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85화 (85/186)

85. 기사의 죽음, 죄수의 죽음.

[순항 모드 종료. 목적지 도착.]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한 편에서 들려오는 닐의 기계음에 얀이 감았던 눈을 떴다.

당장이라도 혈관을 뚫고 나올 것 같았던 나노머신들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지만, 연결을 해제하는 것과 동시에 끔찍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얼마나 오래 있던 거지?”

눈앞의 모니터를 향해 그렇게 묻자 고저 없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연속 가동시간 37시간 경과. 최장 가동시간 갱신.]

“씨발, 하나도 안 기쁜데.”

투덜거린 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서도 역시 지칠 대로 지친 로렌츠 기사들이 하나 둘 전선기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도, 돌아왔어?”

“말도 안돼! 그 요새를…. 정말로?”

전선기지로 돌아오는 콜로서스들을 바라보는 이들 중 몇몇이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나같이 벨커스 새끼들 뿐이군.”

“왜, 우리가 돌아온 게 그리도 놀라운가 보지?”

황자의 명으로, 떠밀리듯 편성되어 승산 없는 공선전에 떠밀린 기사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몰려든 로렌츠의 기사들.

콜로서스의 관측창 너머로 보이는 벨커스 기사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쿵-.

그러나 그런 이들의 독기는 한 사람의 발소리에 자취를 감췄다.

그들을 이끄는 가주, 케인 로렌츠의 기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치익-!

찌그러진 은빛 콜로서스의 해치가 열리고, 그곳에서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승전 보고를 올리겠다. 사령관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렇게 말하는 케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적의 규모, 방어 수준, 배치, 무장 상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려진 것 없이 보내진 선봉대의 수장은, 기어코 그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고, 중부 전선의 요충지를 그들에게로 가져왔다.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뚫지 못했던 천혜의 요새가, 단 하루 만에 무너진 것이었다.

“케인 로렌츠! 그가 해냈어!”

“전장에 로렌츠가 합류하자마자 요새를 무너트리다니!”

“이제 됐어! 이 전쟁은 바일사르의 승리다!”

환호성과 함께 곳곳에 몰려든 것은 기자들이었다.

돌격포에 맞아 찌그러지고, 과열되어 녹아내린 장갑판. 이곳저곳 부서진 부품들과 삐거덕거리는 관절부.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콜로서스가 망토처럼 두르고 있는 로렌츠의 가문기는 조금의 상처도 없이, 이 전투의 주역이 누구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찰칵!

찰칵!

펑-!

플래시와 셔터 소리가 전장에서 돌아온 기사들을 맞이했다. 없는 전과를 만들거나, 전선에서의 미담 같은 시간벌이용 기사만을 쓰던 이제까지와는 다른, 진짜 승전보를 제국에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선기지에 모인 종군기자들을 고무시켰다.

“케인 경! 이쪽을 봐주십시오!”

“50년 동안 누구도 뚫지 못한 요새를 함락시키셨습니다! 소감 한 말씀…!”

“로렌츠 가문은 앞으로도 전쟁에 기사를 파견하실 계획입니까?”

“사진 한 장만 찍겠습니다! 이쪽 좀…!”

콜로서스 정비창까지 따라온 기자들이 케인이 몸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달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비키시오!”

“허구한 날 되도 않는 기사만 쓰던 양반들이 이제 와서…!”

“당신네들이 로렌츠 가문에 대해 쓴 기사들을 우리가 모를 줄 아는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그들의 태도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 기사들이 거칠게 기자들을 밀쳐냈다..

마지막에 기사가 내뱉은 외침에는 미미한 마력마저 감돌고 있었다.

“재밌군요. 하이람의 말만 받아 적던 기자들이 이젠 우리한테 몰려오는 꼴이라니.”

“그만큼 이번 전투가 중요했다는 반증일세. 뭐, 가르드 황자께서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으신 듯 하지만 말이지.”

예비병력까지 합하여 요새를 방어하던 콜로서스는 200기 가량이었다.

