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대공세(2)
-전군, 돌격!
암석으로 이루어진 붉은 대지.
한 줌 생기도,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땅을, 강철로 이루어진 거인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쿵- 쿵-
바위를 부수며 걸어가는 콜로서스 집단을 이끄는 것은 벨커스의 문양을 어깨에 새겨놓은 기사, 안빌이었다.
- 전군 방패 착용! 방벽 형성 후 적의 포격을 받아낸다!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안빌과 그가 이끄는 자유기사들. 그리고 케인과 그를 따르는 로렌츠 기사들이 일제히 자리를 잡았다.
- 젠장, 이딴 걸 작전이라고!
- 지금까지 막아낸 마력포만 수십 발이오 안빌! 이대로는 전멸할 뿐이야!
자유기사들과 로렌츠의 기사들이 그렇게 외쳤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 안빌은 요지부동이었다.
- 전군 전진! 성벽 밑으로 돌입한다면 승산이 있다! 멈추지 마라!
- 우리말을 좀 들으시오! 크윽…!
투콰앙-!
알프라이아 군의 마력포에 대항하여 특수 내열처리된 방패를 사용하는 것 까지는 좋았다.
방패를 곂쳐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들고, 이를 내세워 돌진한다는 것 까지는.
문제는 적의 화력이었다.
- 예상한 화력의 세 배가 넘소! 이걸 돌파하기 위해서는 벨커스 기사단이 합류해야 해!
- 하! 천하의 로렌츠가 벨커스에게 도움을 바란단 말인가!
- 이 상황에서까지 그 따위 소리를 할 생각이오!?
이미 합류한 자유기사들 중 반수가 녹아 없어진 상황.
남아있는 로렌츠 가문의 기사들도 방패 부분에 마력을 집중시켜 겨우 틀어막고 있는 실정이었다.
[경고. 분석 결과, 10분 이내에 엄폐물 사이 균열이 발생. 전투 회피를 건의함.]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말이지.”
마력포의 최대 사거리에서부터 연막을 펼치고 돌입하며 간신히 이곳까지 들어온 선봉대였다.
- 방패 과부하!
- 벤! 클럭! 교대하게! 공백은 내가 메꿀 테니!
마력포의 열량을 받아내며 빨갛게 달아오른 방패를 치우는 것과 동시에 케인의 6호 콜로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얀!
- 확인했습니다.
소형 버클로 두 개를 겹쳐 빈틈을 메꾸는 사이, 글레이프니르의 등 뒤에 장비된 레일 캐논이 방패벽의 틈새에서 튀어나와 불을 뿜었다.
투콰아앙-!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나간 레일 캐넌은 이윽고 요새 성벽 위에서 돌격포를 쏴대는 4호 콜로서스 한 대의 몸을 꿰뚫었다.
- 한 기 격추 확인!
- 젠장! 벌써 열 두 대를 날려버렸는데,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군!
열 기씩 무리지어 방패를 교대하며 마모를 최소화하고, 교체하는 틈 사이사이를 얀의 포격이 커버한다.
선봉대가 마력포와 돌격포 세례를 뚫고 여기까지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막힘없는 연계 덕이었다.
그렇지만 모근 기사들이 로렌츠 기사단만큼의 연계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
- 중간 열! 뭐 하고 있나! 어서 교대해야 해!
- 젠장, 아직 방패가 달아오른 채란 말이오!
- 비키시오! 내가 앞으로 나설…! 끄아악!?
콰아앙!
앞으로 나가려는 후열의 콜로서스와 전열의 콜로서스가 뒤엉켜 생겨난 틈새로 정확하게 내리꽂힌 마력포.
순식간에 불덩이가 된 세 대의 콜로서스가 그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 젠장! 여기서 질 소냐! 나 안빌! 목숨을 걸고 가르드 황자님의 명을 완수할지니!
“씨발, 저 멍청한 새끼!”
바로 옆에서 불덩이가 된 세 명의 자유기사들을 보자 안빌 또한 이성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지시한 것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채 검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그의 모습을 보며 얀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 제국에게 영광 있으…!
콰아앙-!
