듯이 반사적으로 뽑아든 검.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기사였다.
기사가 기사를 향해 검을 뽑아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푹!
“끄으으윽!?”
아래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아놀드가 황급히 자신의 발을 보았다.
얀이 밟고 있는 커다란 군용 대검이 자신의 발등을 수직으로 뚫은 채, 땅에 박혀있었다.
몸을 빼려 움직이는 순간 발이 양쪽으로 찢어질 판이었다.
“어느 틈에…!”
“니가 칼 뽑았을 때지.”
곧바로 얀의 무릎이 아놀드의 허벅지를 때렸다. 나노머신으로 인해 활성화된 육체는 마력으로 강화된 아놀드의 허벅지 뼈를 말 그대로 산산조각내며 그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아아악!?”
이윽고 쓰러진 그를 깔고 앉은 얀이 사정없이 그의 안면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뻑! 뻑! 뻑!
한 번 얼굴을 칠 때마다 부러진 이빨과 잇몸 조각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만…! 그만…! 하, 항복을…!”
“그 전에 죽인다.”
그의 전의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챈 얀은 아놀드가 항복 선언을 하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두덩이를 집중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으직! 으직! 빠드득!
발버둥치려 내밀어지는 손을 꺾고, 안구가 터져 진물이 흐를 때까지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검으로 이루어지는 기사끼리의 결투가 아닌, 일방적인 폭력.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살해였다.
털썩.
생기를 잃고 축 늘어진 아놀드의 시신을 뒤로 하고, 몸을 일으킨 얀이 그 장변을 바라보고 있는 단델을 마주보았다.
“죄송합니다.”
“뭐가?”
고개를 떨군 채 그렇게 말하는 단델을 향해 얀이 되물었다.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기사가 죽은 상황이니 부대의 명성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단델의 말을 끊은 얀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대 상징을 모욕당한 것에 격분한 87독립중대 중대장이 독단으로 귀족 자제를 폭행, 기사를 살해한 거다. 넌 날 말려서 저 애새끼들 목숨을 구한 거고.”
“예…?”
물 흐르듯 줄줄 흘러나오는 자작극에 벙찐 표정을 한 단델이 얀에게 되물었다.
“그, 그렇게 되면 중대장님의 평가가….”
“형벌부대 출신 버러지한테, 더 떨어질 평가가 어디있는데?”
그 말을 들은 단델이 주먹을 꽉 쥐었다.
황제가 주최한 연회에서 기사를 살해한 대 참사. 그쪽이 먼저 칼을 뽑았다는 정당방위가 인정되더라도, 귀족들 사이에서의 얀의 평가는 바닥을 칠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근위병한테 보고해. 난 이 새끼들 아가리 틀어막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레온과 오닐에게로 다가간 얀이 어긋난 그들의 관절을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우득! 뿌드득!
“끄으윽?!”
“아악!”
격통에 몸부림치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참하게 맞아죽은 아놀드의 시체. 그리고 두 손에 피를 흥건하게 묻힌 채 자신을 바라보는 얀의 얼굴이었다.
“으, 으윽…?!”
“수사관이 와서 일의 전말을 묻는다면, 전부 내가 한 짓이라고 대답해.”
“그게, 무슨…?”
“안 그러면 죽인다.”
더 이상의 질문은 필요 없었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확인한 얀은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단델에게 다가가 그에게 부대 마크를 건넸다.
“대, 대장님….”
“이번엔 잘 했어.”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 얀은 단델의 등 뒤로 다가오는 근위병들을 본 뒤 양 손을 머리위로 올렸다.
“움직이지 마시오. 얀 베르쿠트 경!”
“황제 폐하의 연회에서 기사를 살해하다니, 이런 불경한!”
“포박하라! 어서!”
이윽고 근위병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를 옭아매고, 얀은 그들과 함께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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