거기에 요새의 성벽, 요새포, 마법사들의 마력포와 지형까지…. 글레이프니르가 성문을 뛰어넘어 교란했다 하더라도 뚫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본래 작전은 요새 내부까지 돌입한 뒤, 지휘관을 생포, 혹은 사살 후 이탈하는 거였죠. 설마 내부로 돌입해서 난전을 벌일 거라곤….”

“돌입 과정에서 에서 스물이 넘는 콜로서스를 잃었네. 그 상황에서 이탈하려 했다면, 곧바로 요새포의 먹이가 되었을 거야.”

로렌츠의 기사들이 몰려드는 기자들을 틀어막는 동안 지휘부로 들어온 얀과 케인을 기다리는 것은 쓴웃음을 띈 클라우스 황자. 그리고 얼굴이 시뻘게진 가르드 황자였다.

“다시 못 볼 줄 말았네. 케인.”

“피차 할 일이 많은데,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있겠습니까?”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은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사이, 가르드 황자는 얀에게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 한 거냐?”

“뭘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살아 돌아왔냐고.”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얀을 향해 질문하는 가르드는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하긴, 본래 계획이라면 로렌츠 기사단이 성벽을 공격하며 방어군을 소모시킨 다음 본대를 투입해 요새를 함락시킬 생각이었겠지.

자기 딴에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이렇게 파토가 나니, 심기가 불편할 법 했다.

“명령하신대로 싸웠고, 이겼습니다.”

“지금 장난하냐? 그게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움켜쥔 가르드 황자였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이미 뒤에 몰려들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는 기자들을 눈치 챈 탓이었다.

“웬일로 얌전하시네요? 하이람 백작이 기자들 앞에선 성질 죽이랍니까?”

“이 새끼…!”

얀의 한마디에 안 그래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파르르 떨려왔다.

안 그래도 자신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계획이 최악의 방향으로 어그러진 상황. 하이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눈에 선했다.

“여기서 한 대 치실 거 아니면 표정 관리 하십시오. 지금 얼굴도 찍혀서 신문에 나갑니다.”

“큭…!”

경쟁자라고도 할 수 있는 클라우스의 인간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가르드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보고는 내가 하겠네. 얀 중위, 자네는….”

“알겠습니다. 부대 상황 확인 후,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네. 자네도, 자네 대원들도.”

상황을 중재하려는 케인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인 얀이 짧게 경례한 뒤 몸을 돌려 사라졌다.

“저 개새끼…!”

멀어져가는 얀을 바라보며 씹어뱉듯이 내뱉은 가르드였지만 이윽고 다가오는 케인을 마주하며 주먹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

“더글러스, 필립, 알렌, 에드가….”

퀭한 눈으로 서 있는 단델은 자신의 한 손에 들린 명단에 적힌 이름을 되뇌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인 결과, 작전에 투입된 50명의 중대원들 중 21명이 전사.

한 순간에 중대원의 절반이 날아갔다.

“소위.”

“아, 주…. 중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얀의 목소리에 단델이 뒤를 돌아보았다.

제복 차림의 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망자 시신인가?”

“제대로 확보한 건 다섯 명이 전부입니다. 나머지 인원들은….”

마처 말하지 못한 채 말을 흐린 단델은 눈 중대 막사 한 편에 놓인 시신들에게로 눈을 옮겼다.

고블린과 오크들은 죽인 인간의 시체를 그냥 두지 않는다.

식인 생물로 악명이 높은 고블린들은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은 채 죽은 인간의 시신을 먹어치우고, 오크는 투쟁의 증표를 위해 시신의 머리를 잘라간다.

온전하게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상황이었다.

“흑…. 흑….”

모아둔 시신들의 한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게 자른 백금발을 지닌 착은 체구의 소녀.

아이린이었다.

“사망자 명단에 있던 알렌이…. 첫 훈련 교관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여기 들어온 게 딱하다면서 많이 챙겨줬죠.”

“시신은?”

“확보 못했습니다.”

후, 나지막이 한숨 쉰 얀은 단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얀이 내미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단델의 눈이 깊어졌다.

“그 와중에…. 다 찾아오셨군요.”

작은 동판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 시신을 찾지 못한 열여섯 명의 군번줄이었다.