홀로 튀어나온 그의 기체에 순식간에 두 발의 마력포가 작렬했다.
가슴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쓰러지는 콜로서스.
- 안빌!
- 제길, 가려면 진작에 갈 것이지!
- 지휘관이라는 자가…!
그것을 확인한 케인이 혀를 찬 뒤 확성기를 통해 외쳤다.
- 전선 지휘관이 사망한 바, 계급이 가장 높은 나, 케인 로렌츠가 지휘권을 이양 받는다! 연막 살포! 전원 퇴각하라!
푸쉬이이익-!
케인의 지시에 콜로서스의 등에 수납된 연막탄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올라갔다.
퍼퍼펑-!
이윽고 순식간에 전장 곳곳을 뒤덮은 연기.
목표를 잃은 마력포가 마구잡이로 대지를 유린하는 사이, 대열을 해제한 로렌츠 기사단은 서둘러 사정거리 밖으로 몸을 피했다.
“제기랄!”
쾅!
제국군의 세력권의 경계선에 멈춰선 이들.
사실상 이번 작전은 실패. 공세에서 30, 퇴각하는 도중에 12명의 기사가 희생당했다.
소득은 없었다.
“로렌츠의 가주가 참전했음에도 굳이 벨커스의 인물을 지휘관으로 뽑더니 이 꼴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중부전선에선 가르드 황자의 명이 최우선일세. 황제 폐하의 대리인 자격으로 지시한 거니.”
“젠장!”
벨커스 가문의 재정으로 고용된 자유기사들은 이미 대부분 죽어 고혼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로렌츠 가문의 기사들이었지만, 케인은 그런 그들을 다독이며 분위기를 풀었다.
“재물에 의해 고용되었을 뿐, 벨커스에 동조하는 이들은 아닐세. 쓸데없는 충돌은 삼가는 게 좋아.”
“예. 가주님.”
은색으로 도색된 케인의 6호 콜로서스는 포격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신형 기체가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여기서 개죽음당할 뻔했군.”
기사단과 함께 돌아온 얀은 조종석에 앉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선봉대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로렌츠 기사들의 기체는 다른 기사들이 사용하는 페이지 콜로서스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장갑재의 분자구조에서 인류연방군의 합금기술과의 유사성을 발견. 불법 기술 유출에 따른 이의제기를 신청함.]
다른 기체에 대해선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는 닐이 웬일로 반응하자 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글레이프니르와 비슷한 색이 되었군. 그 짧은 시간동안 네 장갑을 분석해서 적용했단 말이야?”
언짢은 듯 점등하는 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말한 얀이었지만, 닐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장갑재 성분에서의 일부 유사성을 확인했을 뿐. 조립 구조, 작동성, 내구성, 밀도, 등 여러 부분은 기술적으로 열등.]
“그래도 다른 기체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 아닌가?”
[긍정. 장갑 내구도의 증가와 함께 기체 중량의 감소 또한 확인.]
적어도 알프라이아 군이 마력로가 세 개 달린 괴물을 만들어내는 동안, 제국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퉁- 틍-
해치를 두드리는 소리.
화면을 바꾸자 케인이 쭈그려 앉아 자신의 조종석 해치를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목덜미에 연결된 케이블을 해체하고, 굳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 얀이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괜찮은가?”
“포격만 전담한 탓에, 체력 저하는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하하, 일은 무슨. 부하들이 자네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고 해서 말이네.”
그런다고 공작가 가주가 평기사인 자신을 데리러 직접 행차하나?
고개를 갸웃거린 얀의 시선에 들어온 로렌츠 가문의 기사들 또한 자신들의 가주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하여튼, 착해빠져서.’
한숨과 함께 밖으로 나온 얀은 케인을 따라 새로 합류한 로렌츠 기사들 틈으로 들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사 얀 베르쿠트라고 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얀의 얼굴을 본 로렌츠 가문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젊다 못해 어린 친구로군. 내 아들 녀석보다도 어리지 않은가?”
“그 혼란 속에서 격추한 콜로서스가 두 자리 수라니, 이런 인재가 변방에 묻혀있을 줄이야….”
