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가주의 무게.
로렌츠의 가주가 기사단을 부른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선기지로 전해졌다.
분주하게 출정을 준비하는 로렌츠 기사단의 기사들과 87독립중대의 출정 허가서를 받아든 제국 2 황자 가르드는 우습다는 듯 코웃음 칠 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긴! 다 보내!”
얼굴을 찡그리며 그렇게 말한 가르드를 살핀 전령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지만, 가르드의 대답에 변화는 없었다.
“흥! 순순히 패장으로 돌아온다면 남아있는 기사단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렇게 내뱉자 주변에 있는 젊은 장교들이 일제히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황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되려 희생을 늘리는 꼴이라니요.”
“본대의 출정준비는 순조로우니, 로렌츠 기사단의 패주 후 돌입한다면 저희 명성은 더욱 올라갈 겁니다!”
아첨꾼, 그리고 간신. 가르드의 눈을 가리기 위해 하이람이 배치한 인사들이었다.
그들이 가르드의 비위를 맞추는 사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계속해서 수도에 있는 하이람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부중대장님!”
“어?”
출정준비가 한창인 중부전선 본부. 자신을 불러 세운 아이린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단델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꼴이 말이 아니네.”
“괜찮…. 습니다.”
후방 방어선에서 산발적으로 침공해오는 고블린들과의 전투. 그곳을 거쳐 온 아이린의 표정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시체는 처음 본거야?”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단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처참한 참호 속의 광경을 떠올렸는지, 아이린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기 시작했다.
“어우, 심각하네. 거기 아무도 없어?! 막내 상태가 안 좋은데…!”
“나. 여기 있어.”
휘청거리는 아이린의 몸을 받아든 렌이 단델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아, 정비반장님?”
“응. 난 후방 대기. 내가 데려갈게.”
평소였다면 렌의 손을 뿌리친 뒤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할 아이린이었지만, 전장을 직접 겪고 온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사람의 죽음.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은 충격은 그녀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지휘를 맡아야 해서.”
“알고 있어.”
가볍게 렌을 향해 목례한 단델이 코트를 고쳐입으며 부대원들이 대기중인 곳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 렌은 휘청거리는 아이린을 데리고 막사에 들어가 안색이 창백한 그녀를 옮겼다.
“먹어. 맛은 없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거.”
“가, 감사합니다….”
막사에 도착한 아이린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을 무렵, 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을 아이린에게 건넸다.
“주인님은…. 변방 전선에서 10년을 버텼다고 들었어요.”
“버텼어.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장에서.”
무감정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렌을 바라본 아이린은 이를 악물었다.
버틸 수 있다고? 실전에 나갈 수 있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참호를 넘어온 고블린에게 산채로 뜯어 먹히는 병사를 본 순간 자신이 느낀 감정은 복수심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처음으로 오크의 머리를 쐈을 때, 잘려나간 팔다리를 부여잡고 우는 병사를 보았을 때는 어땠는가.
“전 정말…. 말도 안 되는 떼를 썼군요.”
“….”
자조하는 아이린의 말에 렌은 말없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
“로렌츠 기사단 에퀴테스 사십 량, 예정대로 도착했습니다.”
“고맙네. 세부사항은 직접 전달하지.”
“알겠습니다. 가주님.”
움찔.
거리낌 없이 자신을 가주라고 부르는 기사들의 말에 흠칫한 케인이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대방패를 이용한 집단방어는 기동성에 문제가 있네. 적의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선 오히려 간격을 유지한 채, 최대한 빠르게 돌파해야 해.”
“방어무장은 열처리된 소형 버클러로 한정. 이후 빠르게 진입한 뒤 요새를 공략해야겠군요.”
“적의 화력과 정밀성을 고려했을 때, 2할 정도는 피격된다고 생각하게.”
“하하, 가주님이 저흴 부른 이유를 알겠습니다. 벨커스 같은 초짜들한테는 불가능한 작전이군요!”
“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외치는 지휘기사의 말에 한데 모여 있던 베테랑 기사들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만 케인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꽉 쥐어진 주먹을 쉽사리 펴지 못했다.
가주.
자신을 부르는 그 한 마디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 작전은 새벽. 야간 중에 예광탄 없이 돌입할걸세. 본대는 내 지휘를, 87 독립중대는 별동대로 편성할 테니, 베르쿠트 경의 지휘를 받게.”
“알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베르쿠트 경!”
나이가 지긋한 기사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지만, 얀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와 지형에 대한 세부사항을 공유하는 사이, 붉은 황무지를 비추던 태양은 어느 새 지평선에 걸리고, 푸른 하늘은 점차 그들이 딛고 있는 땅과 같은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레이하운드 중대, 무장 완료했습니다. 작전 가능인원은 사십 명입니다.”
“열 명 줄었군.”
임무에 앞서 무장을 점검하고 있는 로렌츠 기사단의 콜로서스들을 바라보는 케인의 눈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화망을 뚫고 요새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희생이 클 걸세. 도착한다고 해도, 성벽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점차 어둠이 깔리는 임시거점을 바라보며 말하는 케인의 한 마디에 얀이 되물었다.
“대응책을 생각해둔 게 아닙니까?”
“생각했지. 그렇기에 자네와 87독립중대를 불렀고. 그렇지만….”
말을 마친 뒤 케인은 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가장 위험한 임무일세. 몇 명이 죽을지….”
“처음부터 그렇게 쓰이기 위해 만든 부대입니다. 명령하십시오.”
그렇게 답하는 얀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대답을 들은 케인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야겠지. 가문을 위해, 제국을 위해. 난 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죽음을 강요해야해. 난…!”
“단장님.”
거기까지 말한 케인은 얀의 목소리에 황급히 표정을 고치려 했다.