“누락된 거 없는지 확인하고 유품 정리해. 가족관계도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얀의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인 단델이 몸을 돌려 막사 사무실로 뛰어갔다.

그것을 잠시 바라본 얀은 이어 시신들 사이에서 흐느끼는 아이린을 향해 다가갔다.

“밖에선 전사한 기사들을 추모하는 행가를 준비하더군.”

얀의 한 마디에 흠칫 어깨를 떤 아이린이 얀을 올려다봤다.

그가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가장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 이 녀석들은 운구 차량에조차 실리지 못했지.”

그들의 시신이 누워있는 곳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모아놓는 곳이 아닌, 87 독립중대의 빈 창고였다.

“이게 형벌부대의 죽음이다. 전사자 수로 집계조차 되지 않아. 이 녀석들이 여기서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테지.”

“그럴…. 수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이들의 죽음을 들으며 아이린은 애써 흐르는 눈물을 감췄다.

“황자님, 기사들의 추모식이 내일입니다. 오늘은 그 준비를 하심이….”

“이들 또한 내 병사요. 그리고 저들이 아니었으면, 요새에 배치된 마력포에 기사가 수십은 더 죽었을 테지. 나더러 그걸 외면하라는 것인가?”

“그러나 저들은 형벌부대입니다! 범죄자를 애도한다는 건 황실의 체통이…!”

“사람의 죽음 앞에 체통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썩 물러가라!”

멀리서 들려오는 말다툼 소리에 얀과 아이린이 시선을 돌렸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클라우스 황자가 수행원들과 함께 형벌부대의 창고로 걸어오고 있었다.

“87중대의 전사자들이 저들인가?”

클라우스가 얀을 향해 그렇게 묻자, 얀이 조용히 대답했다.

“이 인원을 포함한 스물여섯 명입니다. 전투원이 모자란 바, 당분간 작전 행동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닐세.”

그렇게 말하며 시신들을 향해 다가간 클라우스 황자는 평상시에 보던 가벼운 셔츠 차림이 아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붉은 색 정복과 고인에 대한 애도를 의미하는 검은 망토.

그리고 한 손에는 고풍스럽게 장식된 상자를 든 채였다.

“아무리 형벌부대라지만 이렇게….”

이를 악문 채 그들의 시신을 바라본 클라우스 황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보급도, 거주 환경도, 형벌부대에 입대한 이들로써는 과분할 정도의 호사입니다. 여한은 없겠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을 마친 클라우스 황자가 자신을 보좌하는 수행원들에게 손짓하자,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신을 덮은 천을 치우고, 그곳에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제국군 군기를 덮자, 그들에게로 다가온 클라우스 황자가 다섯 구의 시신 하나하나에 뭔가를 놓아주기 시작했다.

“훈장…. 입니까?”

“2급 전사자 훈장일세. 제국군 병사가 전사하면 주어지는 것이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시신에 훈장을 올린 뒤, 시신을 감싼 천의 주름을 잡아준 클라우스 황자는 이윽고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화, 황자님…!”

그의 그런 행동에 수행원들, 그리고 보고를 위해 창고에 들어온 단델 마저 아연실색해했다.

황족이 직접 고개를 숙이는 것은 기사나, 그에 준하는 자를 애도할 때의 예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빨리 황위 경쟁에 뛰어들었다면…. 가르드 형님을 막을 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테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연 클라우스 황자의 얼굴은 회한에 잠겨있었다.

“그게 두려워서…. 세상에 나가는 것이 싫어 시간을 끌었어. 그러니 이제 와서 내가 자네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이군.”

고개를 든 클라우스 황자가 얀을 바라봤다.

“황제가 되겠네. 그리고 그대들을 기억하겠네. 바일사르 제국 13황자, 클라우스 반 바일사르의 이름으로. 그대의 앞에서 약속하네.”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는 얀에게 상자를 건넨 뒤, 경례했다.

받아든 상자 안에는 시신을 찾지 못한 열여섯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정도면 뭐, 저 녀석들도 만족하겠죠.”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한 얀이 케인을 마주 보며 경례했다.

“87 독립중대 중대장, 얀 베르쿠트. 황자님의 약속을 믿고, 보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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