얀의 얼굴을 직접 본 기사들은 저마다 감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얀에게 악수를 건넸다.
“자네 활약은 잘 보았네. 베르쿠트 경. 잘 부탁하지.”
“여러분들의 호위 덕분입니다.”
“하하, 이 친구, 아부도 할 줄 아는군?”
그렇게 저마다 한 마디씩을 건넨 기사들은 하나같이 피로에 절어있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로렌츠의 기사들은 오랜만의 젊은이가 반가운 지 얀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그 격전을 치르고도 이럴 기운이 있다니….’
벨커스의 출현 이전까지 소수정예로 제국을 지탱해온 것이 로렌츠 기사단.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칭호가 허명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성능 테스트는 얼추 됐겠지. 정확히 어떤가?”
분위기를 환기시킨 케인이 그렇게 묻자 다른 기사들이 흡족한 듯 설명을 이어갔다.
“페이지와는 차원이 다른 성능입니다. 엘프놈들이 만들어낸 더 심장 셋 달린 괴물이나 6호라면 몰라도, 이제 4호 정도는 기량만 충분하다면 1대1로도 상대할 수 있겠어요.”
제국의 콜로서스 성능이 알프라이아를 추격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소식이었으나, 케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전선에 기체를 보급하는 것이 문제로군.”
“제조는 13황자님이 맡으신 걸로 압니다.”
“맞네. 신형 기체가 로렌츠에 선행 지급된 것도 그 덕이지.”
로렌츠와 벨커스의 갈등을 통해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는 황제 또한 이 결정에 반대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케인은 이내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우습기 짝이 없군. 기체의 보급마저 파벌에 따라 이뤄진다니, 알프라이아의 인구가 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진작에 제국은….”
눈앞에 공공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파벌로 나뉘어 제 힘을 내지 못하는 제국군의 상황을 목도한 케인은 그렇게 말하며 코웃음 쳤다.
“방금 전 전투를 생각해보면, 벨커스라고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자조하는 케인을 향해 그렇게 말한 얀은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안빌의 기체를 바라보았다.
“벨커스의 주 전력이 아닌 떠돌이 자유기사들과 평기사로 이루어진 편성….”
“알고 있네. 게다가 이미 2황자님의 명령이 있었으니, 안빌 그자로써도 선택권이 없었겠지.”
“적의 편성은 안중에도 없이, 명령대로만 돌격해 죽으라니. 그 양아치 새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풉!”
제국 2황자를 양아치라 부르는 얀의 한마디에 로렌츠의 기사들이 통쾌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말 잘했구만 베르쿠트 경!”
“점점 더 맘에 드는 친구야!”
살아남은 자유기사들 중 몇몇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말을 들은 듯 했지만, 끌려오듯 작전에 참가한 그들의 심정 역시 다르지 않은 듯 했다.
“하이람 백작이 수도로 돌아가 버린 탓이지. 황자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없으니, 목줄이 풀린 개처럼 날뛰는 걸세.”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악한 전략에 졸렬한 의도.
이번 전투에서 앙금이 쌓인 것인지, 점잖은 말투였지만 2황자를 개 취급하는 케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 선봉대는 사실상의 버림패.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 로렌츠의 기사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겠지.”
“단장님께 패장이라는 멍에를 씌울 수도 있으니 말이죠.”
전장의 상황을 전하는 언론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패배했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죽었는지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승패에만 관심이 있을 뿐.
“방벽을 이용한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네.”
“기동전을 거는 수밖에 없습니다. 에퀴테스의 기동성이라면 가능은 할 겁니다만….”
“적의 화력이 문제죠. 돌입하기도 전에 녹아내릴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콜로서스의 수마저 절반으로 줄어든 상황. 퇴각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르드 황자의 의도에 놀아날 수는 없지.”
그러나 임시거점에 남아있는 콜로서스들을 살피며 그렇게 말한 케인은 결심을 굳힌 듯, 얀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원을 요청하겠네. 남아있는 로렌츠 기사단 의 병력들. 그리고 얀 중위, 자네의 부대까지.”