로렌츠의 가주, 제국 최강의 기사, 제국의 2인자. 제국의 2대 공작.
그러나 얀의 눈앞에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이제 막 성년기에 들어선 젊은이일 뿐이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되묻는 케인의 말에 얀이 대답했다.
“저나 제 부대원들. 억지로 여기 끌려온 거 아닙니다.”
“….”
잠시 그 말을 곱씹은 케인은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얀과 얼굴을 마주한 케인의 표정은 결의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자네가 핵심이네. 건투를 빌지.”
그 한마디를 들은 얀은 피식 웃으며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
“키이익! 적습이다아아!”
자정. 알프라이아 중앙군 1번 요새에 비상이 걸렸다.
오전 중에 이뤄진 인간들의 공세를 막아낸 피로가 채 풀리지도 않았을 때, 두 번째 공세가 이어진 것이다.
“마법사님들이 자리를 잡으실 때까지! 우리가 사수한다! 방어 준비!”
“후! 후!”
오크들이 조종하는 4호 콜로서스들이 일제히 성벽 앞으로 다가가며 목표를 쫒았다.
“키익! 전방 400! 콜로서스다!”
고블린의 특징 중 하나는 밤눈이 좋다는 것에 있다.
야간에 이루어지는 게릴라전이 특기인 고블린들 중 일부 지성이 있는 개체는 요새포에 투입되어 야간 포격요원으로 활용되며, 그들이 오크들의 콜로서스에게 표적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후우! 발사!”
쿠콰콰쾅-!
고블린들의 보조로 목표를 포착한 콜로서스의 돌격포와 요새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지역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우렁찬 포성이었다.
투콰앙-!
불붙은 포탄이 궤적을 그리고 날아갔지만, 아무리 고블린의 도움이 있다 해도 지금은 야간.
대부분의 포탄은 표적을 맞추지 못한 채 주변의 땅을 뒤집었다.
카앙-!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노련한 콜로서스 조종사인 오크, 가르-마우쉬가 쏘아올린 포탄이 적 콜로서스의 몸체에 명중했다.
“크으!?”
그렇지만 그것을 확인한 오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방패. 팔꿈치를 겨우 가릴 정도로 작은 방패를 비스듬히 세운 콜로서스가 날아간 포탄을 튕겨냈기 때문이다.
- 발사! 발사하라!
- 인간놈들을 사정없이 밟아버려라!
그러는 사이, 진형을 갖춘 엘프들이 요새 곳곳에 설치된 첨탑에 모이고 있었다.
“배치 완료! 마력포 발사 준비!”
사방이 탁 트인 첨탑. 바닥에 새겨진 것은 온갖 문양이 빼곡히 들어찬 마법진이었다.
세 명의 엘프가 정해진 위치에 자리 잡고 손을 뻗자 바닥에 새겨진 그것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마력포다!
알프라이아 군 요새의 첨탑에서 일제히 떠오르는 불덩이를 본 기사들이 그렇게 외쳤다.
- 기사단 산개! 간격을 유지하며 돌입한다!
케인의 일갈과 동시에 짓쳐드는 마력포 세례.
한 번에 열 발이 넘는 불덩이가 성벽을 향해 돌진하는 로렌츠 기사단을 위협했다.
쿠오오오오-!
그렇지만 이 장전에 참여한 것은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로렌츠.
열처리된 버클러를 정확히 착탄지점에 갖다 대는가 하면, 두 대의 콜로서스가 버클러를 곂쳐 그것을 막아내는 등 곡예에 가까운 기술을 펼치며 이동하고 있었다.
- 크아악!?
그렇지만 희생이 없을 수는 없는 법.
노련한 포수들이 일부러 버클러를 노려 균형을 무너트린 사이, 그곳으로 짓쳐든 마력포가 기사들 몇몇을 사정없이 불태우기 시작했다.
- 가주님! 벤이 당했습니다!
- …확인했네! 지휘권은 알렉이 맡는다! 돌입 개시!
부하의 죽음. 한 명 한 명이 가족과 같은 동료 기사의 죽음을 애써 모른 채 한 케인은 눈앞의 요새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키이익!?”
당황한 고블린들의 괴성에 눈을 찌푸린 오크들은 이윽고 마력포의 사각지대, 성벽 아래로 달라붙는 콜로서스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 마우쉬!
- 라트엘님! 적 콜로서스들이 성벽에 도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돌아본 마우쉬는 씨익 미소 지었다.
- 알프라이아의 기사들이여! 가증스런 인간들을 몰아내라!
- 성왕께 영광 있으리!
- 알프라이아를 위하여!
요새 내부에 대기하고 있는 것은 6호 콜로서스 50량. 그들이 일제히 성벽 아래를 향해 돌격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 이런 미친!
- 버텨라! 우리가 최대한 화력을 받아내야 한다!
- 2량 추가로 파괴! 열 명이 당했습니다!
- 아직 버틸 수 있어! 조금만 더!
가장 위험한 마력포의 사격각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콜로서스의 돌격포 세례가 남아있었다.
버클러를 끼워 맞춰 대방패를 만들어낸 로렌츠 기사들이 그것을 앞세워 쏟아지는 포탄 세례를 간신히 버텨냈지만, 방패 외각에 배치 된 기체들이 하나 둘,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쿵-
그러던 중, 먼 곳에서 들린 진동에 케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억 속에 있는 소리.
그것을 알아챈 케인이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알프라이아의 요새 내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 저 연기는!
- 연막탄입니다! 그렇다는 건!
그 말과 함께, 요새에서 한 줄기 빛이 꼬리를 그리며 올라왔다.
색색으로 빛나는 신호탄.
그것이 뜻하는 문구는, ‘작전 성공’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